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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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공군의 장성. 육사 동기였던 박원석 중장에 이어 9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회장의 부친이자 장승준 매일경제신문 및 MBN 사장의 할아버지이며, 동향인 정진기 매경 창업주와는 사돈 관계이다.
2. 생애
1924년 12월 15일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한 뒤[1]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60기로 입학했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1945년 8월 15일에 졸업했다. 일본군으로 임관은 하지 못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해 육군소위로 임관했고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주 기종이 F-51였던 탓에 별명이 팬텀장이었다.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
중등학교에서 일본육사로 직행한 수재로, 생도시절에는 독립운동가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김일성"처럼[3]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학교 성적도 꽤 우수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장지량이 초급장교였을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좋게 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사안은 경청해주며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후문.
김신조의 서울 침투 사건 당시 美 5공군 사령관 매키 중장과의 인연으로 김신조의 124부대 및 김일성 숙소의 위치 같은 미국의 극비 정보를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며,[4] 사건 후 대노한 박정희 前 대통령이 대대적인 보복을 지시하자, 실무진들과 공격계획을 입안하였다.[5]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제10전투비행전대장, 공군본부 인사국장, 작전국장, 제11전투비행단장, 공본 작전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1966년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참모총장시절에는 지방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을 헬기에 직접 모시고 수행하면서, 참모총장의 지위를 대장(大將)으로 격상시키고(후임부터 적용), 공군의 중요한 안건을 이른 시일 내에 현안으로 올려 공군을 지원하는데에 진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경쟁자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는데, 걔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끼고 공격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신중한 처신으로 살아남았으며, 전역하는 자리에서도 이 일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군인 신분으로 대한중석 회장을 지냈다. 1968년 이임했고 후임자는 대한민국 공군의 첫 대장인 김성룡 대장이다. 전역 후에 에티오피아 대사, 필리핀 대사, 덴마크 대사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한국군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장(戰場)과 기업 경영[6] 양 쪽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인물로 상황판단과 응용력, 처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월 2일 이때가 향년 90세로 별세. 기사
[1] 훗날 그의 사돈이 될 정진기 매경 창업주가 학창시절 교생이었다.[2] 동 시대에 같이 근무한 창군멤버 이강화 장군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빨간마우라에 대한 아이디에 제기 및 지시는 김영환 장군이 한 것 같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장지량 장군인 것 같다. 두 사람이 단장-부단장으로 근무했을 때의 일화이기 때문.[3] 이때의 김일성은 북의 그 사람이라기 보단, 일본육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광서 장군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4]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우리 전투기를 급파해준 덕분에 도움을 받게 된 매키 중장이 보답한 것이라 한다.[5] 푸에블로호 피랍 사태 및 베트남 전쟁 국면과 맞물려 미국측이 만류했다고 한다.[6] 복마전 양상을 띤 대한중석의 누적된 부정적 작태를 일신하고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