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베르 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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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엔베르 할릴 호자(Enver Halil Hoxha)
생몰년
1908년 10월 16일 ~ 1985년 4월 11일
출생지
오스만 제국 야니아주 에르기리군 에르기리(Ergiri)
알바니아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
사망지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티라나
정당
알바니아 노동당
종교
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네지미예 호자(Nexhmije Hoxha, 1921–2020)[1]
1. 개요
2. 생애
2.1. 집권 이후
2.2. 종교 탄압 정책
2.3. 사망
3.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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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의 정치인으로 알바니아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장과 알바니아 각료회의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40여년 동안 집권한 독재자로 특히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강조하며 신격화를 시도한 점에서 북한김일성과 비슷한 면이 많다.

2. 생애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다. 알바니아 왕국 시절인 1930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간 촉망받던 생물학도였으나, 생물학을 그만두고 철학과 정치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프랑스 생활 중 유창한 불어를 익혔고,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자 정치인들 중에선 공부를 꽤 많이 한 축에 속한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알바니아는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침략을 받았다. 그는 알바니아 공산당(1948년 알바니아 노동당으로 개칭)의 파르티잔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약체에 가까웠고,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에게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어렵지 않게 빨치산 운동으로 알바니아 독립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처음에 호자는 이웃나라의 빨치산 지도자 티토와 협력관계지만, 티토는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의 한 연방국으로 삼킬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1945년부터 반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서고, 유고슬라비아와 사이가 나빴던 소련 쪽으로 기울어졌다.

2.1. 집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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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기에 찍은 사진. 당시 소련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그를 공산권 국가원수 중에서 가장 미남이라고 일컬었다.

노동절 축하 퍼레이드
1946년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됐다. 집권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내부숙청, 그리고 권력 유지 과정 전반은 여러모로 김일성과 비슷한데, 항일운동의 경력을 내세운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침략군에 맞섰던 파르티잔 경력으로 엔베르 호자는 최고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알바니아 인민군의 총사령관을 겸임했고 여기에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국방장관 등을 겸임했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추진하자 소련과도 교류가 드물어졌다. 1968년에는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여 알바니아는 제2세계와도 교류하지 않는 철저한 쇄국으로 일관했다. 또한 이웃 국가들과의 국경을 폐쇄했다.
물론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호자도 스탈린 앞에 쩔쩔 맸으며 스탈린에게 100세까지 너끈히 사시길 기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 스탈린은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는 145세까지 사는 노인들이 많다면서 그것도 부족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엔베르 호자가 소련과 결별한 후에도 스탈린 숭배만큼은 열렬히 계속하며 집무실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기도 했다.
호자는 프라하의 봄 때처럼 바르샤바 조약 동맹군이 알바니아를 침공해서 자신을 축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크기의 전국토 여기저기에 토치카벙커링하듯 건설했다.[2] 게다가 이 당시 지어진 토치카의 수는 무려 75만개로 토치카가 알바니아 국토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가 되자, 당시 알바니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람 사는 주택보다 벙커가 많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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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량 양산된 토치카들은 지금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어 숙박이나 관광용으로 리모델링한 일부를 제외하고 흉물스럽게 녹슬고 무너져가는 중이다.
또한 이 당시 알바니아의 유일한 우방국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이었다. 마오쩌둥과 호자는 "반수정주의"를 모토로 다른 공산국가를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화궈펑이 집권하여 문화대혁명을 완화시키고 서방 국가와도 관계 개선을 하자, 호자는 중국도 수정주의 국가로 비난하여 관계를 끊었다. 소련과 중국 등 모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공산 진영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었고, 정권유지를 위해 항상 외부의 침략을 강조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북한과도 우호적이었고 김일성대에 알바니아인 유학생들이 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사이가 나빠졌고, 호자는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다. 1984년에 김일성이 동유럽을 방문할 때 알바니아만 제외한 이후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거기에 김일성은 알바니아 대신 북키프로스랑 접촉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대한민국-알바니아가 수교한 1992년에 북한은 대사관을 폐쇄하고 불가리아 주재 대사가 알바니아 대사를 겸임하였다. 올림픽 역시 1972년 부터 1988년 까지 불참했다. 이웃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80년 대회와 1984년 대회에 모두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해서 좋은 성적을 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호자의 이념은 '반수정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정통 스탈린주의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조금이라도 유화적이거나 아니면 이단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을 모두 수정주의자로 비난했다. 실제로 니키타 흐루쇼프, 요시프 브로즈 티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심지어 김일성까지 모두 수정주의자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2.2. 종교 탄압 정책


전임이나 다름 없었던 조구 1세의 세속주의 정책을 가혹한 종교 탄압으로 탈바꿈하여 종교 유화적이었던 사회분위기를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개인 우상화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수준으로 열을 올렸다. 알바니아인 가계의 테레사 수녀가 1971년 모친의 장례를 위해 알바니아를 방문하려 했으나, 호자가 종교를 버려야 입국을 허가해 주겠다고 이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호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우리는 이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해야 하며, 이미 중독된 사람들도 그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치료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실시했다. 특히 알바니아를 "세계 유일의 무신론 국가"라고 표방했다. 알바니아는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차례로 받았기에 국민 대다수가 종교인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기본이고 일반민중의 종교적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신론 운동을 언론, 교육, 모든 공공단체를 통해 실시했으며 종교적 내용을 담은 서적의 출판을 모두 금지시켰다. 1967년부터는 아예 헌법으로 개인적인 종교활동을 비롯해서 공인된 종교 역시 금지시키고 무신론·무종교 운동을 강행했다. 이 당시 알바니아에 존재했던 많은 모스크와 성당이 파괴당하거나 폐쇄당하고 운동경기장이나 창고로 개조됐다. 당연히 종교 신자들은 체포되어서 각종 고문과 처형을 당하거나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67년 한 해에만 160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인민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정권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어떤 신부는 무슬림과 가톨릭 신자들을 모아놓고 종교 행사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26년 간 강제수감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의 종교 탄압 및 엔베르 호자의 숙청으로 인해 1946년부터 그가 죽은 1992년까지 알바니아에서는 5,577명의 남성과 450명의 여성이 처형됐고 2만 6천여 명이 투옥됐다. 또한 3만 2천여 명을 강제 이주시켰고 7천여 명이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무슬림들의 신앙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에서 금지한 돼지고기와 술, 조개, 새우 등을 대거 배급했으며,[3] 종교적 명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등의 정책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 역시 유년기에 무슬림이었으며 엔베르 호자의 본명은 엔베르 할릴 호자(Enver Halil Hoxha)로 전형적인 무슬림식 인명이다.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은 주로 터키어식의 인명을 사용하는데 엔베르 할릴(Enver Halil)은 아랍어 '안와르( أنور / ʾAnwar)'와 '할릴(خليل / Khalīl)'이 어원인 터키어 인명이다. 호자(Hoxha)라는 성은 페르시아어 '하제(خواجه / Xâje)'에서 유래한 터키어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신학, 과학, 아랍어와 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뜻한다.
호자가 알바니아에서 종교를 탄압하면서 박해받던 종교인들이 서로를 숨겨주고 도와주며 신뢰감을 쌓은 덕분에 알바니아는 다수의 무슬림과 소수의 기독교가 공존하며 북부는 알바니아 로마 가톨릭교회, 중부는 이슬람교, 남부는 알바니아 정교회 등으로 나누어져 있음에도 코소보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급으로 종교적 갈등이 심하진 않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의 이런 종교 탄압 정책이 오히려 알바니아의 종교 생태계를 망쳐 놓았다는 분석도 있다. 엔베르 호자 집권 이전에도 알바니아는 종교 관련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국가였지만 탄압 때문에 종교 기반 시설들이 무너졌고, 종교 지도자들이 학살당해 이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게 되자 거기에 편승하여 이슬람 극단주의와하브파가 들어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2.3. 사망


1970년대 후반부터 심혈관계 질환으로 후임자였던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 1925년 10월 18일 ~ 2011년 10월 7일)에게 실무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무엇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늘그막에 주치의들을 의심하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빨리 받지 못해 뇌출혈로 사망했던 사례를 상기하여 믿을만한 의사를 주변에 두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도 의사들을 철저히 사전점검했다. 이후 1985년 향년 76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사후 티라나 교외에 2차대전 당시 싸우던 파르티잔 대원들이 안장된 국립열사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립열사묘지에 있는 어머니 알바니아 상 아래에 안장되었으나, 공산정권 붕괴 후 호자의 무덤은 파괴되고 시내의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이장된 무덤은 상당히 초라한 무덤이었으나, 최근에는 관광객을 맞아 고급 석재로 다시 무덤을 단장하고 30레크(한화 약 300원)씩 참배료를 받는다.
그나마 자식들에게 정권을 세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들딸들은 알바니아 민중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고 꽤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동구권의 민주화를 이끈 동유럽 혁명이 1989년부터 시작됐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토도르 지프코프 역시 이 시점에 몰락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호자는 시기를 잘 맞은 셈이다.

3. 평가


1990년에 알바니아 노동당이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일당독재를 폐기하고, 1991년에 자유총선도 치러지고 이듬해인 92년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의 동상이 부서졌지만 나중에는 조금씩 평가가 좋아지긴 했는데 습지를 모조리 메워서 알바니아에서 말라리아를 추방했고, 그의 치하에서 전국민의 90%가 넘던 문맹도 퇴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알바니아에 반종교적인 엄격한 세속주의 법률을 도입하였고, 여성 억압을 금지시켜 여성의 지위도 급격히 향상되고 사회진출도 활발해진 점으로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평가도 종종 있다. 이 점은 전통적으로 이슬람이 강세이던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등지를 강제로 세속화시켜 극단주의를 억제시킨 스탈린과 비슷하다. 다만 여성 억압 금지 제도의 효과는 미미했으며 알바니아는 원래 종교적으로 널널한 동네다 보니 이에 대해서 반박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알바니아의 명예살인 카눈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카눈 운운하며 사적재제를 가하는 인간들을 잡아 가두웠는데 체제전환 이후로 알바니아가 카눈으로 위낙 골머리를 앓고 있다 보니까 이건 잘했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가난을 추방하지는 못해서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알바니아에서는 빈부차가 커지자 그를 그리워하는 노년층이 많다고 한다. 다만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 전에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 당시 알바니아 인구의 80%가 농민이었고 대부분 토지를 지주가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공업은 소규모의 벽돌, 담배, 통조림 같은 걸 만드는 정도밖에 없었다. 또한 도로는 비포장도로가 많고 철도는 아예 없었다.(알바니아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46년의 일이다.) 문맹률은 2차 대전 직전까지도 85%수준이었다.

4. 기타


  • 알바니아에서 타자기와 수염, 컬러TV를 금지시켰다. 다만 컬러TV 금지령은 당시 알바니아가 컬러방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 낭비 방지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그런 것이고, 집권 말기인 1981년에 컬러방송을 실시하면서 풀어주기는 했다. 다만 당대 알바니아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TV가 사치품 취급을 받았는지라 별로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알바니아의 TV방송 자체는 1963년에 시작했지만 1980년대 들어와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TV방송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평일 아침방송을 시작하지 않았던 1970년대 중후반의 한국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셈이다. 사실 한국도 1980년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지나치게 늦게 푼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
  •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국방장관, 인민군 통수권자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데 이 직함들을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임명하여 얻었다.
  • 시골에서 자신과 닮은 치과의사를 납치해서 자신과 더 흡사하게 성형수술을 시킨 후 대역으로 세웠다.
  •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은 냉전 기간동안 동서유럽을 통틀어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고 외국인과의 대화는 당국과의 허가 없이는 불법이었다.
  • 호자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후 1990년대에 체제 전환을 겪어야 했고 이러한 문제점은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스칸데르베그 광장(Sheshi Skënderbej)에는 원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의 동상이 아니라 엔베르 호자의 동상이 있었는데 호자 사망 후 부숴버리고 그 자리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의 동상으로 바꿨다고 한다.
  • 지로카스터르에 있는 그의 생가는 현재 민족학 박물관(Muzeu Etnografik)이 되어 있다. 터키풍의 꽤 큰 집으로 내부도 터키풍의 카페트와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어 터키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호자가 태어날 때에도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 뜻하지 않게 엔베르 호자가 알바니아 전국에 깔아놓은 토치카와 벙커는 알바니아의 관광상품이 되었다. 알바니아 어디를 가든 알바니아의 특산품인 오닉스석과 대리석을 깎아 만든 벙커모양의 재떨이가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티라나에 존재했었다. 현재는 티라나의 피라미드라고 개명되었다. 게임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서 건설할 수 있다.

[1] 1945년 혼인. 혼전성은 '주글리니(Xhuglini)'.[2] 이 점 역시 북한과 유사하다. 또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어마무시한 화력에 트라우마가 있어 60년대부터 4대 군사노선에 따라 북한 전체를 요새화했는데, 특히 갱도진지 구축을 중시했다.[3] 이슬람 율법에서도 하람으로 규정시되어 있는 대표적인 금기식품이다. 다만 술이나 갑각류, 패류의 경우 나라들마다 판매, 식용을 허용하는 국가들도 있고,(심지어 자국 영해에서 잡히는 갑각류, 패류, 두족류들을 해외에 수출하기도 한다.) 돼지고기의 경우 나라들에 따라선 비할랄 구역에서도 제한적으로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