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원

 


남송 4대 권신
진회
한탁주
사미원
가사도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권신
위충헌왕(衛忠獻王)
史彌遠 | 사미원
'''

'''시호'''
충헌(忠獻)
'''작호'''
위왕(衛王)추봉
'''최종직위'''
중서령(中書令)추증
'''이름'''
사미원(史彌遠)
''''''
동숙(同叔)
'''부친'''
사호(史浩)
'''생몰'''
1164년 ~ 1233년
'''주군'''
송효종
송광종
송영종
송이종
'''국적'''
남송(南宋)
1. 소개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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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남송 영종, 이종대의 재상이며 권신이었다. 자는 동숙(同叔),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2. 생애


사미원은 명주 은현 사람으로 1164년 효종의 태자 시절 스승인 사호(史浩)[1]의 아들로 태어났다. 효종 순희 14년(1187)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후 대리사직, 추밀원편수관, 기거랑, 승사랑, 선의랑을 지냈다.
개희 2년(1206) 당시 권신이자 재상인 한탁주가 자신의 권세 유지를 위해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감행하려하자 영종에게 무리한 북벌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한탁주와 그 당파에 의해 북벌은 강행되었고 남송은 금나라에게 크게 패했다.(개희북벌) 1207년 패전의 색이 짙어지자 남송 조정에서 먼저 화의를 요청했는데, 금나라 측은 남송에게 과거의 화의를 어기고 이번 전쟁의 주동자인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예부시랑이던 사미원은 영종과 공인인렬황후 양씨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11월 개희북벌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14여년간 조정을 뒤흔든 한탁주를 죽이고 그 수급을 금나라에게 넘겨준 뒤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후 1208년에 재상이 되어 남송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영종의 아들 9명이 모두 요절하여 영종은 일찍부터 송태조의 아들인 조덕소의 후손 조귀화(趙貴和)를 양자로 삼아 이름을 조횡으로 고치고 황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황태자 조횡은 양모인 황후 양씨와 사미원을 싫어했고 평소에도 이들의 행적을 적으며 비난했다. 그는 ‘사미원을 수도에서 8천여리가 떨어진 곳으로 유배보내야 된다’, ‘(지도 위에 주사위를 던지고 그 방향을 가리키며)언젠가는 사미원을 저곳으로 보내겠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늘 사미원을 비방했다. [2] 이런 이유로 사미원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적대적인 조횡을 못마땅하게 여겨 둘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이에 사미원은 은밀하게 과거 영종의 양자를 종실 중 구할때 점찍어두고 자신이 추천했던 기왕 조귀성에게 송조 황제 자리를 잇게 하려고 했다.
영종이 재상 사미원에게 똑똑하고 품행이 바른 조씨 종실 아이를 선별하라고 자시했을 때, 사미원은 자신의 막료로 있던 여천석[3]을 불렀다. 당시 여천석은 시험을 보기위해 가을에 임안을 떠나 고향 경원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때 은밀히 그를 불렀던 것이다. 그 자리에게 사미원은 영종과 그 사촌동생인 기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종실 집안 중 똑똑한 아이 한명을 찾아 데리고 오라고 명을 내렸다.
따라서 여천석은 임안을 떠난 뒤 손발이 닳도록 조건에 부합하는 조씨 종실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월주 소흥 일대를 지나다가 큰 비를 만나 근처에 있던 전보장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외손자 2명이 송조 조씨 종실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송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세손인 조여거, 조여예[4]였다. 두 아이 모두 그 관상이 기이했고 똑똑하고 품성도 흠잡을 수 없었기에 여천석은 임안에 도착한 뒤 사미원에게 이를 알렸다.
여천석에게 보고를 받은 사미원은 여천석에게 월주로 내려가 두 형제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때 전보장은 자신의 재산을 저당잡히고 논밭까지 팔아 임안에서 내려온 여천석을 융숭히 대접하고 동네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두 외손자들을 임안으로 올려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들은 사미원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함부로 흘리느냐”고 화를 내고 불쾌해 했다. 하지만 여천석이 조여거, 조여예 형제를 데리고 오자 이들을 만나 그 자질과 재능을 알게 된 사미원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채 이들을 다시 월주로 돌려 보냈다. 따라서 동내 여기저기에 요란을 떨면서 자랑을 하던 전보장은 크게 체면을 구기고 이 일로 실망했는데, 시간이 흐른 뒤 여천석이 비밀리에 내려와 17세였던 조여거를 임안으로 모시고 갔다. 이후 사미원은 조정과 궁중을 돌며 자신이 데리고 온 조여거를 영종의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궁중 암투의 결과, 조횡이 영종의 양자이자 태자가 되고 조여거는 병의랑에 제수되고 이름을 조귀성으로 바꾼 뒤, 영종의 사촌동생 기왕 조병의 양자로 입적시켜 그 가문을 잇게 됐다.
이후에도 사미원은 내심 조횡이 황위를 잇길 바라지 않았고 조횡 역시 사미원에게 적대감을 들어냈가에 사이는 갈수록 틀어졌다. 반면 조귀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같이 유학,시문 등을 정청지에게 배웠는데, 그를 가르친 정청지마저도 그가 지은 시문을 보며 칭찬했을 정도로 명민하였다.
사미원과 조정대신들은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영종에게 그간 황태자 조횡의 잘못된 행동들과 그가 했던 일들을 알리며 폐출을 주장했다. 하지만 영종은 이때 그 말을 듣고도 멍하니 정면만 응시하여 폐태자 건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러던 중 가정 17년(1224) 8월 영종이 병으로 쓰러지고 병세가 위급한 틈을 타 사미원는 황후 양씨에게 황후의 조카 양곡, 양석을 보내 설득 끝에 조서를 고쳐 조횡을 폐한 뒤[5], 조귀성의 휘를 조윤으로 바꾸고 영종과 황후 양씨의 아들로 입적시켜 태자로 책봉한 이후 황제로 옹립했다[6]. 이종이 즉위한 이후, 사미원과 조정은 조횡을 폐하여 제왕으로 진봉시킨 뒤 호주로 보냈다가 자결을 강요하여 죽였다.
이후 사미원은 태사가 되어 권력을 장악했고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한 몽골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한 1233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다 사망하였다.

3. 기타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1과 시나리오 3에서 남송의 문관이다. 또한, 전작인 원조비사에서도 시나리오 2와 유저 시나리오에서 남송의 정치고문으로 등장한다.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단역으로 등장한다.

[1] 고종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악비의 신원 회복을 주장했으며 효종때 우승상을 지냈다. 금나라가 남송을 침공할 당시 효종이 사호와 논의도 없이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건의해서 고종의 역린을 건들게 되자 효종에게 다시 조언한 일화가 있다. 이때 사호는 효종이 먼저 앞서 올린 표문을 이유로 고종의 심기를 건든 일을 사죄하고 오히려 황제와 함께 출전해서 본인이 나서겠다는 취지였다고 바꾸게 했다고 한다. 효종은 사호의 말을 듣고 고종에게 자신의 표문을 사죄하고 사호 말대로 했는데 고종은 이를 듣고 만족했으며, 효종은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 일 이후 효종은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고 한다.[2] 조횡은 거문고를 좋아했는데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미원은 거문고를 잘 타고 글도 읽고 쓸 줄 아는 미인을 구해 조횡의 후궁으로 보냈다. 당연히 조횡은 그 미인을 마음에 들어했고 총애했다. 이렇게 미인계로 조횡을 현혹한 사미원은 궁으로 보낸 미인의 가문을 잘 대접했기에 미인과 관계가 좋았고, 그가 보낸 미인 역시 눈치가 빠르고 사미원과 은밀히 교류하였기에 편지와 정보를 수시로 사미원에게 전달했다. 이런 까닭에 사미원은 조횡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했다고 한다.[3] 오늘날의 절강성 경원현 출신으로 성격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기에 사미원이 아꼈다고 한다, 여천석은 본래 사미원 가문의 가정교사로 있었다고 한다.[4] 도종의 친아버지[5] 원래 황후 양씨는 남편인 영종이 조횡을 양자로 삼았기에 그 유지를 따라야 한다며 밤낮으로 7번 넘게 찾아오는 양곡, 양석 등 조정대신들의 요구에도 폐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양곡이 무릎을 꿇고 울면서 이미 조정대신들이 조횡을 반대하고 있으며 그동안 황후 양씨, 사미원, 조정대신들을 매일같이 비방한 조횡이 황제가 된다면 양씨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울면서 사실을 고하자 황후가 그에 따랐다고 한다.[6] 이종이 즉위하였을때 조횡은 다른 대신들과 달리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아 하진이 조횡을 붙잡아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