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궤도
1. 개요
193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흥인지문에서 뚝섬유원지, 광장동까지 이어지던 전차 노선이다. 서울전차와는 다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차는 경성전기주식회사가, 경성궤도는 경성궤도주식회사가 운영했지만 1953년 이후에는 모두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시영 노선이 되었다.
폐선된 지도 50년이 넘게 흘러 지금으로서는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경성궤도주식회사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서울시내 곳곳에 아직 흔적이라고 남은 것은, 연선 일대의 골목길 구획이 이 선로를 따라 나 있는 곳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90년대 개발되지 않았을 때 얘기고, 광화문 인근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시대적으로 지나면서 흐멀흐멀 사라진 것 뿐.
2. 역사
원래는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에서 면허를 받아 부설한 것이 시작이나, 경영난에 직면한 후에 경성궤도주식회사에 넘겨, 1932년부터 1953년까지는 경성궤도주식회사가 운영을 맡았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이 적산으로 몰수하여 임시 경영진이 그 운영을 맡았다.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성동교 교량의 파괴로 동대문, 왕십리 방면과 뚝섬, 광장동 방면이 끊어졌고, 차량과 선로의 파괴가 심각하여 운행이 중단되었다. 광장리 지선은 1957년에 가서야 운행 재개했다.
그렇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던 탓에 만성적인 경영난이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폐선이 결정되었다. 그 후 폐선된 일자는 불명이나, 폐지 결정이 된 당년에 폐지됐다는 말도 있고, 그 이후에 운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서는 그 후에도 운행된 걸로도 보인다. 추정으로는 1966년에 운행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3. 역할
경성전차가 도심 내부에서 시민들의 발이 되었다면, 이 노선의 역할은 도심에서 외곽까지 이어주는 노선이었다.
동대문에서 왕십리까지는 당시 부설되어 있던 경성전차와 선로를 공용했다.[2] 서울전차를 타고 도심에서 왕십리로 오면 왕십리에서 갈아타서 자양동이나 광장동 방향으로 가는 식.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뚝섬유원지는 이촌동의 한강백사장과 더불어 경성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휴양지였다. 본선은 성수동에서 구불구불 선형을 그리다가 현재의 영동대교 부근에서 뚝 안쪽으로 들어가 지금의 뚝섬한강공원에서 시종착을 했다.
광장지선은 상후원역이 있던 지금의 뚝섬역사거리 안쪽[3] 에서 갈라져 광나루로 남쪽 가변으로 달리며 화양리를 거쳐 광나루로 향했다. 광나루는 천호동, 나아가 광주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나루였고, 한강에 2번째로 놓인 다리가 천호동과 이어지는 광진교일 정도로 천호동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발전된 곳이었다. 도심에서는 서울전차를 타고 왕십리에서 경성궤도로 갈아탄 다음, 광나루에서 내려 나룻배로 갈아타고 천호동으로 가는 식이었다. 그리고 천호대교가 건설되었고.
4. 연혁
5. 노선
- 본선
- 광장리선
[1] 폐지 직전 기준.[2] 또한 청계천 북단으로 전용 궤도선이 부설되어 있었다.[3] 성수동1가 656-802번지가 당시 상후원역이 있던 곳으로 본선과 광장지선이 여기서 분리됐다. 현재도 건물 양쪽으로 당시 선로대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골목길이 있다.[4] 지금의 성동구 성수동2가[5] 지금의 성동구 송정동[6] 지금의 성수동1가[7] 동대문역 7번 출구로 나오면 경성궤도주식회사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8] 해방 이후 동묘역으로 개칭되었다.[9] 한자로 전관, 전곶역으로도 불렸는데, 해방 이후에는 성동역(城東驛)으로 개칭되었다. 옛 경춘선 상의 성동역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