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

 




'''김신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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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공군참모총장
김신
金信 | Kim Shin
'''
<colbgcolor=#128ad1> '''출생'''
1922년 9월 21일
중화민국 북양정부 장쑤성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사망'''
2016년 5월 19일 (93세)
서울특별시
'''본관'''
안동 김씨[1]
'''호'''
서언(瑞言)
'''재임기간'''
제6대 공군참모총장
1960년 8월 1일 ~ 1962년 8월 1일
제21대 교통부 장관
1971년 11월 24일 ~ 1974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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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 '''부모'''
아버지 김구, 어머니 최준례
'''형제자매'''
누나 안동 김씨, 김화경, 김은경[20]
형 김인
'''배우자'''
임윤연
'''자녀'''
아들 김진[21], 김양[22], 김휘, 김윤
딸 김미[23]
'''학력'''
서남연합대학교 (철학과 / 수학)
국방대학원 (행정학 / 학사)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9'''
'''약력'''
제6대 주 중화민국 대사
제21대 교통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 (전국구/유신정우회)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특2기)
공군사관학교 (특2기)
'''복무'''
대한민국 공군
1948년 ~ 1962년
'''최종계급'''
중장 (대한민국 공군)
'''최종 보직'''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공군참모총장 직무대리
제6대 공군참모총장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일생
2.1. 젊은 시절
2.2. 군인으로서의 삶
2.2.1. 중국 공군 장교 그리고 도미유학
2.2.2. 귀국 그리고 대한민국 공군 장교
2.2.3. 6.25 전쟁
2.2.5. 전후
2.3. 5.16 군사정변 및 정계 진출
2.4. 말년
2.5. 사망
3. 대중매체에서
4. 저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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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2. 일생



2.1. 젊은 시절


백범 김구와 최준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2녀 중 차남. 형제들 중에서 누나들은 김신이 태어나기 전에 급사했고, 형인 김인은 1945년 요절했다.[2]
[image]
젊은시절 가족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장남 김인 - 김구 - 김신.[3]
[image]
맨 우측 인물이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백범 김구를 수행하던 김신의 모습이다. 38선 경계에서 찍은 사진이다. 백범 좌측의 인물은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이다.
김구가 매우 아꼈던 아들로, 일찍 죽은 형 김인을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일을 수행했다. 해방 후에 위 사진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 북한을 방문했다.[4]

2.2. 군인으로서의 삶



2.2.1. 중국 공군 장교 그리고 도미유학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 라는 백범 선생의 혜안으로 그는 중국 공군 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도미유학하여 미국 비행학교 정규과정을 이수하였다. [5]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에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인물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 으로 기재되어 있다. [6]

2.2.2. 귀국 그리고 대한민국 공군 장교


아버지인 김구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짓고[7]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된다. 군번 50010 [8]
비록 조모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해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여 군사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를 했었다 한다.
당시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 항공사령관 이영무 대령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공군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한민국 공군 홈페이지 역대 참모총장 페이지에 등록된 초상

2.2.3. 6.25 전쟁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남침에 의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머스탱 인수 10인의 요원[9]으로 선발된다. 사실 그는 이미 중국군-미군 유학과정에서 '''머스탱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머스탱을 인수하러 갔을 때 머스탱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그가 자료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 한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제1공화국(드라마)에선 유인촌 전 장관이 그의 배역을 맡은 바 있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10]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인 문제를 본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이다.[11]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 참가했었다.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의 공군시절 이야기가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는 본인도 원하던 역할이었다. 정치관도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 볼 때''' 확고하며 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확실한 기술관료로서의 자질 역시 충분했기 때문에 김구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이 주도한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특히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시절에는 유엔공군이 5백 회 넘게 출격하고도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전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2.2.4.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승호리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의 대동강지류에 설치된 것으로 전쟁기간 중 북한공산군이 중동부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데 요충지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유엔공군의 항공목표가 되었으며 이를 폭파하려고 500회 이상 출격했으나 위장은폐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 작전수행임무가 한국공군에 넘겨졌으며 당시 한국공군으로서는 이 철교를 파괴할만한 전투역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손으로 폭파시키겠다는 신념에서 작전수행에 나서게 되었다.
1952년 1월 12일 김두만(金斗萬)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F-51전폭기 5대가 첫 출격을 하고 같은날 오후 윤응렬(尹應烈)대위가 이끄는 3대가 출격하였다. 그러나 두번의 출격에서 모두 폭탄을 투하했으나 실패하였다.
작전책임자인 제1전투비행단의 김신(金信)대령은 이 실패가 미공군 전술교리에 따른 고공투하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초저공침투공격법을 쓰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1월 15일 2개 편대 6대의 전폭기가 출격하여 철교중앙의 경간(徑間) 2개를 폭파시킴으로써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 출격에는 제1편대장 옥만호(玉滿鎬)대위, 2번기 유치곤(劉致坤)대위, 3번기 박재호(朴在浩)대위 그리고 제2편대장 윤응렬대위, 2번기 정주량(鄭周良)대위, 3번기 장성태(張星太)대위가 참가하였으며 이로써 한국공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철교의 폭파로 북한공산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어 물자수송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2.2.5. 전후


이후 공군본부 작전국장,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 등을 역임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참모차장이 되었다. 이후 38세에 공군 중장으로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12]
회고록에서 당시 공군은 전투기를 몰아보지 않은 인사들이 공군본부의 주류로 있었는데 그가 취임하면서 모두 일소시켰다고 서술했다. 전투기를 몰아본 사람만이 공군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데 전투기를 몰아보지 않은 사람이 요직을 차지했으며 일본군 출신이 많았다고. 마치 일본군 출신들은 전투기도 조종하지 않았으면서 요직을 차지했다는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다.

2.3. 5.16 군사정변 및 정계 진출


5.16은 육군 및 해병대 주도로 이루어졌고, 해군과 공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지지해서 계속 공군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하였다.
전역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13]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힘든 길을 걸어온 아버지와는 달리 군과 정/관계의 원로로서 순탄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14]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원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뒤에는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정계 활동을 이어갔다.

2.4. 말년


12.12 사태 이후 정계 일선을 떠나게 되었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 지난 정권의 인사들이 몰락하는 현상을 반영한 셈. 역시 박정희 시대에 권세를 누리던 박종규, 김종필 등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15]

2.5. 사망


[image]
2016년 5월 19일, 향년 93세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멤버이자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이었으므로, 장례식은 21일 공군장으로 엄수되었고,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사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훈련중이던 후보생과 훈련병들에게 자서전이 배부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1960년작 영화 <아아 백범 김구선생>에선 배우 황해남이 연기했다.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액션배우 신일룡이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4. 저서


  • 조국의 하늘을 날다: 백범의 아들 김신 회고록 - 돌베개. 2013.

5. 기타


그의 자녀들(그러니까 김구의 손주들)은 대한주택공사의 사장, 국가보훈처장, 기업인 등 사회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김진 전 주공사장은 뇌물을 받고 중요서류를 넘겨주는 범죄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또 김양 전 보훈처장도 와일드캣 도입 비리로 2015년 구속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
고명딸(백범의 손녀) 김미는 빙그레 회장이자 전 국회의원김호연[16]과 결혼했는데 그 김호연은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17]의 동생이다. 덧붙여 하마터면 세상 빛을 못 볼 뻔한 백범일지의 간행 역시 그가 주도한 사업이다.
김신 이후 김구의 후손들에게서 공군장교가 계속 배출되고 있는데 사위와 외손자가 2대에 걸쳐 공군장교에 친손자도 공군장교다. 공군장교 입대가 거의 집안 전통이 된 모양새다. 좋게 말해 노블리스 오블리지, 좀 삐딱하게 보면 공군의 로얄 패밀리라 할 수 있다. 해방 직후부터 권력층에 편입된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엔 가장 잘 나가는 사례.[18]
1960년 그의 집에서 운전병 네 명이 가스중독으로 질식사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1992년 안두희가 고백(?)했을때, 그는 당시 소령에 불과한 김창룡이 어떻게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며 깠다.
그의 집에는 김구와 장제스가 악수하는 사진도 걸려있다고 한다. 장제스 동상을 국내에 보존하자고 하는 등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존속이 어려웠을 것이다. 사적 관계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장제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회고에 따르면 김신이 대사로 부임했을 때 장제스는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허물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한 한국 국내에서 잘 알려진 장제스의 '부패한 며느리를 처형한 이야기'의 원 출처가 김신의 회고록이다. 장제스의 며느리(장웨이궈의 아내)인 스징이는 실제로 사치와 부패가 심해서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는데, 스징이가 1953년 영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자 대만 내에서도 장제스의 암살설이 상당히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이를 김신이 회고록을 통해 언급한 것이다.
1989년북한에 납북될 뻔했으나, 당국의 조치로 막아냈다.
장우룡 화백의 그대에게/BOUT-1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염신현 중령은 김신 장군이 모델이다.
아버지와 함께 조국의 해방을 위해 분투했으며, 조국 해방 이후에도 계속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참모총장으로 예편하고 잠시 정계(그것도 우익 계열)에도 몸을 담았다는 점에서,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의 아들인 프랑스 해군 감찰감 필리프 드 골 대장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에서 엄청난 장신이었다. 샤를 드골이 196cm이고 아들인 필리프는 아버지 보단 작았지만 186cm이나 됐다. 김구와 김신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도 당시 180을 넘는 거구였고, 아들인 김신 또한 아버지와 찍힌 투샷#을 보았을 때 아버지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상당히 장수했다.[19]
중화민국 외교관 류위완과 매우 친했지만 김구-류위완 회담록이 공개되자 데꿀멍했다.
김완섭치하포 사건에서 죽은 스치다는 일본 장교가 아니라 상인이라는 주장을 하자 소송을 걸었지만 결국 상인이라는 게 밝혀졌다.
2014년에 김구 청문회가 출간되었는데 '''김구와 본인을 동시에 까는 내용이었지만 사망할 때까지 소송을 걸지 않았다.'''
생전 해외 대학에 기부한 42억여 원이었는데, 증여세와 상속세 명목에서 나와 국세청으로부터 27억여 원의 세금을 부과받았다고 한다.

[1] 선(先) 안동 김씨 26세손.[2] 그도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주로 임시정부 소속 비밀공작원으로서 정보수집에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중국 충칭은 오늘날도 석탄 매연과 습한 날씨가 어우러진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악명높다. 이로인해 당시에도 폐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김인 역시 이를 피하지 못했다. 김인은 광복을 몇 달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다.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 살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김구는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여담으로 그의 아내 안미생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서, 남편 사후에도 김구의 비서역할을 수행했다. 안미생 여사와 무남독녀 김효자 여사(백범의 장손녀로 1947년에 할아버지 김구 선생과 삼촌 김신 장군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는 이후 미국으로 이민간 뒤로는 행방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3] 당시 김신은 임시정부 내무부 민정과에서 활동했다.[4] 당시 북한에서는 김구, 이승만을 격렬히 혐오하여, 곳곳에 두 사람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어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가 확정되자 부랴부랴 벽보를 수거했는데, 채 떼지지 않는 벽보는 급하게 먹칠을 해서 가렸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 세초가 가능한 먹물의 특성상, 먹칠을 했음에도 마르면서 가려진 비방문구가 희미하게 드러나보였다고 한다(...). 자신을 맹비난하는 벽보를 가리키며 백범이 말없이 웃자, 북한측 수행원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뻘게졌다고 한다.[5] 임시정부시절 광복군 참모처장으로 중국 공군 상교(대령, 육군 중장대우)인 최용덕 장군을 등용하였고 최용덕 장군으로부터 항공력 강화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6] 다만, 해당 보고서에는 일본 항공사에서 '''민항기'''를 몰았던 사람을 '''일본군 수송기 조종사(...)'''로 기재하기도 했다[7] 애시당초 백범 선생도 '''김일성'''의 암살 미수에 개입한 적이 있었고, 그전부터 자유시 참변 등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했다. 임시정부에 좌익 계열이 사실상 없던 것도 초기 임정의 진로를 둘러싸고 김구 등이 주축이었던 현상유지파와 갈등을 겪던 창조파와 개조파가 후에 임시정부에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신채호였다. 물론 신채호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좌익 독립운동가들과 친했을 뿐 본격적인 좌익이라거나 공산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8] 대한민국 공군장교 임관 10번째라고 보면 된다. [9] 이근석 대령, 장성환 중령, 김영환 중령, 김신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10]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 공군은 전투기 1대 없었다가 갑작스럽게 10대의 머스탱을 인수받았다. 이들은 한국공군에서 가장 능력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인 만큼 이들은 소중한 모종이였다. 그러나 비행한지 몇 일만에 최고참 이근석 장군의 전사로 단독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 쫓겨났다. 부족한 사천 비행활주로에서 이착륙의 어려움은 차제로하고서도 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들어오면서 위태로웠다. 1.4후퇴 이후에서야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 대량 육성 이후에 가서야 머스탱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공군의 단독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토벌을 통하여서 작전능력 향상과 인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동안 오랜 시간이 있어야 했고, 그 동안 김신 장군이 고참이 되면서 직접적인 비행을 통한 단독작전으로의 전투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다.[11] 김신 장군은 자신이 백범의 아들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걸 더 선호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다.[12] 국방부 장관인 이종찬 장군의 추천과 권유덕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김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차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는 더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 그래도 해/공군 참모차장도 충분히 요직이다.[13] 신생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 가는 우방국이었다. 당시 총통이 '''장제스'''인 점을 생각하면 김구의 아들 김신으로선 더 각별한 인연이기도 하다. [14] 김구와 해방정국에서 주도권 다툼을 한 정적이었던 이승만은 당연히 재임 내내 김구를 공격했다. 반대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나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을 깎아내려고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구를 높일 필요성이 있었는데 김구의 아들이 쿠데타에 동참해줬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신생국가의 정치인으로서 부정적 부분도 적지 않았던 김구가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추앙받는 데 공헌했다.[15] 초대 독립기념관 관장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춘생 장군(전 육군사관학교장)이다. 이후 김삼웅과 김주현을 제외하면, 역대 관장들은 독립운동가 또는 그 후손들이 임명되었다.[16] 김호연 역시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했다.[17] 아들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을 벌인 바 있다. 비자금 조성 혐의로 2011년 1월 31일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으며, 결국 수감생활 했으나 사면되었다. 여담으로 그 역시도 공군장교 출신이고, 아시안게임 승마 금메달로 병역을 마친 막내아들이 예외일 정도로 다들 공군 장교 출신이다. 심지어 누나 김영혜도 공군장교로 복무했다. [18] 원래 김신은 명망높은 군인이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에 공군참모총장으로 협조하는 조건으로 요직에 올랐다. 김신은 이를 기회로 삼아 선친 김구의 명예회복, 기념에 잘 활용했다.[19] 김신은 2016년 5월 19일 별세했고, 필리프 드 골은 아직 생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