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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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鎬倫
1925년 4월 2일 ~ 1990년 3월 12일
대한민국군인. 본관은 진주(晋州)[1].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장재마을[2][3]에서 태어났다.# 광주 사범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가 당시 일제의 강제동원령에 따라서 비행훈련을 받고, 조종사가 되었다.[4][5][7][8][10]
이후 포로로 잡혀있다가[12] 정부수립 이전에야 조국에 돌아와서 항공관련 사람들과 협력하여 한국 공군 창설에 노력하였고,[13][14] 1948년 육군 항공부대에서 교육을 받은 후, 48년 9월 미군으로부터 10대의 L-4항공기를 인수한 조종사였으며, 동 비행기를 이용해 9월 15일 서울상공을 시위비행한 최초의 공군조종사 10명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15] 이듬해 10월 1일 공군 독립과 함께 10월 25일 공군 소위(군번 50045)[16]로 임관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제주 4·3사건' 진압작전 및 지리산 공비토벌작전[19]에 참가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50년 5월 초 도입이 완료된 T-6 항공기 10대[20]의 조종사 중 하나로 5월 14일 오후 2시 여의도기지에서 편대 비행을 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인 50년 6월에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항공작전에 참가하여 T-6기에 국산 15㎏짜리 폭탄을 싣고 출격하여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남진하는 적 전차와 차량 행렬에 공격을 가해 적 전차 및 트럭 수대와 병력 25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며,[21][22]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미 공군의 P-51 머스탱(F-51)를 인수한[23] 조종사 10명 중에 1명으로 7월 3일부터 본격적인 출격작전을 감행하여[24][25] 8월 낙동강전선 방어작전, 10월 북한 미림기지 공격을 위한 출격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50년 겨울에 중공군의 2차 공세로 후퇴하게 되자 제주기지로 이동하여 비행훈련을 지도하였고, 다음해 5월 1일에 백구기지[26]에 투입되어 7월 23일 지리산 전투전경찰부대로부터 항공지원 요청을 받아 8월~9월 단독 전투훈련을 겸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28][29][30]에 참여하였다.
1951년 10월부터 실시된 한국공군의 강릉기지 단독출격작전에서는 제10전투비행전대(현 제10전투비행단의 모체)소속 비행대대장[31]으로 출격작전을 지휘하였고,[32] 52년 1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35]에서는 강릉전진부대장인 김신 대령을 도와서 작전처장으로 출격 편대와 폭격작전을 계획하였으며, 52년 6월 16일부터 53년 1월 16일까지[36] 제10전투비행전대장을 역임하며 UN공군이 주도하는 평양대공습 작전[37][38][39]에 참가하는 등 총 78회의 전투출격 임무수행과 전대장 및 참모로써 후배들의 출격작전을 계획하고 지휘[40]하였다.
강호륜 장군은 공군의 독립과 함께 공군의 원로 멤버로 활약하며 6.25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전쟁 후에는 주미대사관 공군무관#, 공군본부의 인사국장, 작전국장, 감찰감, 공군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연합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공군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한국에서는 51년 9월 28일 을지무공훈장에, 52년 5월 5일 충무무공훈장에, 53년 9월 1일 을지무공훈장[41], 54년 7월5일 을지무공훈장#[43], 56년 4월 14일 화랑무공훈장[44]과 보통상이기장[45]에, 또한 미국에서는 비행훈장[46][47], 공로훈장[48][51]을 수여받았으며,[52][55] 61년 7월 4일 공군준장으로 군문을 나섰다.
이후에는 공직으로 나아가서 교통부 항공국장[56][57]과 관광국장 및 航空審議會委員[58], 기획관리실장##,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까지 되면서 민간항공관련 업무[59]를 담당하였다. 이에 63년 12월 17일 대통령 표창##과 72년 홍조근정훈장#[60]을 수여받았다.
한편 손자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공군 조종사가 되었으며, 6.25 7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6월 25일 국군 유해 147구가 하와이 DPAA에서 감식을 마치고 귀환할때 손자인 강병준 대위가 엄호 비행에 나서 화제가 됐다.국군 유해 147구 하와이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사연은...참전조종사 손자의 특별한 엄호비행

[1] 박사공파(博士公派) 27세손[2]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3] 장재(長在)마을<津月面望德里>은 본래 광양현 동면 진하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하였으며 1789년경 호구 총수에는 진하면 장치촌이라 하였고 1872년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진하면 장치리라 하였음. 장재마을은 천황산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430년 전에 강 씨가 처음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함. 마을 이름 유래는 진상 면과 진월면의 경계지점인 배암재에서부터 시작된 산등성이가 진목항 구룡을 거쳐 장재마을 뒤까지 산날이 길고 곧게 이어져 장치라 하였다가 장재라 개칭 한 것으로 사료됨-광양시지 발췌-[4] 아마도 1943년 항공전력의 긴급확충을 담은 각의 결정 후 급조된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에 따라서 조종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43년 7월 3일의 ‘육군항공관계예비역장교 보충복무임시특령’(칙령 566호)에 의해 시행된 이 제도의 대상이 대학교, 고등학교고등과, 전문학교, 고등사범학교 등의 졸업(예정)자들로 합격하면 바로 조장(상사)으로 교육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여 항공부대로 배속되었다.[5] 김덕수저자의 <항공징비록>에 따르면 육군소년비행병 학교 출신으로 나오는데, 이는 일본 육군항공대 조종사들 중에서 정규 육사에 육군항공과에서 교육 받거나, 민간 위탁이 아닌 조종사들의 교육을 대체로 소년비행병 학교에서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6] 강점기인 평양에는 제6비행전대가 있었고, 항공 수리창 등의 시설도 존재하였다. 또한 대구와 군산에는 육군 비행학교 분교가 있었으며, 전쟁 중에는 함흥에도 비행학교가 생겼다. 이곳들에는 한국인들이 비행기 정비, 특수차량 운전사, 통신, 무장 등의 분야에서 군속으로 일하고 있었다.(20년 가까이 경력을 쌓은 숙련공들도 상당수 존재하였다고 함)[7] 제1,3대 공군참모총장이였던 김정렬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에서는 공군 창설시 인원의 분류를 9가지로 나눴는데, 첫번째는 일본 육사출신(박범집, 김정렬, 김창규, 신상철, 박원석(군인), 한용현, 홍승화, 장지량, 이연수 이상 9명), 두번째로는 소년비행학교 출신(조종사 40명 가량{이근석, 박희동}, 정비사 40명 가량{서한호, 서무갑}, 통신사가 약 30명), 세번째로 일반 대학을 나와 항공분야 장교로 종사한 출신(장성환, 신유협 등), 넷째로 지원병 출신(오점석, 박두선 등 극소수), 다섯째로 중국군출신(최용덕, 이영무, 김진일, 김영재, 김신 등 도합 15명), 여섯째로 일본 항공대에서 군속으로 종사한 출신[6], 일곱째로 일본 민간항공출신(장덕창, 일본 민간비행학교를 졸업한 15명), 여덟째로 한국인이 만든 항공회사나 항공관계기관 종사자(파일럿과 정비사 포함 30여명), 아홉번째로 글라이더 분야 종사들로 열댓 명{직업적으로 항공분야 종사들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기에 항공요원으로 이용 가능}이다. 강호륜 장군은 세번째인 경우로 보인다.(장성환 장군 같은 경우에는 조종 후보생이였고, 신유협이라는 분은 특별조종 견습사관 출신이다.)[8] 1939년 3월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때 광주사범학교에 합격하였고, 이곳에 따르면 소년비행병12기(대략 41년 입학)라고 한다. 또한 이곳#의 내용을 참조하면 앞서 나온 특조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되었지만, 지원률이 낮은 것에 40년#부터는 점차 강제적인 동원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9]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에 있던 일본 육군 항공대의 군학교였다. 1918년 12월 1일을 기하여 첫 개교되었으며 1945년 8월 22일을 기하여 폐지(폐교)되었다.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 내용에 따르면 41년도부터 카미카제(내용상으로는 적 함선에 공격)를 위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였다.[10]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내용 중에는 하마마쓰 육군비행학교(浜松陸軍飛行学校)[9]를 44년 졸업하였다라고 나오는데, 만약 41년에 비행관련 교육을 시작한 것이 옳다면 3년간 교육받은 것으로 단기교육으로 육성되던 카미카제를 위한 것이 아닌 정규 조종사출신이 된다. [11] <항공의 경종>에서 김정렬 장군은 전쟁 막바지에 ''제3항공군''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전출되면서 당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항공교통이 가능하였던 베트남으로 갔으나 미군의 교통 차단으로 인하여서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고 하였다. 이를 포로생활하였다고 오독한 것으로 생각된다.[12] 일반적으로 육군항공대 소속이기에 중일전에 참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들을 선발한 이유가 가미카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였기에 대체로 동남아 지역에 배치되었다. 강호륜 준장은 정확하게 어디로 파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던 김정렬 장군이나 김두만 장군같은 경우에 동남아로 파견되었다가 필리핀과 오키나와가 공격받으면서 본토 대결전을 위한 후퇴 중에 베트남에서 미군 포로가 된 일이 있기에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11][13] <항공징비록>에 따르면 46년 8월 10일, 이전에 중구난방으로 창설된 항공관련 단체들을 통합한 ''한국항공건설협회''이 창립되면서 최용덕을 회장으로, 이영무를 부회장으로 추대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고 되어 있다.[14] <항공의 경종>에 따르면 공군 창설 간부7인들이 모여서 500여 명에 항공인들(파일럿 90여 명, 3년 이상 숙련된 정비사가 300여 명, 기타 무장과 기상 관계자 포함)의 서열과 계급을 정리한 명부를 작성하였고, 이후에 48년 4월 1일 항공부대 창설 승인이 나면서 명부에 인원들 중 서열대로 105명이 1차로 공군에 들어갔다. 후에도 확충하여서 500여 명은 거의 빠짐없이 공군에 종사하게 하였다.[15] 비행부대장 김정렬 대위의 지휘 아래 편대비행했으며, 이때에 강호륜 준장은 육군 일등상사(현 상사)였다.[16] 참고로 공군 군번 중 가장 빠른 군번은 50001이고, 초대와 3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중장이다.[17] 이 토벌은 여순사건과 연계되어서 지리산방면으로 도주한 남로당 남부군들에 대한 것이다.[18] 이외에도 김창룡은 여순사건 시기에도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수부장이였던 박원석 대위가 공산주의자라면서 연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문에 <항공의 경종>에 따르면 김정렬 장군이 당시 참모차장 정일권 장군과 정보국장이였던 백선엽 장군에게 항의하였지만 이들조차 빨갱이로 몰릴까봐 몸을 사려서 일본육사 선배였던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구명을 하고서야 협의를 벗을 수 있었다.(이조차 참모부 고위직들의 보증서 서명까지 받아야 했다.)[19] 49년 11월 23일 정비장교 이명호 소위가 L-5항공기 조종사 박용오 이등상사(현 중사)를 선전 전단 살포하러 가자고 속여서 월북시킨 사건이 생겼는데, 이미 전년 11월 18일에 남로당 핵심당원이던 비행부대 소속 백흠룡 일등중사(현 하사)가 월북한 사례가 있어서 방첩부대의 김창룡 대위가 육군항공사령부 전체를 강제 연행해서 수사하려고 하였다. 이를 사전에 입수한 김정렬 비행부대장이 조종사들과 정비사들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17]에 1달간 파견 보냈다. 특히나 <항공징비록>에 나오는 말에따르면 백흠룡 월북 이후에 강호륜 준장은 방첩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라고 한다.(이는 백흠룡이나 박용오가 소년비행병 출신이며, 당시 공군 조종사 다수도 같은 소년비행병 출신이기에 생긴 것이다.)[18][20] 49년 공군 창설부터 북한의 공군력 확충에 대항하고자 미국에 항공 전력 확충(전투기 75대, 폭격기 12대, 훈련정찰기 30대, 수송기 5대)를 요청하였지만, 전부 배제 되면서 49년 9월 항공기 헌납 운동으로 모은 3억 5천만 원으로 캐나다에서 생산한 T-6 항공기 10대(+장착한 7.76mm 기관총 20문, 실탄 5,000발, 1,000드럼분의 항공유, 1년분의 항공기 부속)를 구매하였다. [21] T-6 항공기는 원래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는 기종이였으나, 당시에는 비행기만 먼저 도입되었고, 기관총은 아직 오지 못 하였다. 또한 폭탄을 달고 갈 장치가 있기는 하였으나, 훈련용이기에 당시 한국에서 제작한 폭탄을 거치할 수 없었다. 이에 정비원들이 노력하여 몇 대에는 폭탄거치대를 달 수 있었으나, 그외에 다른 비행기들은 폭탄과 수류탄을 가지고 가서 손으로 투하해야 했다. 그나마도 초반 3일 동안의 출격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폭탄을 거의 다 소모하였다. 이러한 직접적인 전과보다는 상공에서 적군의 남하를 정찰하면서 많은 정보를 취득하였으며, 전쟁 내내 이들의 투혼적 정찰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54년 6월25일 경향신문에 강준장이 보낸 회고기사#[22] 당시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가족들을 신경쓰지 못하고 조국 수호에 매진하였지만, 강호륜 준장의 內子는 남편이 이미 사망했다고 생각해 큰 딸과 막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서 서울에서 섬진강 하구의 시댁까지 걸어서 이동하였다. [23] 50년 6월 26일 오후 3시쯤 여의도기지에 집결해서 트럭을 타고 수원기지로 가서, 오후 7시에 C-47 수송기를타고 2시간 후에 이타즈케 미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27~30일까지는 규슈의 기상 악화와 비행기의 정비 지연으로 지상교육만 받았고, 7월 1일 미 교관조종사들과 함께 T-6 항공기를 타고 몇차례 이착륙 연습을 마친 후, 비행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파견된 팀원 중 한명인 김성룡 장군은 ''이날 하루 동안 비행한 횟수는 1회였으며, 비행시간도 30분 정도였다.''라고 회고했다. 다음날 저녁 무렵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이륙해서 오후 8시쯤 대구기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F-51D 전투기는 성능과 구조가 T-6 항공기보다 매우 복잡해서 제대로 된 기종전환을 위해서는 최소한 항공기 구조 교육 2주일, 이착륙 훈련에 1주일, 공대공/공대지 사격과 폭격을 비롯한 실전훈련에 1개월이 소요되어야 했다.[24] 그러나 7월 4일 10대의 조종사 중 최선임이자 비행부대장이였던 이근석 대령이 안양 상공에서 산화(이때 함께 출격하면서 직접 목격)하면서 전투기 출격은 잠시 미군 조종사(딘 E. 헤스 소령의 바우트-원 부대 소속)들이 맡게 되었고, 16일이 되어서야 기체에 태극마크와 꼬리날개에 K자를 써 붙인 F-51D전투기를 타고 합동 출격하게 되었다. 출격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훈련을 병행하여 8월 1일~14일에는 공중사격술, 회피기동,적지상군의 식별법과 신호방법 등 다야한 전술훈련을 받았다.[25] 생전에 7월 3일 출격을 '''실질적인 공격 효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태극 마크를 단 우리 공군의 F-51D전투기를 국군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출격에 나섰던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전쟁기념관 기록에서는 ''1950년 7월 3일부터 연일 시흥, 노량진, 안양 등지로 출격한 그는 남진하는 적 전차 4대와 트럭 5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라고 되어 있다.[26] 10월 1일 북진하게 되면서 유엔공군기들이 한국의 기지들로 유입하게 되자, 한국공군은 여의도기지에서 평양 미림기지로 이동하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공군지휘부는 이 기회에 독자출격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비행부대를 제주기지로 보내고, 김신 대령을비롯한 8명의 정비사, 무장사, 운전병 등 20여 명으로 백구부대를 창설하여 6146부대(바우트-원 부대)의 전투출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27] '''남부군'''의 수장으로 유명한 이현상이 50년 11월 10일 강원도 세포군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고, 15일 남하하여 51년 5월 청주를 잠시 점령하면서 8월 거점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28] 전쟁발발 이전의 토벌과는 다르게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부축선으로 빠르게 북상하는 UN군에게 밀려서 북쪽으로 가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도망친 병력들로 지리산 이외에도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부대들이 존재하였다. 특히나 지리산은 그 산세가 험하고 지역이 넓어서 많은 숫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였고, 여순사건 직후 그곳으로 도망간 빨치산들도 존재하였던 만큼 공산당들에게는 투쟁의 근거지였다. 실질적으로 군대에 의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은 50년 10월~53년 5월까지 진행[27]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지리산 전투경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이현상과 유격대 일부가 중공군 참전과 함께 남하하여 위세를 강화시켰으나, 낙동강 전선에서 UN군이 너무 빠르게 북상하면서 도망가지 못한 병력들이 지리산으로 숨어 있는 상태였다. 이현상은 이러한 후방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 받고 내려온 것이다.)[29] 51년 9월 6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웅석봉 부근에서 공비 토벌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30] 51년 9월 4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영환 대령과 함께 해주와 사리원 사이의 적 보급로 공습작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봐서는 공비토벌뿐 아니고, 북한군과의 전투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 51년 11월 제1전투비행단 10전대 12비행대대장으로 요기와 함께 원산지역에 출격, 적기와 공중전을 전개하던 중 피탄되었으나 능숙한 조종술로 애기와 함께 귀환하는데 성공하였다.[32] 51년 10월 11일 한국공군의 역사적인 단독출격작전은 8시 55분 강릉전진부대장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제1편대가, 9시 20분 김두만 대위가 이끄는 제2편대가, 오후 1시 5분 강호륜 소령이 끄는 제3편대가, 1시 35분에는 정영진 대위가 이끄는 제4편대가 북쪽으로 날아가서 임무를 담당하였다.[33] 당시 승호리 철교는 전방으로 물자보급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이기에 이미 강력한 대공화망을 구축한 곳이였다. 이에 미 공군의 조종사들은 위험한 대공화망에 공격을 피하고자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러한 폭격으로는 높은 고도에서 강에 그어진 선같이 보이는 철교를 파괴하는 것이 많이 어려웠다.[34] F-51D는 최저한계고도가 평시엔 610m(2,000ft), 폭탄 공격 시에는 폭탄 무게까지 감안해서 약 915m(3,000ft)로 설정하고 조종해야 하는데, 승호리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1,200m(4,000ft) 상공에서 급강하한 뒤 고도 450m(1,500ft) 상공에서 폭탄 투하와 로켓 공격을 퍼붓는다는 것이였다. 이는 이근석 준장이 사망한 이유라고도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조종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작전이였다.[35] 52년 1월 12일과 13일 및 15일에 3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으며, 미 공군의 계속된 실패와 2차례의 실패[33]를 교훈 삼아서 세계 항공전 사상 초유의 초저고도 급강하 폭격[34]으로 결국 성공하였다.[36] 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근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고, 이에 초대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였던 김영환 대령이 단장에 임명되었다.[37] 평양대공습 작전은 1952년 7월 11일 미 제5공군과 미 해군함재기 등 822대를 동원하여 프레셔 펌프 작전으로 명명된 제1차 평양 대공습과 뒤이어 8월 4일에 284대로 제2차 공습을, 그리고 8월 29일에 1,122대(한국 공군 36대 참가)로 제3차 평양 대공습을 말하는데, 이 작전은 폭격 전에 평양 시민에게 군사목표인 평양을 떠나라는 사전경고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살포한 후 실시되어 많은 심리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이 작전으로, 폭격목표로 선정된 지휘소/보급품 집적소/생산공장/병사/철도시설/고사포 진지 등 30개 목표 중 93%에 달하는 군사목표가 복구 불능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유엔 공군은 전투기 3대가 격추되고 27대가 손상을 입었다.[38] 승호리 철교 폭파 성공 이후 제10전투비행전대의 전투 능력을 인정 받아 UN공군의 단위부대로 합동출격 할 수 있게 되었고, 평양대공습 작전에서 제10전투비행전대는 대동강철교 서쪽에 위치한 금속공장과 곡산공장을 목표로 지정받았다. 이때 강호륜 당시 소령은 52년 8월 29일 제1편대군장으로 출격하여 제2편대군장 전봉희 소령과 제3편대군장 오춘목 소령과 교대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급강화 폭격을 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교대를 하였던 것은 당시 투입된 편대군은 강릉기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39]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40] 1951년 10월 11일부터 동부전선의 원산지구 및 서부전선 일대에 대한 보급로차단을 시작하였고, 서남지구 공비토벌 및 적 후방보급로차단작전을 계속 수행하면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 이듬해 10월 28일부터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였다.[41] 국방홍보원 영상자료실에 있는 '''<국방뉴스 제7호>'''#에 따르면 제10전투비행전대 1주년 기념식(영상은 9월 10일 뉴스라고 하면서 기념식은 8월1일 거행되었다고 하는데, 전대장이였던 강호륜 중령이 훈장을 수여받는 것을 보면 8월 29일에 실시된 3차 평양대폭격 이후인 것으로 생각된다.)에서 동평양 폭격 공로로 당시 참모부장이였던 최용덕님께서 대리로 훈장을 달아주는 것을 볼 수 있다.[42] 강준장의 53년 당시의 보직을 알 수는 없지만, 바로 윗기수라고 할 수 있는 김영환 장군이 제1전투비행전단부단장에서 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단장에 임명되고, 동년 12월 15일 1전비 전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다음해에 3월 4일 10전비 창설 기념행사 참석 비행 중 사망했고, 김신 장군은 52년 1전비 15교육전대장을 하다가 미공군참모대학 교육파견되었고, 53년 7월에 공군본부 작전국으로 복귀했다가 9월 10전비 전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강준장은 54년 1전비 부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김영환 장군이 함께 강릉기지로 가자는 이야기에 ''오랫동안 F-51을 탑승하지 못하였다''라고 피하자 김두만 장군과 함께 갔다가 사고를 당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있기에 53년에는 1전비나 공군본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43] 전쟁기념관에는 53년과 54년의 을지무공훈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데, 53년의 을지무공훈장은 이곳에서 기록되어 있고, 54년은 신문기사에 나와 있다. 기존에 국방뉴스 영상은 전쟁기념관의 훈장 수여받았다라는 것을 토대로 52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라고 생각되었으나, 대한민국 상훈-상훈업무관리에 나와 있는 소속을 보면 53년 을지무공훈장이 10전비에서 받은 것이기에 영상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42] 그렇다면 52년 충무무공훈장은 10전대 작전처장으로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여된 것으로 생각된다. [44] 다른 공군관련자들을 살펴보면 無星花郎武功勳章인 것으로 보인다.[45] 국가기록원 국방부일반명령 제81호[46] '''<국방뉴스 제9호>(52.11.6)'''에 10월 1일 사천공군기지에서 공군창립4주년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미5공군 사령관으로부터 표창받았다라는 내용이 있다.[47] 52년 10월 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5공군사령관이 십자항공훈장(''비행십자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을 수여하였다라고 나옴[48] 국가기록원 일반명령 제169호[49] 58년 11월 7일 조선일보에서는 ''리죤.오브.메리트''라고 나온다.[50] 신문기사의 ''리죠ㄴ.옵.세리트''라는 명칭은 ''Legion of Merit''의 오타로 생각되며[49], ''지휘''라는 명칭을 봐서는 2번째 등급인 ''Commander''등급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김정렬장군의 군대지휘 공로훈장최용덕, 장덕창, 김창규, 김영환장군의 지휘관공로훈장과 김신장군의 공로훈장을 봐서 추측된다.[51] 정확한 것은 아닌데, 58년 11월 6일 동아일보 기사#에 나오는 주미대사가 수여하는 '''미국 지휘공로훈장'''[50]이지 않을까 생각된다.[52] 이외에 김영환장군과 김신 장군의 경우를 보면 공비토벌기장, 한국전쟁 종군기장, 유엔종군기장, 대통령수장을 수여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53] 1952년 6월 5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김두만 당시 소령 외 16인의 백회출격자들과 같이 받았다라고 나오는 전투비행전대 부전대장 姜중령이 강호륜 준장으로 생각된다.[54] 내용상 '''Air Medal'''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55] 그러나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때 이미 미국 비행훈장 1개[53][54], 미공군기장 2개, 한국훈장 4개(을지무공 2회, 충무무공 1회는 확인되지만, 1개는 확인불가)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56] 1963년 9월 20일 경향신문 정부인사 기사1970년 4월 23일 매일경제 기사에 나오는 프로필에 따르면 63년부터 항공국장인데, 1963년 5월 21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관광공로국''이 ''관광항공국''으로 개칭된다고 나오며, 국토교통부 연혁에서는 1963년 8월 31일 부서 조정 및 명칭변경에서 ''관광공로국''은 ''관광국''으로 명칭변경되고, ''항공국''이 신설되었다고 나온다.(이는 관광공로국 산하에 항공과가 존재하였던 것때문에 나오는 차이일 뿐이다.)[57] 1965년 1월 30일 조선일보 기사#에 보면 항공국장에 임명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이는 1965년 1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생각해보면 처음에는''航空技監''이라는 기술직 2급을가지고서 국장직을 수행했다가 일반직 2급''理事官''으로 전환되면서 재임명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58] 67년 7월 21일 안경모 교통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12명의 위원(교통부/경제기획원/외무부/재무부차관, 국제관광공사총재, 공군참모총장이 포함)을 위촉1967년 7월 26일 매일경제[59] 대표적인 중요한 업무로써 1967년 2월 9일 발효된''The ROK-US Agreement on Status of Force in Korea, 韓美行政協定''에서 한국측 교통분과위원장1967년 2월 9일 동아일보 기사과 유엔군이 담당하던 한국전역의 空域관리권 이관협정 조인1965년 3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국제선 취항확장1967년 1월 18일 동아일보 韓英航空협정(홍콩 경유 국제선) 기사1967년 2월 10일 동아일보 韓日航空협정(일본 경유 국제선) 기사1970년 2월 10일 경향신문 韓美航空협정 수정협상(미국 노선 확장),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대회참석1964년 12월 25일 경향신문 기사1965년 6월 17일 경향신문 기사등을 뽑을 수 있다.[60] 홍조근조훈장이 국가기록원에는 8월1일 수여에정이라고 되어 있으나, 대한민국 상훈-상훈업무관리에는 ''강호윤''으로 8월 12일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