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렬(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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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9대 국무총리이자 제7대 국방부 장관.
광복 이후 국방부 장관 및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공군 1호 군번인 50001번을 받았으며, 동생인 김영환과 함께 공군 창설 7인에 들어간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기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로 일본군 공병 중좌를 지냈고, 김준원은 일본육사 26기로 일본군 보병 대위를 지냈기 때문. 이들은 8~90년대에 임종국이 주도하던 한국의 친일파 관련 서적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그나마 동생 김영환은 법과대학 재학 중 징집되었기 때문에 수록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대통령을(이승만, 최규하) 하야'''시킨 특이한 이력이 있다.
2. 일생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1917년 9월 29일 일제 강점기 경성부 사직정에서 태어났다. 193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7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교, 1938년 11월에 졸업했다. 부대 실습을 거친 후 1939년 3월 일본 육사 본과에 진학해 1940년 9월 제54기로 졸업했다. 1941년 5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의 전투기과를 졸업하고 육군 항공 소위로 임관했다. 1942년 3월 첫 부임지를 일본 항공전대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큐수 제4전대에 배치받았다. 1941년 9월 제4전대에서 훈련 중 중위로 진급했다.
1941년 11월부터 제4전대원으로 시모노세키 오즈키 비행장에 주둔하다가 홋카이도 아사히카와로 이동했다. 1941년 11월 말 오키나와의 나하비 비해장을 거쳐 11월 28일 대만으로 이동했다. 1주일 후 대만 옆의 펑후 열도를 떠나 남방으로 향하는 선단을 공중 엄호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5시 필리핀 공격작전에 참가해 미국 공군력을 거의 궤멸시켰다. 말레이시아 작전에 참가한 최명하와 노태순을 포함해 태평양 전쟁 개전 당일 참전한 세 명의 조선인 장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2년 2월 일본 본토의 오즈키 기지로 돌아와 4전대의 본래 임무인 일본 본토 방위를 담당하였다. 같은 해 5월 경 미군 폭격기들이 기습적으로 도쿄를 공습하자 규슈 야하다 제철소를 엄호하기 위해 비상 대기하였다.
그 후 제4전대 2중대 중대장 대리로 2중대를 골간으로 규슈 아시아에서 248전대를 신설할 때 부대 창설 책임자가 되어 1942년 9월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248전대는 97식 전투기를 하야부사(송골매)라는 기종으로 개량한 최신 전투기로 구성되었다. 부대 편성 직후 아키노(明野) 비행학교 갑종 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갑종 학생교육은 중대장, 전대장을 만들기 위한 특별 교육과정으로 고급 항공 전술과 전투기, 전폭기 연합작전과 해군과의 협력 등 고급 비행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일본 육사 54기생은 단 네 명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1943년 3월 갑종 학생 과정을 이수했다.
1943년 7월 동기생 중 최초로 전투기 중대장에 발탁되어 248전대 제1중대를 이끌고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117교육비행대대에 편성되어 제3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남방으로 배속된 제3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248전대 2개 중대는 뉴기니로 이동 중 미군의 공격으로 넉 달 만에 부대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 1944년 4월 육군 항공 대위로 진급해 자바의 솔로로 전출해 그곳에서 전대장 대리로 제35교육비행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독일의 메서슈미트 전투기를 모델로 해 만든 신형 전투기 Ki-61[4] 로 구성되어 '비연전대'라고 불리었다.
본인의 회고로는 1944년에 육군대학교에 응시했다고 하는데, 합격 여부를 확인받지 못한 상태로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1945년 2월 비연전대를 끌고 전 남방지역 유류 공급기지인 수마트라 팔렘방으로 이동해 수마트라 서해안 지역을 담당했다. 연합국 비행기가 팔렘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양 코코스 제도에 기지를 둔 영국 비행기와 거의 매일 공중전을 치렀다.
1945년 8월 10일 아키노 비행학교 갑종 학생의 교관으로 발령받아 출발하는 당일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발표를 청취했다. 곧바로 전출 이임식을 갖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팔렘방을 떠나 프놈펜으로 갔다. 그러나 종전 직후 연합군이 모든 일본군의 항공로를 완전히 폐쇄시켜 다시 사이공에 가서 지내다 그곳에 모인 한국인 1,110명을 인솔해 일본 구축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환해 1946년 5월 15일 서울에 도착했다.
광복한 조국에서 그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들인 김영환, 박범집, 이근석, 장덕창, 최용덕, 이영무와 함께 육군 내의 항공 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1948년 5월 14일 그는 육군항공사관 후보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교육 수료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들은 군사영어학교에서 일진처럼 몰려다녔고 그중에서 김정렬의 동생도 있었는데 입이 험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계원은 그 패거리한테 맞을까 봐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김계원은 학병 출신이라 강제로 끌려갔다가 견습사관만 하다가 나온 터라 군맥(軍脈)이라 할 만한 게 미약했기 때문.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9월 13일 그는 조선경비대 항공기지 사령부 비행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공중 지원을 실시했다. 1949년 2월에는 중령으로 진급, 육군항공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제주 4.3 사건 진압 및 옹진지구전투 지원'이라는 임무를 맡아 출격했다. 이후 국군조직법에 의해 대한민국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1949년 10월 1일에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5] 이듬해 5월에 공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 그는 공군 육성에 전심전력을 경주하여 오늘날의 공군을 만드는데 기초를 쌓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공군참모총장으로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전투기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6] 열악하게도 당시의 공군의 비행전력은 연습기와 연락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건의를 한 이후 1950년 7월 2일 미 극동 공군으로부터 F-51[7] 전폭기 10대를 지원받았다. 그는 자신의 전투기에 탑승, 진두에서 지휘하며 지상군 엄호 작전을 감행하는 등 작전 완수에 만전을 기여하는 등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휘를 따라 공군은 육군의 근접지원 및 후방 차단 작전을 감행, 국군의 지상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특히 그는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요청을 받고 F-51 전폭기들을 이용,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시켜 지상작전을 도왔다. 휴전 후인 1954년 12월 다시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7월 6일 공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같은 달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박정희가 소장진급심사 대상자가 되자 거의 소장 진급이 확정된 상황에서 곽영주의 훼방으로 인하여 소장 진급이 취소되자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가서 심사위원들을 잘 달래고 박정희를 변호해줘서 박정희가 무사히 소장에 진급하게 도와줬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던 박정희는 훗날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의장, 제7대 전국구 국회의원 등에 임명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이후, 제4공화국 헌법으로 되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려던 전두환의 부탁으로, 친구였던 최규하를 설득, 8월 16일에 하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재밌는 건 4.19 혁명 당시에도 이승만에게 하야를 건의했다는 점.[8][9]
3. 관련 도서
- 《항공의 경종》(회고록)
4. 김정렬을 연기한 배우
5. 관련 문서
[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카가와 사다오. (香川貞雄 )[2] 상촌공파 20세손 '렬(烈)'자 항렬[3] 노신영의 총리직 사임으로 인해 취임 이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87년 7월 14일 ~ 1987년 8월 6일)[4] 별칭은 히엔(飛燕)이었다.[5] 최용덕 장군이 초대 국방차관으로 영전하여 있었던 까닭도 있다.[6] 이때 건의한 것이 회고록 이름인 항공의 경종이다. 지금은 절판되었기 때문에 중고나라 및 헌책방에서 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15000원이지만 헌 책방에서 기본적으로 3만원~4만원 정도 된다. 아무튼 책을 사서 보면 아쉬울 수도있는데 서암이 쓰다가 중간 지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미완성 회고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공군 창설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나와있기 때문에 만족할만하다. 참고로 제목에 있는 항공의 경종은 부록에 수록되었다.[7] 1940년대 말에 미군의 항공기 명명 체계가 바뀌면서 전투기도 Pursuit에서 Fighter가 되었다.[8]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된다. '세상 참 묘하구만.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설득한 지가 엊그제인데 오늘 똑같은 부탁을 받으니 말이야.'[9]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4.19 혁명 당시 홍진기와 함께 이기붕을 찾아가 “이렇게 국민들의 민심을 잃은 상태에서 계엄령으로 무력 진압하게 되면 유혈사태가 뻔해지는데 이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조선 동포들을 구하겠다며 내려온다면 어떻게 막냐?”면서 부통령 당선 사퇴를 건의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