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봉규

 


'''신라 / 자칭 직위'''
<colbgcolor=white,#191919>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지강주사(知康州事)
'''후당 직위'''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성씨'''
왕(王)
'''이름'''
봉규(逢規)
'''생몰연도'''
? ~ 927년 4월
1. 개요
2. 상세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후삼국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일대를 차지했던 호족.
후삼국시대 후반부인 927년까지 독자세력을 형성하는 동시에 중국에 조공할 정도로 제법 위세가 있었지만 강주 지역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따라 후백제에 붙었다가 적대 관계에 있던 고려에게 정복당하여 양아들이었던 소격달에 의해 살해당했다.

2. 상세


천주(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의 호족. 본래 9주 5소경 중 하나인 강주(지금의 진주시)의 일개 지역이었던 함안군(咸安郡) 의령현(宜寧縣)의 태수에 불과했으나 885년 강주도독에 임명되었던 소송(蘇淞)이 890년 인근 호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자 강주의 유력 호족이었던 차윤웅(車閏雄)과 짜서 소송을 죽인 뒤 신라 조정에 소송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강주도독을 찬탈한 차윤웅과 함께 강주의 패권을 차지한다. 왕봉규는 소송의 아내 정효부인 김씨가 이미 임신해 있는 상태인 걸 알고도 받아들였고 태어난 아이는 그의 양아들이 되어 왕격달이란 이름으로 살게 된다. 왕봉규는 왕격달에게 유달(有達)이라는 자도 내려주고 강주도독 차윤웅에게 하동군 태수로 추천할 정도로 꽤 총애했던 걸로 보이나 왕격달은 후에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게 된 뒤 소씨 성을 회복하고 복수를 위해 왕봉규 덕에 얻은 하동군을 근거지로 삼아 고숙 최유문과 연합하여 차윤웅, 왕봉규와 대립한다.
924년과 927년 3월, 4월에 3차례 후삼국 군소 세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중국 후당에 독자적으로 조공해 관직을 하사받기도 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조공한다는 행위는 독자적인 왕국이라고 인증받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사실상 당시 한반도에 있는 나라 중 고려, 후백제, 신라에 이은 제4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다. 고려가 923년에야 처음으로 후량과 통교했고 후백제는 장강 하류의 약소국 오월[1] 정도에나 조공했으며 신라는 아예 중국행을 위해 왕봉규의 협조를 받아야 했던 것을 보면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이존욱후당을 택해 독자 조공한 외교감각은 꽤 놀라울 정도다.[2]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그린 지도에는 태봉/고려, 후백제, 신라 셋만 있어 존재감 자체가 부족하지만 의외로 한참 동안이나 독자 세력으로 존재했다. 삼국시대로 치면 위치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 가야 정도의 존재.
대체로 후백제와의 친선 노선을 걸었으며 그렇다고 신라와도 적대하진 않고 어느 정도 협력했다. 924년과 927년 신라 경명왕, 경애왕의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 왕봉규의 사신도 같이 후당에 조공했는데, 서부 경남의 왕봉규나 김해소충자, 소율희 형제 등 남해안 전역이 반독립적 호족이 다스리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신라 사신이 왕봉규의 협조를 받아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수도 서라벌과 가까운 강주를 지배하는 왕봉규가 적어도 신라 조정을 크게 적대하고 위협하지는 않았던 점에서 그나마 무력해졌던 신라 조정에는 한동안 다행이었던 셈.[3]
925년 후백제와 대립하던 차윤웅과 왕봉규가 거창성에 고립되자 소격달은 차윤웅에게 반발하던 호족들을 규합하여 거창성을 공격하였고 거창태수 한기열이 소격달과 내통하여 차윤웅을 죽인다. 왕봉규는 이때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차윤웅이 죽자 차윤웅에 대한 반발로 뭉친 소격달의 호족 연합은 흐지부지되었고 이를 틈타 왕봉규는 강주 호족들을 회유하여 강주의 패권을 차지한다.[4] 왕봉규는 이때 외교 감각을 발휘하여 친고려였던 차윤웅과 달리 친백제 노선을 타 현 경남 서남부에 해당하는 하동군이 근거지였던 소격달을 완전히 포위하게 된다. 소격달은 거창 호족 한기열을 통해 간신히 고려와 연결할 수 있었고 귀부 의사를 밝힘과 동시에 지원을 요청한다.
927년 4월 마침내 고려군은 소격달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영창, 능식이 이끄는 수군을 통해 강주를 침공하였고 이때 소격달도 고려군에 호응하여 함께 왕봉규를 죽인다. 자신을 적대한 왕봉규를 처리한 게 꽤 기뻤던지 이 해 8월에는 왕건이 직접 강주에 순행을 오기도 했으며, 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던 임언(林彦)이라는 사람이 대록군(천안시)에 정착하여 고려의 사신이 되고 임언의 딸이 왕건의 후궁이 된 것을 봐서 왕봉규의 휘하 세력은 고려에 항복,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강주는 후백제의 침공으로 후백제에게 넘어간다. 그리고는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 사실상 후백제 땅으로 남는다.

3. 대중매체에서


후삼국시대에서 나름 중요한 인물인데도 드라마 태조 왕건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드라마 자체가 후삼국 시대의 외교보다는 전쟁을 중심으로 다루었기에, 외교사적으로는 중요해도 정작 고려의 침공 한 번에 멸망한 세력인 만큼 묘사하기 어려웠던 듯.
'''태조 왕건 소설판'''에서는 고려군이 강주를 공격할 때 등장하는데, 강주를 지배하고 가야의 후신을 자처하며 세력을 떨쳐보려는 야심은 있으나 능력이 안 받쳐주는 안습한 캐릭터. 위에 소개된 각종 통치행위는 싹 다 날아가고 그냥 운좋게 빈땅은 먹었는데 군사 지휘방법이고 뭐고 개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인간으로 나온다. 덕분에 고려군이 왔다는 소식에 수천에 달하는 병력을 소집해놓고도 명령이라고 내리는 게 그저 "포구로 가자!" 한마디 뿐. 그리고 강력한 고려 정예병과 맞딱뜨린 강주병들이 혼비백산해 흩어지면서 허무하게 강주를 잃는다.
조선일보의 학습만화인 맛있는 한자 시리즈 태조 왕건 편에도 나왔는데, 견신검을 착한 놈으로 그리는 왜곡을 저지른 만화답게 태조 왕건 소설판을 참고했는지 왕봉규 역시 나사빠진 인물로 나왔다, 우물 안 개구리마냥 강주 하나 차지해놓고 왕을 칭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인물로 희화화되었으며, 고려군이 쳐들어오자 "감히 강주왕 왕봉규의 땅을 침략해와? 내 이놈들을 작살내고 고려 정벌에 나서리라!"라는 황당한 소리를 지껄인다. 그리고 최후도 코믹하게 나왔는데, 고려군의 전이갑이 그 앞에 나서서 "이렇게 보니 천신처럼 보이시옵니다. 강주왕 폐하."라 치켜세우자 "그래, 나는 천신이니라. 어서 네놈들 땅으로 돌아가거라!"라고 우쭐대다 전이갑이 "천신이나 하늘나라로 돌아가시지!"라 외치며 휘두른 칼에 그대로 목이 날아가 사망. 그리고 전이갑에게 "쯧쯧, 이제보니 천신이 아니라 귀신이었구만!"이라 고인드립을 당한다(...).


[1] 물론 오월이 오대십국 통틀어 제일 약소국인 편이고 그래서 오대십국시대는 물론 전 중국 역사 통틀어 중국 땅에서 일어난 제후국이라는 보기 드문 타이틀을 달았지만 조공하는 오대는 육로로 연결되어있지도 않았고 오대의 정치도 개판이라 실질적으로는 황제국이나 다름없어서 초대 군주인 전류는 독자적인 연호와 능호를 3대 군주까지는 묘호도 사용했다.[2] 오월은 대외적으로 후량의 제후를 자처하는 외왕내제 체제였으며 후백제의 국서 기록에도 오월왕을 '전하'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왕봉규가 후당에 조공하고 천자국의 대장군 직위를 받았으니 제후국인 오월에서 검교태보직을 제수받은 후백제 입장이 좀 우습게 되었다. 어차피 '''딱히 제수받은 작위도 없는 놈들'''에게 쳐발리면서 별 의미는 없어졌지만.[3] 후삼국시대 중후반부까지도 왕봉규나 소율희를 비롯해, 전국에 신라 조정을 충직하게 따르지는 않더라도 그 역사성을 감안해 동정적이던 호족이 많았는데 927년 견훤의 잔혹한 서라벌 침공으로 인해 견훤이 친신라 호족들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이후 계속 왕건에 밀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4] 위의 사신을 직접 컨트롤한 기사 등에 근거해볼 때 이미 차윤웅은 바지사장 정도에 불과했고 왕봉규가 사실상 실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