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 5소경

 



[image]
  • 행정구역 지도 - 9주 5소경 외 통일 신라 시대의 군현 위치를 살펴볼 수 있다.
1. 개요
2. 상세
2.1. 9주
2.2. 5소경
3. 둘러보기


1. 개요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체계'''. 신라삼국 통일을 달성한 이후, 중앙 집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지방 행정 조직.

2. 상세


9주(九州)는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그 이전 시대에도 유사한 행정 구역 체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1] 신라고구려백제의 지역을 병합하고, 나당전쟁을 통해 당나라의 잔여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이후, 신문왕 5년인 685년,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9주는 중국 전통의 지형설인 구토(九土)에 맞춘 것이고, 5소경은 오행에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
9주는 옛 신라 본국 영토 및 가야 지역에 3개, 구 백제 지역에 3개, 구 고구려 지역[2]에 3개가 설치 되었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 정복민들의 지배와 통합을 강조한 정치적 배려쯤으로 추측된다.
수도 서라벌은 9주 중 양주#s-7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단 양주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9주를 소개하기 전 맨 앞에 따로 경주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도 주변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의창군,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 등은 양주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사실 양주의 치소(현대의 도청소재지 격)가 양주(양산시)인데 수도가 양주 소속이면 양산시 관할이란 말인데 당연히 기록상으로도 양주 도독이 수도를 관할하는 그런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현대에 나오는 신라 9주 5소경 지도에서는 그냥 양주 북쪽에 도시라는 점 하나 찍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경덕왕 16년인 757년에는 행정 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쳤으며[3], 혜공왕 대에 다시 원래 명칭으로 되돌리는 등 시기에 따라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9주'''
'''군의 수'''
'''현의 수'''
'''현재의 지명'''[4]
'''5소경'''
(현재 지명)
신주(新州)→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
27
46
경기도 광주시
중원경(中原京)
(충청북도 충주시)
우수주(牛首州)→수약주(首若州)→삭주(朔州)
11
27
강원도 춘천시
북원경(北原京)
(강원도 원주시)
하슬라주(何瑟羅州)→하서주(河西州)→명주(溟州)
9
25
강원도 강릉시

웅천주(熊川州)→웅주(熊州)
13
29
충청남도 공주시
서원경(西原京)
(충청북도 청주시)
완산주(完山州)→전주(全州)
10
31
전라북도 전주시
남원경(南原京)
(전라북도 남원시)
무진주(武珍州)→무주(武州)
14
44
광주광역시

사벌주(沙伐州)→상주(尙州)
10
30
경상북도 상주시

거타주(居拖州)→청주(菁州)→강주(康州)
11
27
경상남도 진주시

삽량주(歃良州)→양주(良州)
12
34
경상남도 양산시
금관경(金官京)
(경상남도 김해시)

2.1. 9주


는 현 대한민국고려, 조선와 비슷한 위상의 행정 구역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기준으로 9개 주의 이름은 각각,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이다.
9주 밑에는 군·현을 두었으며, 주에는 총관[5],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등의 지방관을 파견했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을 두었는데, 지방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그밖에 특수 행정 단위인 향·부곡 도 있었다.
또한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토착 세력의 견제를 목적으로 '''상수리 제도'''[6]를 실시하였다.
군단격 편제인 '''정'''을 각 주마다 하나씩 배치했으나, 면적이 넓고 국경 지방인 한주에는 2정을 배치했다. 이것이 10정(停)이다. 또한 만보당(萬步幢)을 각 주마다 2부대씩 배치했으며, 이들이 신라 지방군 편제의 핵심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는 점이다.
'''주둔한 주'''
'''10정 부대명'''
'''옷깃 상징색상'''
'''부대 주둔지의 현재 지명'''
'''만보당 부대의 상징색'''
한주
남천정(南川停)
-
경기도 이천시
황흑·황록(黃黑黃綠)
한주
골내근정(骨乃斤停)
황색(黃)
경기도 여주시
황흑·황록(黃黑黃綠)
삭주
벌력천정(伐力川停)
-
강원도 홍천군
흑록·흑백(黑綠黑白)
명주
이화혜정(伊火兮停)
녹색(綠)
경상북도 청송군
청흑·청적(靑黑靑赤)
웅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
충청남도 청양군
황자·황청(黃紫黃靑)
전주
거사물정(居斯勿停)
청색(靑)
전라북도 임실군
-
무주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흑색(黑)
전라남도 나주시
백적·백황(白赤白黃)
상주
음리화정(音里火停)
-
경상북도 상주시
청황·청자(靑黃靑紫)
강주
소삼정(召參停)
-
경상남도 함안군
적황·적록(赤黃赤綠)
양주
삼량화정(三良火停)
-
대구광역시 달성군
적청·적백(赤靑赤白)
위 지도를 보면 한주가 매우 크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지금이야 수도권이 되어 인구가 많지만 이 시대까지는 변방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한강 하류 유역은 '''늪지대'''에 가까웠다. 현대에는 넓은 개활지인 부천, 일산 등은 홍수만 났다 하면 물이 빠지지 않는 곳이라 늦게는 1910년대에야 간척이 시작된 곳도 있으며, 서해안 조수는 '''송파'''까지 올라와 주변에 염해를 끼쳤다. 삼국시대나 후기신라시대 집터가 풍납동, 천호동, 벽제 같은 곳에 있는 이유도 한강이 범람 안 하는 곳이기 때문. 또한 삼국 통일 후 백 년 이상에 걸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지금의 황해도~경기 북부 지역에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개척에 노력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참고로 왕건이 세력을 규합한 송악은 한강-임진강 범람원이 아닌 예성강을 거슬러올라간 곳에 있다. 보통 9주를 표시한 지도에서는 생략하지만 한산주와 별개로 패강진(浿江鎭)이라는 9주 중 어느 주에도 소속되지 않은 특별 행정구역을 설치하기도 했다.

2.2. 5소경


小京. 말 그대로 작은 수도로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의 기능을 분담하기 위해 전국의 대도시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 대한민국광역시 쯤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서라벌이 한반도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는 까닭으로 지역적 편중을 다소 보완하기 위해 '소경'이라 불리는 특수한 행정 구역을 경주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설치했다. 옛 가야의 본거지에 하나,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둘씩 모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었다. 아래 외에 아시촌소경(지증왕, 함안)과 하슬라소경(선덕여왕, 강릉)이 있었는데 세월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 중원경(中原京: 충주): 옛 고구려 영토(진흥왕)
  • 금관경(金官京: 김해): 금관가야의 본거지(문무왕)
  • 북원경(北原京: 원주): 옛 고구려 영토(문무왕)
  • 남원경(南原京: 남원): 옛 백제 영토(신문왕)
  • 서원경(西原京: 청주): 옛 백제 영토(신문왕)
이곳에는 부유한 중앙 귀족을 정착시켜 정복지를 안정시키고, 토착 지방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으며, 신라 중앙 정부의 문화와 정책을 정복지에 확산시키기 위한 첨병 역할을 하였던 행정 구역이었다. 특기할 점은, 대한민국광역시와 달리 상위 행정 기관인 '주(州)'로 부터 독립된 행정 기관이 아니었으며, 주 도독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하위 편제 단위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으로 비유한다면 광역시보다는 특례시에 좀 더 가깝다. 소경은 사신(仕臣) 혹은 사대등이라는 장관이 중앙으로 부터 파견되어 다스렸는데, 사신의 관등은 최대 파진찬으로, 이찬급까지도 올라가는 주 도독보다는 약간 낮은 관등의 인물이 맡았다. 장관급 인사이므로 당연히 사신으로 임명된 사람들은 모두 진골이었다.

3. 둘러보기




[1] 삼국이 통일되기 이전, 신라의 영토가 현재의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지증왕 대인 514년, 지금의 함안군 지역에 '아시촌 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인 557년에는 청주 일대의 중원 지역을 확보하고 충주에 '국원 소경'을 설치한 기록이 있다. 이 중 충주는 통일신라대에도 중원 소경으로 이어진다.[2] 진흥왕의 6세기 한강 유역 정복 이전 기준.[3] 경덕왕이 고친 이때의 지명 대부분이 1260년 이상이 지난, 현대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아직 고유성이 강했던 남북국시대 당대부터 정착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 증거로 훈독이나 음차도 섞여서 쓰였는지 지명 표기가 일정하지 않고 계속 오락가락 한다. 중국식 지명은 본격적으로 한화된 고려시대부터 정착했으며 경덕왕 때 정한 지명과도 다소 차이가 있다.[4] 각 주의 핵심 지역을 기준으로 정리한다. 물론 지금 해당 지역들의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런 각 주의 중심지역이 축소된 건 중국도 비슷하다. 전통적인 광역 행정구역이었던 주(州)가 면적이 축소되면서 당나라 때 도(道)를 최상위의 행정구역으로 설치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시기 신라에서는 전통적인 주만 설치하고 도를 도입하진 않았다. 한반도에 도가 도입되고 주가 그보다 좁은 지역을 가리키는 행정구역으로 변모하게 된 건 당나라가 망한 지 한참 지난 고려 성종 시기의 일이다.[5] 나중에 도독으로 개칭.[6] 지방 귀족 혹은 유력한 토착 세력의 자제를 수도 서라벌에 인질(볼모)로 잡아두는 제도. 후대 고려시대의 기인제도나 일본 에도시대산킨코타이 제도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