강주
康州
1. 개요
통일신라의 지명.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체계였던 9주 5소경 중 하나로 옛 가야의 영역이자 대체로 지금의 서부 경상남도에 해당한다. 다만 지금의 경상북도 소속인 고령군과 성주군이 통일신라 강주 소속인 등 세부 경계선은 좀 달랐다. '청주(菁州)'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와는 한자가 다르고 아무 관련이 없다.[1] 중심지는 강주로 지금의 진주시.[2] 11개 군 27개 현을 관할하였다.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에게 협조했다.
2.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에는 차윤웅과 그 부하 왕봉규가 지배했는데, 중국 후당에 독자적으로 조공해 관직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고려, 후백제, 신라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나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의 양아들이던 소격달[3] 은 차윤웅에게 반발하던 강주 호족들을 규합해 차윤웅을 죽이고 왕봉규와 대립한다. 차윤웅이 죽자 강주 호족들은 소격달을 배신하였고 왕봉규가 이를 규합하여 후백제에 붙는다. 이에 소격달은 고려에게 붙었고 소격달은 고려의 도움을 받아 왕봉규도 죽이고 강주 전체가 고려에 복속된다. 왕건은 강주를 순행하면서 소격달에게 중앙관직을 주고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공산 전투 이후 경상도 지역의 주도권을 잡은 견훤은 928년 대야성 함락 후 여세를 몰아 강주를 점령한다. 그리고는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 후백제 땅으로 남는다.[4]
3. 그밖에
가야와 관련이 있다고 하나 가야 전성기의 중심지는 김해였고, 김해는 엄연히 양주에 속했다. 또 진주와 거창은 백제의 영향력에 있었는 등 가야와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금관가야 중심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거의 강주의 영역에 들어간다.
[1] 지금의 청주시의 이름은 당시 웅주의 서원경이었다.[2] 진주에서 '강주'라는 지명은 현재 정촌면에 위치한 강주연못과 인근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3] 소격달의 아버지 소송은 원래 신라의 귀족으로 강주도독으로 부임해 있다가 강주의 유력 호족이었던 차윤웅과 왕봉규에게 죽었다. 왕봉규는 소송의 아내 정효부인 김씨가 이미 임신해 있는 상태인 걸 알고도 받아들였고 태어난 아이는 왕격달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후에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소씨 성을 회복한 뒤 복수를 위해 차윤웅, 왕봉규와 대립한다.[4] 후백제가 항복할 때 강주도독이라는 직함을 가진 용검이 항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