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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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경주 사자·공작 무늬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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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공작문석(孔雀文石, 공작무늬 돌)과 사자 / 2009.12.28.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7세기~8세기 경 통일신라시대 화강암 각석.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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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매일신문 - 신라 속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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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안압지라고 불리던,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화강암 문양석이다. 연구 결과 제작 연대는 7세기~8세기 무렵으로 확인되었다.
경주 월지에서는 최초 발굴조사 당시 무려 1만 5000여점이 넘는 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불상, 숟가락, 청동거울, 벼루, 송곳, 가위, 건물의 목재 조각, 심지어 유람용 배까지 별의별 유물들이 다 나왔다. 이후 지속적으로 월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2008년 기준 금속공예품 1,152점, 목제품 920점, 철제품 603점, 와전류 24,353점, 토기류 3,388점, 기타 2,171점 등, 총 32,587점에 이르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추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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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바위 돌은 신라시대 당시 안압지 주변에 꾸며놓은 조경석 중 하나였으며, 원래는 이러한 조경석, 석조다리, 석재난간 등이 안압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신라 멸망 후 정확히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두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파괴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이 각석은 그 때의 수많은 조경석 중 하나의 파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경주 월지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현대에 들어 다시 발굴된 것이다.
이 각석의 오른쪽 제일 작은 원의 내부에는 사자가 커다란 잎이 달린 나무 한그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에는 가장자리에 구슬 무늬 띠를 돌린 후 그 안에 나무 한그루를 사이에 두고 공작새 두 마리가 좌우대칭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어 마치 먹이를 쪼아먹는 듯하다. 왼쪽의 가장 큰 원은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으며, 가장자리에는 구슬 무늬 띠가 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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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 고구려 고분은 왜 페르시아 양식을 닮았을까
구슬 무늬 띠가 돌려진 사자, 공작무늬는 연구 결과 고대 페르시아 지역(현재의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지역)에서 유행하던 문양으로 확인되었다. 이 무늬는 기원전 로마 제국의 동전에서 처음 출연한 이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지역으로 이어져 계속해서 사용됐으며,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에 수용되어 '신성한 빛'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은 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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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양의 발견은 7세기~8세기(서기 600~700년 경) 신라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방의 문물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었으며, 교류 범위도 아시아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 신라가 다양한 문화의 집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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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300~1,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석재 조형물로, 당시 신라의 석조공예술 및 해외 교류 활동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경주 사자·공작 무늬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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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공작문석(孔雀文石, 공작무늬 돌)과 사자 / 2009.12.28. 국립경주박물관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7세기~8세기 경 통일신라시대 화강암 각석.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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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매일신문 - 신라 속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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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안압지라고 불리던,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화강암 문양석이다. 연구 결과 제작 연대는 7세기~8세기 무렵으로 확인되었다.
경주 월지에서는 최초 발굴조사 당시 무려 1만 5000여점이 넘는 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불상, 숟가락, 청동거울, 벼루, 송곳, 가위, 건물의 목재 조각, 심지어 유람용 배까지 별의별 유물들이 다 나왔다. 이후 지속적으로 월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2008년 기준 금속공예품 1,152점, 목제품 920점, 철제품 603점, 와전류 24,353점, 토기류 3,388점, 기타 2,171점 등, 총 32,587점에 이르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추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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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바위 돌은 신라시대 당시 안압지 주변에 꾸며놓은 조경석 중 하나였으며, 원래는 이러한 조경석, 석조다리, 석재난간 등이 안압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신라 멸망 후 정확히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두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파괴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이 각석은 그 때의 수많은 조경석 중 하나의 파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경주 월지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현대에 들어 다시 발굴된 것이다.
이 각석의 오른쪽 제일 작은 원의 내부에는 사자가 커다란 잎이 달린 나무 한그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에는 가장자리에 구슬 무늬 띠를 돌린 후 그 안에 나무 한그루를 사이에 두고 공작새 두 마리가 좌우대칭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어 마치 먹이를 쪼아먹는 듯하다. 왼쪽의 가장 큰 원은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으며, 가장자리에는 구슬 무늬 띠가 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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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 고구려 고분은 왜 페르시아 양식을 닮았을까
구슬 무늬 띠가 돌려진 사자, 공작무늬는 연구 결과 고대 페르시아 지역(현재의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지역)에서 유행하던 문양으로 확인되었다. 이 무늬는 기원전 로마 제국의 동전에서 처음 출연한 이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지역으로 이어져 계속해서 사용됐으며,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에 수용되어 '신성한 빛'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은 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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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양의 발견은 7세기~8세기(서기 600~700년 경) 신라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방의 문물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었으며, 교류 범위도 아시아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 신라가 다양한 문화의 집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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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300~1,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석재 조형물로, 당시 신라의 석조공예술 및 해외 교류 활동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