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전투

 


'''공산 전투
公山戰鬪'''

'''시기'''
927년 11월
'''장소'''
신라, 공산 (현 대구광역시 팔공산)
'''원인'''
후백제의 신라 침공과 고려의 대응.
'''교전국'''
고려
후백제
'''지휘관'''
<^|1>'''왕건'''
복지겸
신숭겸
김락
최지몽
전의갑†
전이갑†
강공훤
손행†
호의†
전락†
김철†
연주
황보능장
'''견훤
최승우
견금강
관흔'''[1]
'''병력'''
20,000 명?[2]
불명[3]
'''피해'''
왕건의 기병 5,000명 중 전사자 4,930명[4]
고위 지휘관 8명 전사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후백제의 완승
'''영향'''
후백제, 후삼국의 주도권 장악.
1. 개요
2. 배경
3. 전개
5. 결과와 영향
7.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후삼국 시대의 전투.
서기 927년 고려왕건후백제견훤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전투. 이 전투는 후백제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 이후 고창 전투 직전까지 후삼국 시대의 형세는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2. 배경


918년 왕건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등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낸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략에 매진하기 위해 고려 쪽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고, 이는 건국 초기 온갖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고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5]
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한 통일의 야망을 가진 군웅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특히 신라를 적대시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고, 이는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견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 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성을 지켜내어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왕건과 견훤은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하지만, 후백제의 인질인 진호가 1년만에 죽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이라 생각하여 왕신을 죽여버리고 강화를 파기한다. 이에 분노한 왕건은 신라와 연합하여 견훤에 맞서 싸운다.
견훤의 군대가 웅진으로 치고나오자, 고려와 신라군은 웅진과 문경 인근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때 고려의 장군 김락이 '''한반도를 반바퀴 돌아''' 진주에 상륙, 견훤이 수 차례 공격 끝에 간신히 점령한 대야성을 탈환하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는다. 이 기동으로 인해, 견훤은 어느 통로로 진격해도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빠지게 되었다. 왕건은 내친김에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서 백성들을 위무하자 문경 일대의 호족들도 고려에게 투항하면서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전개


926년 4월.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 웅진으로 진군, 왕건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문을 굳게 걸어닫고 절대 나가 싸우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한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견훤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도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진격의 북을 울려 위세를 떨치신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질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이 넘쳐나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뿐이오.”라고 하였다.

결국 견훤은 공세를 포기한다.
그러던 927년 1월, 신라군과 연합한 왕건은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의 용주(지금의 예천군)을 점령하고, 이러한 고려-신라의 공세에 견훤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지만 왕건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후백제를 공격한다. 그해 3월, 왕건은 운주(홍성군)를 공격하고 3일 뒤에는 근품성(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다음 달에는 수군을 시켜 경상도 진주일대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개월 뒤인 7월에 김락의 대야성 공격이 성공하면서 후백제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즉, '''완벽한 후백제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다'''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남쪽의 나주 지역은 이미 해군 없이는 공략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게 증명된 곳이고, 북쪽의 충청도 지역은 워낙 걸출한 요새들이 많아서 고려&후백제 모두 공세가 어려웠으며, 합천-진주 방면은 그 유명한 대야성이 버티고 있었고, 김천-대구 라인 마저 진출하는 순간 문경&합천 주둔한 고려군 + 신라군의 합동 공세에 두들겨 쳐맞을게 확실했다. 아니, 포진 자체가 견훤으로 하여금 김천-대구 라인 진출을 강요했다. 다만 일단 적어도 추풍령 일대는 그나마 후백제가 노려볼만한 상황이었다. 신라를 고구려, 백제, 당에게서 지켜주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요새들은 이미 후백제군이 아이러니하게도 통일신라의 유산으로서 물려받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추풍령을 벗어나는 길목들에 방어선을 안배해놓은 상황이었기에 일단 넘어가더라도 고려&신라의 협공에 샌드백 신세가 되는 건 너무나도 뻔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눈치가 빠른 후백제 성주들은 고려에 귀부하기 시작한다. 8월에 왕건이 포위망의 핵심이었던 문경의 배산성을 수리하고 강주(진주)지역을 순시하자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이 귀부하고 후백제의 성주 여럿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이때 왕건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후삼국 통일이 앞당겨 졌겠지만...'''
견훤은 침착하게 우선 고려가 점령한 근품성을 탈환하고 신라의 고을부(영천군)을 점령함으로써 신라로 하여금 고려에게 SOS를 치게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천이 경주의 코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왕건은 급히 공훤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한다. 근데 여기서 주의할점은 포위망을 형성하느라 경주 인근은 텅 비어있었다는 점이다. '''즉, 견훤은 문경과 합천 사이의 약간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신라로 치고 들어갔다'''는 것. 한편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러 달려가지 않고 아주 천천히, 우선 공훤에게 연락을 보내 본인과 합류할 때까지 섣불리 경주로 진격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대야성에 있던 김락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신라군을 인솔하여 대구로 오라고 명령한다.[6] 그뒤 왕건 본인은 정예기병 5천(아마도 왕건의 직속 병력의 전부)을 이끌고 남하한다. 이러한 왕건 행동의 의도는 다름아닌 신라 호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잔악한 견훤으로 인해 신라가 고통받는데 이걸 고려가 나타나 구해준다면?'''이라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왕건은 견훤의 엄청난 도박을 오히려 정치적 이벤트로 역이용한 셈이다. 게다가 견훤의 병력은 고작 5천이었고 고려군은 거의 2~3배에 달했으니 견훤에게 힘든 싸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왕건의 정치적 술수가 패착이 된다. 당시 후백제군은 유래없는 역대급 기동전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경주가 코앞이긴 했지만 신라군이 병풍이 아니었기에 공훤으로 하여금 바로 견훤을 치게 했다면 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일부러 아주 천천히 간 덕분에 후백제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얻었다. 게다가 견훤의 군대는 후백제의 정예였던 반면에 공훤의 군대는 지방에서 차출해서 사실상 손발이 안맞는 오합지졸이었고, 신라군의 경우 경주에서 신라군들 대부분의 가족이 후백제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힘들어졌다. 또 결정적으로, '''견훤 본인부터가 신라 장교 출신이었던데다, 후백제군 자체도 그 뿌리부터가 신라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전략과 움직임에 대해 훤했다. 물론 이 당시에 신라 왕실에게 충성하는 마지막 남은 신라군이 있긴 했지만 알맹이는 견훤이 거병해서 후백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후백제군으로 거진 빠져나간지 이미 20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견훤이 당시 61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지휘관이었다. 전투과정.
왕건이 연출한 구도에선 잔악한 백제군을 정의의 고려군이 신라군의 협조를 받아 응징한다는 그림이었겠지만, 대야성을 상실한 이후의 신라군은 상상 이상으로 무력했고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경주에서의 약탈과 잔학행위를 벌이고도 넉넉히 공산에 포진하는 초월적인 기동력을 선보였다. 왕건 자신도 죽을 위기에 몰렸고 신숭겸 덕택에 간신히 탈출하게 된다.[7]
[image]
신숭겸 충렬도

4. 왕건의 도주와 여러 지명


이 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글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주했는데, 이 사건은 팔공산 일대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오늘날 팔공산에는 왕건의 도주로를 따라 팔공산 왕건길이라는 트래킹 코스를 조성해 놓았다.
대구 파군재(破軍峙) 삼거리는 왕건의 군대가 크게 패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또 근처 절에는 왕건이 홀로 파군재에서 군대가 격파당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독암, 왕건이 후백제군을 피해서 3일 동안 숨었는데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고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겨우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는 자연 동굴 왕건굴, 왕건이 잠깐 들렀다가 주먹밥을 얻어먹고 도망쳤다는 실왕리[8], 신숭겸 장군의 기묘한 계책으로 왕건이 살아났다는 뜻을 지닌 마을 이름인 지묘동 같은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이렇듯 이 지역엔 왕건 때 붙여진 지명이 무척 많다.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 항목으로.)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실제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은 한달 가까이 생사불명 상태였다. 후백제군의 수색과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서 단신, 혹은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팔공산 일대를 숨거나 후백제군을 피해다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고려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결과와 영향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 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9]

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고려사》'''

[image]

족하(왕건)께서는 내가 알린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 공산 전투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중 일부.-

반드시 지수(汦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가 배신한 진여(陳餘)의 군대를 격파하고 목을 벤 것과 같이, 천반(千般)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 위에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초왕(楚王) 항우(項羽)의 군대와 한 번의 전투를 통해 대업을 이룩한 것처럼, 반드시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데, 천명(天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 위 서신에 대한 왕건의 답서중 일부-

이 전투를 계기로 해서 후삼국의 주도권은 확실히 후백제에게 돌아간다. 또, '''왕건의 경상도에 대한 영향력 역시 깔끔히 없어진다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중 6주에 이르러서 최대 판도에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전주(전북), 무주(광주 전남), 강주(경남 서부), 웅주(충남과 충북 일부), 상주(경북 북부),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이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만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고 고려는 변두리의 한주(경기도와 황해도), 삭주(영서 지방), 명주(영동 지방) 3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땅만 넓지 산지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10] 견훤은 오랫동안 눈의 가시였던 나주 점령에도 성공한다.
이렇게 더없이 치솟아 오르던 견훤의 패기는 고창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라고 패기 있게 국서를 보냈던 게 이 후백제 우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왕건 개인적으로는 물론 고려의 전체 역사에 걸쳐서도 통주 전투, 갈라수 전투만큼 최대의 패배였다고 평할 수 있는 전투다. 특히 전투에 참여한 말단 병사들뿐 아니라 주요 장수들 태반이 전사한 것도 모자라, 국왕마저 겨우 목숨만 부지해 나온 전투가 고려뿐만 아니라 한반도 역사 전체를 봐도 손에 꼽힌다.
그러나 왕건에게 손해만 있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공산 전투 자체는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였으나, 왕건의 지원군 때문에 신라에 확실한 친백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견훤이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사건으로 신라의 귀족들과 호족들은 견훤에게 큰 반감을 보였으며, 역으로 신라의 민심이 신라를 도와주려다 일격을 당한 왕건 쪽으로 기울었다.[11] 경순왕도 즉위 후 얼마 안되어 고려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고창 전투에서도 신라 호족들이 왕건의 편을 든 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 전투로 이어지는 전역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전역이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으며 그 결과 후백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신라 왕실 및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것은 반대로 후백제 입장에서는 자국의 삼국 통일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신라가 견훤의 태세에 실망했다고 해도 고려 국왕인 왕건이 죽었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기 때문. 어쨌든 왕건이 전사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구사일생으로 끝내 살아 돌아왔으니...

6. 대체역사


만일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전사했었다면 곧 후백제의 삼한 통일로 이어졌을 사건이었을 것이다.
궁예를 따르던 자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 상황에서 그나마 힘 세고 노회한 호족 세력이 '고려'라는 정치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던 건 왕건의 개인적인 정치력과 카리스마에 기인한 바가 컸는데, 그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고려는 호족들의 급격한 이탈로 인해 순식간에 공중 분해되었을 공산이 크다. 훗날 후삼국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다가 광종의 피의 숙청으로 겨우 기틀이 잡힌 국가가 고려였는데, 하물며 호족 세력이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한참 간을 보던 혼란한 시기에 왕건이 죽었다면... 왕건이 기어코 살아남았기 때문에 발해 유민과 신라 호족의 힘으로 판도가 역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다른 대체역사로 고려군이 빠르게 후백제군을 쫓아갔다면 후백제군도 바보는 아니기에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산이 아닌 경주에 있는 다른 산을 전투무대로 삼았을 것이다. 이 경우, 왕건의 직속 부대는 피해를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강공훤의 군대가 후백제군을 무찌를 가능성은 낮고, 되려 당할 가능성이 높다.

7. 대중 매체


후삼국시대의 나름 중요한 전투이자 왕건 일생 최악의 패배였음에도 매체에선 등장이 상당히 적었다. 특히 후삼국시대가 등장하는 대중서에서도 공산 전투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 "견훤이 서라벌을 유린하고 경애왕을 죽일 때 왕건은 뭘한 거지?"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많았을 정도.

견훤 : 허허... 이런 이런... 그래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태자들이 대체 어떻게 했길래, 대야성을 잃어...?[12]

최승우 : 폐하, 폐하께오서는 두 개의 성을 내어주시고, 고려를 얻고 신라를 얻으시는 것이옵니다. 이보다 큰 거래가 어디에 있사옵니까?

견훤 :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너무 아깝지가 않은가? 대야성이 어떤 성인가?

최승우 : 대야성이 아니라, 고려와 신라라 했사옵니다, 폐하.

사극 태조 왕건 155화 가운데.[13]

KBS의 대하 사극인 태조 왕건의 159부 ~ 162부 사이에 잘 묘사되어 있다[14].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고려 장수들이 여기서 전사하였고, 왕건을 호위한 복지겸, 박수문, 박수경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려군은 왕건이 이끄는 기병 5천이 먼저 공산지역에 진입했다가 백제군한테 야습을 당해[15] 내군장군 신방을 비롯해 3천이 전사하고 1천이 부상당하는 대패를 당하며 포위된다.[16]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지원군 5천이 급히 도착했으나 백제는 대야성에서 진군한 고려군의 진군로까지 전부 계산해서 매복지를 선점해둔 뒤였고, 결국 함께 고립된다. 이후 포위망을 뚫기위한 고려군과 고려군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백제군의 혈전이 벌어지는데 요소요소를 점거한채, 전열을 충분히 정비한데다 대승으로 사기까지 높은 백제군을 당할 수 없이 참패를 당하고 장군 김언이 전사한다. 지치고 상한 2천여명의 패잔병만 남아 더 이상 방법이 없어진 제장들은 왕건만은 살려내기 위해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전이갑은 복지겸의 갑옷을 입고 백제군을 유인한다. 이들의 희생덕분에 왕건은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왔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낭떠라지에서 구르며 기진맥진한 채 복지겸과 박씨 형제에게 구조된다.
162회에서는 최응의 지시로 대야성에서 급파된 배현경과 홍유가 이끄는 지원군에게 왕건이 구조되고,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공산으로 돌아가서 시신을 수습해 송악으로 쓸쓸히 돌아가는 모습[17]과, 왕건의 목을 취한 줄 알고 기뻐하다 신숭겸의 수급임을 확인한 견훤과 백제 장수들 모두가 갑분싸가 되는 모습이 나온다.
천년의 신화에서도 고려 3번째 미션으로 등장. 여기에서는 왕건과 신숭겸이 참전한다. 동쪽의 후백제 성을 함락시키면 갑자기 후백제의 유닛들이 몰려와 왕건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서쪽으로 왕건과 신숭겸을 도주시키면 신숭겸이 혼자서 대신 싸우는 틈을 타 왕건은 재빨리 퇴각하는 것으로 나온다.
[1] 나머지 장수들은 기록 소실.[2] 강공훤의 군사 1만명 + 왕건의 기병 5,000명 + 김락의 군사 + 황보능장을 비롯한 여타 호족들의 군사를 합한 수치.[3] 팔공산 전투 당시 견훤이 이끈 군사의 수에 대한 기록은 없다. 5,000명 혹은 1만명으로 추정.[4] 김락군, 호족지원군, 강공훤군은 불명.[5] 환선길의 난, 이흔암의 난,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의 반기, 웅주(옛 웅진#s-1) 일대 호족들의 대거 이탈 등 고려는 수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이탈하고, 영토는 거의 반토막이 난다.[6]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이 급하게 밤낮으로 달린 걸로 나오나 이는 긴박함을 연출하기 위한 고증 희생이다.[7] 이걸 '신생 고려군'의 역량부족으로 모는 견해도 있지만 고려군도 어차피 마진군의 주력이 그대로 고려군으로 넘어온 것일 뿐더러 이미 후고구려-태봉-마진이 건국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신생 운운은 별 근거가 없다. 결정적으로 이미 20여년 전 사화진 전투에서 견훤은 왕건과 정면으로 맞붙어 박살난 적이 있다.[8] 도망치는 왕건에게 주먹밥을 준 나무꾼은 그의 신분을 모르고 그냥 패잔병인 줄 알고 선심을 쓴 것인데 나중에야 그가 고려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왕(王)을 놓쳤다(失)고 해서 실왕리가 된 것이다. 이 야사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깨알같이 써먹는다.[9]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10] 이는 오늘날에도 그런데 사람이 적고 경제력이 딸리는 도외지의 행정구역은 크고 아름답다.. 반면에 인구가 많고 세수가 커지면 행정구역은 촘촘이 작아진다. 동서고금 다 그런경향이 있고 사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다.[11] 공산의 대패 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 왔다. 당시 김순식은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후삼국 최후의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 왕건 진영에 가담하면서 단독 세력으로 1만 이상의 병력을 냈던 세력이다. 당시의 농업 생산력을 감안하면 일본에도 막부 시대 최대 번이자 최대 외양번이었던 마에다 가문 이상의 비중이었을 것이다.)이었고 궁예가 독립적인 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때문에 궁예를 몰아낸 왕건과의 관계가 불편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왕건을 찾아 온 것. 사실상의 김순식의 왕건 지지 선언이었던 셈이다. 친신라, 반신라를 불문하고 호족들이 견훤이 금성에서 벌인 행위에 대해 얼마나 큰 반감을 지니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 셈.[12] 실제로는 이 전투에서 추허조가 김락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생포당하지만, 담당배우 강재일이 서인석과의 불화로 중도하차하면서 916년의 대야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13] 이 장면은 최승우가 후백제의 삼한 통일 계책을 설파하면서 사자후를 뿜어내는 장면으로 파진찬의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명장면.[14] 162부는 뒷수습[15] 고려군 역시 공산지역에 매복군이 있을 것을 염려해 수시로 정찰대를 보내 주변을 살폈지만, 견훤은 이를 노리고 고려군의 진입로에 빈 진영을 세워 후백제군이 여전히 서라벌에 있을거라 착각, 방심하게 만들었다.[16]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이 일부러 천천히 가서 후백제가 덫을 파놓을 시간을 줘서 당했다면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군이 전략을 잘 짜놓고 성공시킨 것도 있지만,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겠다고 무려 사흘간 제대로 쉬지도 않고 강행군을 한 탓에 병사들의 상태가 최악인 점도 있었다.[17] 해당 회에서 내레이션으로 친절하게 '''왕건 최대의 패배'''라고 한번 더 짚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