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전차

 



[image]
노선 연장
40.6km
운영 기관
경성전기주식회사 → 한국전력, 서울특별시
궤간
1067mm 협궤
통행 방식
좌측 통행
총 역수
72[1]
복선 구간

전철화 구간
전 구간
서울電車 / Seoul Tram
1. 개요
2. 역사
2.1.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
2.2. 일제강점기 1909년 ~ 1945년
2.3.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 1945년 ~ 1968년
3. 연표
3.1. 대한제국
3.2. 일제강점기
3.3. 해방 이후
4. 노선
5. 이설 계획
6. 차량
6.1. 대한제국기
6.2. 일제강점기
6.3. 해방 이후
6.4. 도색
6.5. 보존 차량
6.5.1. 복제 차량
7. 기타


1. 개요


서울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특별시에서 운행하던 노면전차로, '''한국 최초의 철도 노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경성부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므로, '''경성전차'''라고도 불렸다. 1945년에 해방한 이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여, '''경전(京電) '''이라고도 불렸다.[2]
1968년 11월 30일에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당시 쓰였던 2량의 차량이 국립서울과학관(반강제보기차 363호)과 서울역사박물관(반강제4륜보기차 381호)에 남아있다. 문서 하단의 보존차량 항목을 참고.

2. 역사


초창기인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 일본 회사가 인수한 후부터 일제강점기였던 1909년 ~ 1945년,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의 1945년 ~ 1968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2.1. 대한제국기 1899년 ~ 1909년


사실 대한제국이 전기를 도입하기 위한 사업의 부대 사업으로 이루어진 게 서울전차였다. 한성전기회사를 개업한 한성판윤 이채연과[3] H.Collbran(콜브란), H.R. Bostwick(보스트위크)가 전차 부설 등을 검토하여, 고종의 홍릉 행차 시에 신하를 동행함으로서, 많은 시간과 재정 낭비로 인한 불편함을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허가 후에는 황실의 투자까지 받았다.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1898년 9월 15일 오후 4시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앞에서 개설 예식을 거행하고,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들여,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 5월 3일 오후 3시에 첫 시험 운행을 하고, 1899년 5월 20일에 개통식을 가지고, 정식 운행을 시작하였다. 최초 개통 구간은 경교[4](돈의문) ~ 종로 ~ 흥인지문 ~ 보제원[5] ~ 청량리(홍릉)이며, 약 8km, 전구간 단선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개통과 함께 황성신문 등에 광고를 냈는데, 경교, 종로, 동대문, 보제원, 청량리역 간의 전차 요금표#가 나와있다. 전차 운영을 위한 75kW급 직류 600V 발전기와 100마력 증기기관은 흥인지문 안쪽에 설치되었다.
'''서울전차의 개통은 아시아에서는 일본 교토에 이어 두 번째이며, 수도에 부설된 건 최초라고 한다'''[6]. 정확히 얘기하자면 19세기 후반에 도쿄에 마차철도가 부설되어서 활발하게 운영되었기는 했지만, 이걸 노면전차로 바꾼것이 1903년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병사들이 전차를 신기해해서 멋대로 뺏어 타는 풍경도 빚어졌다. #
개통 당시 전차는 40인승 개방형 8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통 당시에는 전차가 신기해서 하루종일 타고 다니거나, 시골에서 한성(서울)으로 상경해서 타러 온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헬게이트'''까지 열렸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운전수는 교토 시에서 전차를 운전해 본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했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했다고. 승차권은 상등(우등석), 하등(일반석) 등으로 취급했고, 당시 정류장은 따로 없었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그런데 개통 후, 10일 째 되는 날인 5월 29일에 종로2가 부근에서 5살 정도 되는 아이가 전차에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이를 본 시민들이 같이 차량에 달려들었다고. 이 당시 서울에는 가뭄이 있었는데, 이게 전차 때문에 가뭄이 들었다는 되도 않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바람에 시민들이 선동되어서 달려들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차장과 운전수는 빠져나왔지만, 40인승 개방형 1대가 파괴되어 전소되었고, 다른 전차도 이와 비슷한 수모를 겪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까지 일이 커져버렸다(...). 그러다가 고종이 조령[7]을 내려 소동이 진정되자마자,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했다.
하지만 일본인 직원들은 운행을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고, 협상을 요구했다[8]. 하지만 협상은 난항을 겪다가 결렬되어, 결국 일본인 종업원은 모두 철수했고, 이후 5개월 동안 운휴하다가 한성전기회사 측에서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모집하여, 9월 말에 운행을 다시 재개했다.
차량이 개방형이었기 때문에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지 못한 것과 의자가 나무의자였다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빠르고 편리했던 장점 때문에 연장이 요구되었고, 개통년도였던 1899년에는 남대문까지 연장, 이듬해인 1900년에는 남대문에서 옛 용산까지 연장하는 것이 결정되어, 1901년에 개통을 하게 되었다고. 옛 용산까지 연장 개통한 이후에는 용산 포구에서 성내까지 화물 수송도 했었다고 한다. 또한, 서대문까지 연장되기도 했고, 같은 해에는 서대문~남대문~(의주로)~서소문 구간도 개통되었으나, 수요 부족으로 얼마 못 가 폐선되었다고 한다. 서대문 연장 당시에는 경인선평면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 측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적자로 인한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되어, 1904년에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본점도 미국 코네티컷 주의 세이브루크 시에 두게 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수익원을 개척하는 긴급 대책으로 1901년 1월까지 전차 노선을 종로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 이르기까지 확장했다. 이처럼 사업규모가 확대됨에 따라서 외자를 도입하는 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코네티컷 주에 있는 미들섹스(Middlesex) 지방의 세이브루크(Savbrook) 시에 있는 엠파이어 트러스트라는 금융회사에서 30만 달러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차관의 도입은 고종의 내략을 얻고자 한 처사이었으나, 한성전기회사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3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 회사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04년에 한성전기회사라는 상호는 사라져 버리고, 한미전기주식회사(American Korean Electric Co.)가 탄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종과 한미전기주식회사> 中 - 고승제 저

이렇게 함에도 경영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당시 여러 조약을 배경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일한가스주식회사를 설립한 일본의 재벌 시부사와 에이치와 매각 교섭을 벌였고, 특별한 이견 없이 의결되어, 1909년 6월 23일에 일한가스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

2.2. 일제강점기 1909년 ~ 1945년


그런데, 이 매각절차는 서울이 아닌, 일본의 국제항인 요코하마에 있는 인터내셔널 은행에서 이루어졌으며 매도 금액은 70만원이였고, 일본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매수하는 미끼로 한일가스주식회사를 이용했는데, 이게 사실 실체조차 갖추지 않은 유령회사. 다시 말해, 페이퍼 컴퍼니에 지나지 않았다고(...). 게다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요코하마에 팔아넘기는 와중에도 콜브란은 '''고종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한미전기주식회사를 매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고종이 궁내 부차관인 고미야 사보마츠(小宮三保松)를 불러서 '''"콜브란은 한미전기주식회사를 한일가스주식회사에 양도 매도 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교섭을 받은 일도 없었으며, 보고를 받은 일도 없었다. 콜브란에게 나의 주식을 모조리 맡겨두었는데, 어찌된 일이냐, 즉각으로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미야 사보마츠가 팔방으로 전보를 치고, 공문서를 발송했지만, 콜브란은 이미 미국으로 거쳐 런던으로 튀어버렸다(...)
매각 당시의 한미전기회사는 귀빈차를 포함한 객차 37량과 화차 13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일 승객수는 37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마자, 대대적인 투자를 벌여, 기존의 종로 ~ 남대문 ~ 동자동 구간과 종로 ~ 동대문 구간을 복선화 했고, 차량 역시 밀폐형 차량을 대거 도입하였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363호, 381호가 이 시기에 도입된 것. 1915년에는 상호를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그 뒤에도 개통 구간이 늘어나면서, 노선이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인이 밀집 거주하는 서대문과 마포 계통은 운임을 비싸게 부르거나, 일본인이 밀집한 곳, 특히 '''모토마치'''로 불리던 용산 계통은 운임을 낮게 부르는 천하의 개쌍놈 짓을 하자, 참다 못한 한국인들이 운임인하 운동과 부영(시영) 운동 등이 벌이게 되며, 공영화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었다.
또한, 1920년대에 들어, 정체기를 겪던 서울이 급격히 인구가 늘고, 주택이 없어 움막을 짓고 사는 토막민이 발생하는 등 서울의 과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자, 전차는 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교통난이 발생했다. 그리고, 버스 운행 또한 실시되면서 경쟁도 발생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반강제(半鋼製) 보기 대차를 적용한 차량의 도입과 시내 정거장의 무정차 통과 등으로 경쟁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 했고, 무정차 통과의 경우는 교통난을 그나마 완화시키는 정도였다.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차 사업이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시 동원기 때에는 아예 검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량의 개량 또는 노후화된 차량에 대한 교체도 거의 없었다고. 선로와 전기시설은 거의 보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2.3. 해방 이후와 폐선까지 1945년 ~ 1968년


일제가 패망함과 동시에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운영권이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해방 후, 보름 동안은 아예 101대에서 59대까지 반 이상 떨어졌고, 또한 서울시는 인구밀도가 크게 증가함과 동시에 노조 파업, 태업, 사보타지 등이 속출하는 등의 시대적인 혼란이 계속됨에 따라, 1947년에는 아예 하루에 27대만 운행할 정도였다. 이후, 단체 협약 등에 의해, 상황이 호전되면서, 다시 회복되어, 1948년에는 133대가 운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후, 완전히 처참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일단 궤도의 경우, 총 연장 46.204km 중에서, 5.128km가 손실되었고, 차량은 227대 중 104대가 소실되었다. 전차선은 파괴되지 않았는데 없어진 이유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도경찰 소속 서울철도경찰대장이 전선을 걷어다가 고철로 팔아먹었다.''' 상세한 내용은 이 쪽 참조. 게다가 형벌까지 고작 '''징역 6년'''으로 끝났다.
이후, 복구에 착수하여, 1952년 6월 2일에 67대를 투입하여, 한강대교 구간을 제외한 전 구간의 운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응급 복구에 가까운 상황이라, 각종 부품과 자재가 부족하여, 노후화에 따른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전쟁 복구 과정에서 미국은 6월 19일에 전차 40량을 넘기게 된다. 이 중 20량은 부산전차가 사용하고, 나머지 20량을 서울시가 인수하여, 각 노선에 배치하였다. 1953년에는 부속품 구매 자금을 부산전차와 함께 지원 받아 1957년까지 31대를 추가 복구하여 투입하였으며, 1956년에는 추가로 53대의 전차를 지원 받았고, 이 중 36대를 경성전기에서 인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차량의 노후화가 점차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전차 요금이 동결되었고, 전차 사업의 적자가 엄청났다. 시설 또한 응급 복구와 수리에만 치중한 데다, 신차 도입이 거의 없던 수준이었다. 차량의 경우, 213대 중 196대가 내구연한인 20년을 초과한 상태였다. 선로의 내구연한 또한 20년이었으나, 평균 사용연수가 '''38년'''이었을 정도(...). 참고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381호도 196대 중 하나였다. 여기다가 인건비와 도로점용료의 증가로 인해, 적자는 더욱 커졌고, 자동차 등의 승용차가 보급률이 큰 폭으로 증가되면서, 노면전차는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을 유발해, 도로 헬게이트를 유발한다고 '''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적자를 견디다 못한,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민간 매각을 추진했으나, 역시 매수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다(...). 1961년에는 경성전기 등 3사가 합병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력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다시 말해, 경성전기 등의 3사가 한전의 전신이 되는 셈.
아무튼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아직은 자동차가 소수의 부유층들만이 가질수있었던 시절이었고 버스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가 매년 폭증하여 증설한다해도 출퇴근시간때마다 지옥도를 거뜬히 찍었던 상황인지라[9] 별다른 대체교통수단이 없어서 시민의 이동권 문제가 번번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점점 전차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자, 철거 방안이 가시화 되었고,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지하철 건설을 통한 교통난 해소 방안을 내놓으면서 결국 전차 철거가 확정되었다. 불도저 시장, 돌격 시장으로 불리며 서울시 개발에 몰입하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말만 해놓고, 언제 할지 실질적 준비는 전혀 없어서 전차 노조와 시민들에게 신나게 까였다(...)[10].어쨌든 1966년 6월 1일부로 전차 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고, 9월 30일에는 세종로에 지하도를 착공함과 동시에 남대문 ~ 효자동, 서대문 ~ 종로네거리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끝난 뒤 남대문 ~ 효자동 구간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문을 위한 도로 정비로 인해, 콘크리트를 궤도에 덧씌워버리는 바람에 이 구간이 폐선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67년 9월에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1967년 10월 5일에는 전차 요금을 100% 인상을 단행하였고, 나머지 구간은 계속 운행되었다. 그런데,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 땐, 외곽 이설에 대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 관해선 대충 얼버무리고, 철거 계획 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미국 전차 스캔들의 한국판에 가깝다. 사실상 계획을 엎어버린 셈.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옮겨갔으며, 그 외에는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고
'''그리고, 1968년 11월 30일 자정 이후에는 더 이상 전차가 달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1974년 8월 15일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할 때까지 서울시의 대중교통은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광역철도같은것이 존재했을리가 없던 시절이었고, 자가용은 부자들이나 가질수 있었기에 그 기간 동안 서울의 교통은 지옥을 맛봐야했다.
더욱이 지하철 공사로 서울의 주요 도로는 차선의 절반을 통제했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의 서울은 끔찍한 교통지옥
헬게이트가 펼쳐지게 된다.
  • 1963년 서울 전차의 모습


3. 연표



3.1. 대한제국


  • 1898년 2월 19일 -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대한제국으로부터 전기사업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 설립.
  • 1898년 12월 25일 - 경교(서대문) ~ 청량리(홍릉) 간 단선 신설.
  • 1899년 - 종로 ~ 남대문 간 단선 신설.
  • 1899년 5월 17일 - 개통식.
  • 1901년 1월 - 남대문 ~ 구 용산 간 단선 신설.
  • 1901년 7월 - 서대문 ~ 남대문 간 단선 신설[11].
  • 1909년 6월 23일 - 한일가스주식회사에 매각.

3.2. 일제강점기



3.3. 해방 이후



4. 노선


[image]
1941년 완성된 서울전차 노선도[12]
  • 본선 : 청량리 ~ 동대문 ~ 세종로[13]
  • 서대문, 마포선 : 세종로 ~ 서대문 ~ 마포[14]
  • 을지로선 : 을지로 6가 ~ 을지로입구 ~ 남대문[15]
  • 효자동선 : 효자동 ~ 세종로
  • 왕십리선 : 을지로 6가 ~ 왕십리[16]
  • 신용산, 구용산선 : 남대문 ~ 남영동 ~ 한강교, 남영동 ~ 원효로[17]
  • 노량진 ~ 영등포선 : 신용산 ~ 노량진 ~ 영등포[18]
  • 의주로선 : 남대문로 5가 ~ 서대문 ~ 영천(서대문구 영천동)
  • 창경원, 돈암동선 : 종로 4가 ~ 창경원 ~ 돈암동[19]
  • 종로 4가 ~ 을지로 4가[20]
  • 동대문 ~ 을지로 6가[21]
  • 세종로 ~ 남대문[22]
  • 마포 차고지[23]
  • 동대문 차고지[24]
  • 삼각지 차고지[25]
  • 영등포 차고지
노선을 보면 알겠지만, 이 노선의 대부분이 서울 지하철의 노선으로 부활했다.

5. 이설 계획


1967년 9월 20일에 발표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발표된 이설 계획이다.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교통난이 심각한 외곽 지역에 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 영천 ~ 불광동 ~ 갈현동[26]
  • 왕십리 ~ 화양리[27][28]
  • 청량리 ~ 면목동[29]
  • 영등포 ~ 화곡동[30]
하지만 이 계획이 전차 폐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라며 까였고, 건설비 또한 과다하여 실현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고 한다. 차라리 당시 개발 계획이 발표된 여의도로 연장하는 것이 더 나았을 정도.

6. 차량



6.1. 대한제국기


초기에는 일반용 개방형 차량 8량, 귀빈용 차량 1량이 있었고, 이후에도 개방형 차량이 추가로 도입되었다. 차량 중앙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곳이 상등실(특실), 선두부와 후미부는 외벽 등이 일체 없는 곳으로 하등실(일반실)이였다고 한다. 상등실의 경우, 여성이 이용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귀빈용 차량 1량은 고종의 홍릉 행차 시 쓰이던 차량으로, 모양이 상여 같다고 하여, 그리 쓰이지는 않고, 거의 차고에 방치된 모양이다. 사진이나 실물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며, 화차도 있었는데, 역시 자료가 전무하다(...)
일반용 개방형 차량은 사진을 토대로 복원품을 제작하여 경복궁 내의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전시했었는데, 2017년부터는 서울 노원구의 경춘선 철도공원으로 옮겨졌는데 '황실전차'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전시중이다.

6.2. 일제강점기


이 시기에 도입된 차량은 벽체 등이 있는 상자형 차량으로, 현재 보존된 363호, 381호 등이 이 때 도입된 차량이다. 초기에는 2축차가 사용 되었다가, 이후 혼잡 등을 개선함과 동시에 버스 등의 경쟁을 위해, 반강제 보기차가 도입되었다. 381호의 경우는 니혼샤료에서 1930년에 도입되었고, 폐지 직전까지 운행되었다.

6.3. 해방 이후


이 때 도입된 차량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애틀란타 시에서 중고 차량을 양수 받아서 사용했으며, 말기에는 일본 후지샤료 사로부터 신차 도입을 하였고, 여러 차량이 운영되었다. 차량의 구분은 소형, 중형, 대형으로 차량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여, 일차적으로 구분했고, 해방 이후에 새로 도입한 차종은 도입처, 특징에 따라 구분하였다고 한다. 차 번호는 세자리 숫자를 바탕으로 부여했다.
1950년대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애틀란타 시에서 사용되던 전차가 투입되었는데, 노선 폐지나 신형 전차 도입에 따라, 남게된 차량을 원조 형식으로 양수 받았다. 이와 함께 다수의 부품도 도입되었고, 차량 운영을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애틀란타 시에서 양수 받은 차량은 405~424호, 로스엔젤레스에서 양수 받은 차량은 425~464호의 차호를 배정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 후지샤료 사와 차량 도입 계약을 체결하여, 도입했는데, 1963년 5월 30일에는 신차 10대를 도입하여, 부산전차에는 2대를 배정하고, 8대를 배정 받아 노후차를 교체하게 되었다. 1965년에는 80대 도입 계획을 수립하고, 이 중 35대를 도입하여, 소형차와 교체 운행하였다. 하지만, 1968년에 서울전차가 폐지되면서, 이들 차량은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또한 나머지 수량인 45대는 중지된 듯.
1962년 기준으로 살수차 2량이 있었고, 화차도 1량이 있었다. 가끔 '''꽃전차'''라는 이름으로 꽃을 달거나(...) 단장을 하여, 운행하기도 했다[31].

6.4. 도색


도색의 경우에는 노란색-청색, 흰색-청록색, 흰색-청색 도색을 한 차량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특이 도색을 한 차량이 있었다고 한다.

6.5. 보존 차량


  • 서울과학관에는 반강제보기차 363호가 황색-녹색 도색으로 정태보존 되어 있으며, 1970년대 과학관 전시 당시부터 내부 개방을 해놨다고 한다. 그러나 내부 개방이 계속될수록 보존 상태가 안 좋아져서 2010년대부터는 내부 개방을 중지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에는 1930년대에 도입한 반강제4륜보기차 381호가 정태보존 되어있다. 원래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 거의 관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있다가, 2007년 12월 경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하여 18개월 동안 형태복원을 위한 보존작업을 거쳐 2009년에 공개하였다. 초창기에는 주간에 한해 내부를 개방, 자원봉사자가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 2018년에는 설계도면 입수와 추가 조사로 최초 제작된 형태로의 복원이 아닌, 탑승 인원을 늘리기 위해 개조됐던 1960년대 형태로 2단계 복원이 완료되면서 오후 5시까지 상시개방하고 있다.

6.5.1. 복제 차량


  • 대한제국 시절에 도입된 일반용 개방형 차량의 복원품이 경춘선 철도공원에 전시중이다.
  • 2001년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야인시대 촬영세트장인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 촬영용으로 제작된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 전차 2량이 있었다. 전차선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고 차내의 축전지를 통해 움직였다. 2012년 세트장 철거 이후에 방치되어있던 전차 2량은 현재 한국만화박물관 입구로 옮겨졌다. 그리고 합천영상테마파크에 일제시대 종로거리를 재현해 두었는데, 여기에도 촬영용으로 제작된 서울 전차 2량이 있다.
  • 실제 차량은 아니지만 마포역 4번출구 인근 도화동 복사꽃 어린이공원의 화장실이 서울 전차의 모습으로 꾸며져있다. '마포종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잠실 롯데월드몰 5층 옛 서울거리를 재현한 테마식당가 입구에는 서울 전차를 재현해 놓은 모형이 있는데 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가 많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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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젖어 너도섰고 갈곳없는 나도 섰다

강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밤

하나둘씩 불을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서울전차를 소재로 한 노래중에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있다. 마포에 한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미국 유학을 떠나고 유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던 남편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자 그 소식을 모르고 있던 아내는 남편이 귀국한다던 시기에 마포종점에서 매일 기다리다 지쳐 결국 정신병이 오며 종적을 감췄다는 사연이다. 여담으로 여의도비행장(1971년 폐쇄), 당인리발전소(1969년 서울화력발전소로 개명) 등 당시 마포종점의 밤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주인공이자 전학생 한병태에게 같은 반 친구들이 "너 전차 타봤어?"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그 전차가 바로 이 전차다.
2019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전차가 기획전시되고 있다. 그동안 서울전차에 대한 전시가 단 한번도 없었던 점에 대비하면 엄청 많은 자료들이 한 곳에 모였던 특별전시이다. 대부분의 전시품은 개인 소장이거나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었다고, 무료입장에다가 철도박물관 다음으로 철도와 관련된 기획전시이기 때문에 철도박물관의 작태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 우리나라가 이런 기획전시를 못한게 아니라는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
오사카시를 달리던 노면전차인 오사카 시영 전기철도와는 시기와 겪어온 역사가 상당히 비슷하다. 심지어 서울 전차와 동일 기종의 차량이 달리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오사카의 경우 처음부터 시(市)에서 운영했다는 점과 일찌감치 지하철로의 이설을 계획하여 진행하였다는 점.

[1] 폐지 직전 기준.[2] 참고로 히로시마시노면전차를 지칭할때 히로덴이라고 한다.[3] 주미 대한제국공사 출신 친미 개화파로, 한성부 도로망를 정비하고 전기·수도·철도시설 도입, 탑골공원과 경운궁퍼브릭파크를 건립하였다.[4]서울적십자병원 인근. 경교장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5] 현재의 안암역제기동역 사이로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제기동 서울약령시앞에 '보제원 유허비'와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 인근에 '보제원 터' 비석이 존재한다.[6] 헌데, '꼬레아 에 꼬레아니'의 번역자들이 '최초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아시아의 근대도시는?' 목차에서 사진 등의 자료가 없어 애매하지만, 기록상 방콕이 2번째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7] 조령은 황제가 내리는 긴급조치를 말한다.[8]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여지는 대목이다. 1910년 이전부터 이런 일이 비일비재 했으니.[9] 실제로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들어가서였다. 이때의 자동차는 일반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사치품이었다.[10] 참고로 1961년부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질때까지 서울시장을 비롯한 지방단체장은 민선에 의한 선출직이 아니고, 관선에 의한 임명직(대한민국 대통령이 임명)이었기 때문에 서울시가 까이는 것은 정부가 까이는 것과 비슷했다.[11] 이후, 얼마 못 가, 폐지 되었다. 일자는 불명이나, 수요 부족으로 인해, 2 ~ 3년 뒤에 폐지되었다고 한다.[12] 시청앞 아래의 동대문은 남대문의 오기이며, 교남동과 서소문 사이의 큰 점은 서대문이다.[13] 이후 수도권 전철 1호선 청량리역~종각역 구간, 종로 중앙버스전용차로로 부활하였다. [14] 이후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마포역 구간, 마포대로충정로 중앙버스전용차로로 부활.[15] 이후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지로입구역수도권 전철 4호선 명동역~회현역 구간으로 부활.[16] 이후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왕십리역 구간으로 부활.[17] 이후 수도권 전철 1호선 서울역~용산역경의중앙선 효창공원앞역~용산역 구간으로 부활. 전자의 경우 한강대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같은 위치에 생겼다.[18] 이후 수도권 전철 1호선 용산역~영등포역 구간으로 부활.[19] 이후 혜화동로터리부터 돈암동 구간만 수도권 전철 4호선 혜화역~성신여대입구역 구간으로 부활.[20] 이후 수도권 전철 5호선 종로3가역~을지로4가역 구간으로 부활.[21] 이후 수도권 전철 4호선 동대문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구간으로 부활.[22]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 ~ 종각역 구간.[23]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의 그 곳 맞다. 현재의 복사꽃 어린이공원 위치이고 전차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24] 동대문역 8번출구 메리어트 호텔 인근에 동대문 전차 차고터 비석이 존재한다.[25] 현재의 한전 용산창고인 한강로1가 231-30번지로 추정된다.[26] 훗날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 ~ 구파발 구간으로 실현.[27] 폐선 된 경성궤도 부지를 그대로 써먹으려고 했다.[28] 다만, 훗날 서울 지하철 2호선 왕십리 ~ 건대입구 구간으로 실현된다. 건대입구역 개업 당시 역명이 화양역이고, 광진구 화양동에 있다.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화양리.[29] 한때 3기 지하철 계획 10호선의 일부였으며, 현재 서울 경전철 면목선 추진중.[30] 훗날 수도권 전철 5호선 신길 ~ 화곡 구간으로 실현된다.[31] 일본에도 있다. 도덴 아라카와선의 花100형이라던가... 단, 이쪽은 여객은 못 태우고 그냥 장식용이다(...). 이쪽도 가끔 꽃을 달거나 그런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