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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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의심병
4. 평가


1. 개요


Gheorghe Gheorghiu-Dej(1901~1965)
루마니아의 7대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자 총리.

2. 생애


루마니아의 브를라드(Bârlad)의 극빈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학교도 못 다니고 노동자 일을 하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1930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루마니아에서 공산당은 불법정당으로 규정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데지(Dej)라는 이름도 그가 복역했던 감옥이 있던 클루지 주의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로 의연하고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훗날 엄청난 악명을 떨치게 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만나면서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고 차우셰스쿠를 매우 총애하고 신임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1944년 소련군이 동유럽으로 밀고 내려오자 그는 이 틈을 타 탈옥하는데 성공했고,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을 수립했고 공산정권의 서기장으로 추대되어 소련의 간섭하에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 독재 정치를 펼쳤다.
개인적인 우상화에,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주석부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데지는 당의 서열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나 그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차우셰스쿠였다. 그는 옛날부터 데즈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헌신적인 인물이였다. 그래서 의심이 심해진 데즈를 말년에도 편하게 만나 이야기를 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공업화 경제 개발 정책을 펼치고 소련 이외에 미국, 중국, 유고슬라비아 등 이외 다른 나라들과도 교류하는 자주 외교 노선을 어느 정도 펼치기도 했었으나 1965년 폐암으로 쓰러져 사망하게 된다.

3. 의심병


게오르기우 데즈는 1965년 초에 수술이 불가능한 암이라는 통보와 함께 불과 몇개월 정도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재미있는 증언이 있는데, 1965년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했던 공산당 간부는 에드워드 베르가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이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를 하고 있을 때 베르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암이 발견되었을 때 데즈는 자기가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암의 발병은 자기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한 소련식 보복이라고 말하더군요, 차우셰스쿠에게도 들려주었는데 주석부에 방사선을 쏘면 그 방사선이 자기 방의 문고리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온다고 얘기했어요." 이런 황당한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은 없다. 다만 게오르기우데지가 얼마나 소련의 정보기관이나 음모 등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방사선의 세기는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소련 국경에서 부쿠레슈티의 건물 속에 있는 사람을 죽일 정도의 방사선을 쏘면 그 직선거리 안에 있는 사람은 즉사했을 것이다. 애초에 핵폭발 없이 그 정도 위력의 방사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고.
참고로 이 개드립에 대해 차우셰스쿠가 유일하게, 그리고 엄청나게 맞장구를 쳤는데,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 양반 아부 잘하는 구나' 생각했지만 사실 차우셰스쿠는 정말로 믿은 거였다고(...). 말년에는 게오르기우데지의 공포감은 더욱 더 커져서 친한 동료들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생각은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다.

4.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국부로 추앙받기도 했었지만[1]사후 집권한 차우셰스쿠가 권력장악을 위해 격하하면서 묻혔고,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루마니아가 민주화되면서는 그의 뒤를 이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국가의 재앙을 초래한 역적으로 규정되어 루마니아 현지에서도 이름조차 말하는것 역시 금기시 되는 형편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 인간이 차우셰스쿠보다는 좀 낫다는 주장도 있다. 비록 반대파들을 억압, 탄압하며 스탈린주의를 앞세워 독재 정치를 펼치던 공산 독재자였지만 최소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절차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등 정치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고 자신이 사망한 이후 정권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도 일부 보인 기록도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죽고 차우셰스쿠가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막장으로 독재정치를 펼치면서 몇 년만에 그의 예견이 적중해버렸다.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보다 이 인간이 안 죽고 더 오래 살아 통치했으면 조금 더 낫진 않았겠냐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비록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 독재 정치를 펼치긴 했으나 성향상 차우셰스쿠보다 온건한 면도 있었고 실제로 이 인간이 통치할 당시 루마니아는 정치나 경제나 상태가 좋았던 점도 있었다.심지어 더 오래 살았다면 1989년 동유럽 혁명 와중에 차우셰스쿠처럼 혁명 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을 상대로 무력 진압을 사용하지 않고 퇴진을 수용하여 루마니아도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평화적으로 민주화 정착이 성공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2]혹은 그때까지 가지 않고 냉전기였던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초,중반 즈음에 사망하여 그때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잡았다 해도 설령 차우셰스쿠가 개막장 이상으로 장기 독재를 펼칠 확률은 0%였을 것이다.
허나 게오르기우데지의 공포정치도 차우셰스쿠 못지 않게 만만치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새정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비밀경찰에 의한 압박, 체포 ,추방이 잇다랐고 국유화, 통제경제, 집단농장 현상도 궤를 같이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테러를 당했는데 1946~47년에 걸쳐 희생당한 사람만 6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수만 명의 노동력이 데즈의 호기심에서 시작한 '다뉴브 강-흑해 운하' 공사현장으로 추방되었으며, 소련의 지원으로 세워진 정부이니 만큼 루마니아는 소련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했다.
당시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회고한 한 학생은 "당시 학교 분위기는 공포로 가득했다.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정보수집이 뒤따랐고 반공주의자 집안 배경을 가졌거나 어쩌다 말 한 번이라도 잘못하면 학생정보원이나 청년지도자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수난을 당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애초에 '''차우셰스쿠를 후계자로 낙점한것 부터가 데지 자신이었고'''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독재정치의 씨앗을 뿌린 상태에 의심병까지 있었으니 이 사람이 계속 살아서 통치했다고 해도 일어날 혁명은 일어나고 차우셰스쿠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사실 죽인 사람 숫자로 보면 게오르기우 데지가 차우셰스쿠보다 더 많이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만큼 괜히 차우셰스쿠 이상으로 이름조차 금기시되는게 아니다.
애초에 차우셰스쿠가 그냥 멍청하고 무능한 공산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하면, 데지는 울브리히트, 고트발트, 비에루트, 라코시 등과 함께하는 잔인한 학살자이자 숙청의 대마왕이었기 때문에 누가 더 악한지를 따지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원복이 줄거리를 맡아 1990년에 어문각 출판사에서 내놓은 차우셰스쿠 만화에선 게오르규 게오르규 제이라는 이름으로 나와서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그조차도 차우셰스쿠의 막장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1] 실제로 공산국가들에서는 공산정권을 세운 창건자가 국부로 추앙받기도 한다.(ex.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 알바니아엔베르 호자, 유고슬라비아티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2] 사실 1989년 동유럽 혁명 와중에서 유혈 폭력 혁명으로 공산 독재 체제가 허물어진 나라는 루마니아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