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황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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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軍人皇帝時代 / Military Anarchy'''
'''3세기의 위기(Discrimen Tertii Saeculi)'''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로마 제국 각지의 군대가 자기들 멋대로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한 시대. 이 시기가 3세기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3세기의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라고도 칭하기도 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죽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는 사이의 49년간 '''18명의 황제가 즉위했던 기간.''' 이것도 그나마 공식 황제만 따지면 18명이지 공동 황제까지 일일이 다 치면 20명은 가뿐히 넘어간다. 심지어 전염병에 걸려 병사한 클라우디스 고티쿠스와 노령으로 죽은 타키투스를 빼면 '''이 기간 동안의 황제 대부분이 타살로 죽었다.'''[1] 평균 재위기간은 2.7년이지만 '''15년'''[2] 이나 황제자리에 있던 갈리에누스같은 케이스도 있나하면 '''15일''' 만에 죽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있는 등 재위기간의 편차가 큰 편이었다. 오현제 시대[3] 가 끝난 뒤 내부로 곪아가던[4][5] 로마 제정이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린 시기.
상술한 것처럼 학계에서 '''3세기의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라고 하고 있고, 실제 로마 제국은 전방위적으로 위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 당시 제국은 이전 시대와 비교해 내외적으로 진짜 심각한 상태였다. 외부로는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를 막느라 막대한 국방비와 제국 군대의 인적자원들이 소모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제국의 지휘계층이던 원로원 계급의 정치력이 약화되고 그 자리를 기사 계급이 장악하는 제정 이후 변화된 상황이 가속화되는 것에 더해 프라이토리아이로 대표되는 군부세력의 입김이 어느 시대보다 강해지는 현상이 일상적이 됐다. 따라서 기존 원수정 체제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해졌고, 프라이토리아이 외의 제국 각지의 군대의 힘도 커지게 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제국 내외가 이렇다보니 치안은 자연스럽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악화되었고, 재정 역시 여기저기 들어갈 돈은 늘어나게 되자 당연히 온갖 세금을 뜯어대다 보니 국내 상업이 쇠퇴하고 황제로 대표되는 정계가 민심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대두하고 그 과정에서 몇명의 황제들은 이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칙령을 반포하고 실제로 탄압(박해)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다만 걸러 들어야할 건 '''로마 내 모든 속주가 흔들렸던 건 아니었다.''' 물론 세금은 공통적으로 뜯어갔으니 돈문제는 전국이 겪었겠지만 전국이 전쟁터가 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긴 했어도 게르만족과 이 당시 로마 제국은 문화차이가 극명했다.[6] 또 나라꼴이 막돌아가다보니 여러 산업들이 쇠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마와 비교하면 야만족이나 다름없는 수준인 게르만과 비교대상이 될 정도로 처참하진 않았다. 이런 연구결과들이 속속 밝혀지다보니 고고학자들은 전쟁터 최전방이 된 속주들은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던 반면 전쟁과는 무관한 지역인 속주의 사람들은 '뭐임? 갑자기 돈 왜 이렇게 뜯어감?'이라는 정도의 감상만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고대시대가 애초에 남겨진 기록이 적어 전수조사가 불가능한 만큼 실제로는 어느 쪽이 맞는지 확답하는 건 현대의 기술력으론 불가능하다.
2. 상세
워낙에 내전이 잦았던 시대고 이후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제국 경제의 순환 상태에 대단한 장애를 주었고, 이것이 다시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곤 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3세기의 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독한 정국 불안정을 꼽지만, 사실 이는 그녀가 그렇게도 애찬하는 로마식 제정체제에 내재한 모순이었다. 3세기의 위기가 반세기나 이어진 현상이 된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의 대두를 꼽는 것도 18~19세기 학설에 불과하며,[7] 이런 단순한 분석은 20세기 중반 넘어 이미 학계에서는 타파된 방법론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유물론적, 그리고 사회과학적 해석을 도외시하며, 다른 부분에서는 공학적 면을 강조하지만 그건 자기가 맘에 드는 부분에 한하기에 이 점에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세기의 위기의 원인은 점점 로마 사회를 본받아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쌓아가고 있던 야만족 사회의 성장과, 로마 제국 체제 자체의 한계 수익성 악화 이 둘로 압축된다. 더 요약하자면 외부 상황은 변화하며 가혹해지는데 그에 대처하는 내부 역량은 약화된 상태로, 이 두 가지 문제점에 대응하는 것이 당대 로마 사회의 최대 과제였다.
사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로마에서 내전은 수십 년 주기로 자주 일어났고, 군인 황제 시대 이전에도 병사들이 전선을 시찰 나온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하극상을 일으켜 죽여버린다든가, 근위대가 황제를 암살한다든가[8] 하는 등 이미 징조가 있었다. 애당초 황제라는 지위는 호민관 권한을 쥔 제1권력자 정도여서 군대가 자신들이 따르는 장군을 황제로 지지하고 원로원의 승인만 얻어낸다면 쉽게 황제가 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성씨만 제위를 이을 수 있는 동양의 전제군주정에 비해 로마 황제 계승 시스템의 큰 문제점이었다.[9]
게다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상황이 매우 안 좋았던 시기로 밖으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의 침공이 점점 거세어지는 데다 경제적으로도 은화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대농장을 돌릴 노예의 공급이 멈추게 된다.[10][11]
그 시기에 그런 단점이 크게 돌출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완 전혀 무관한 극히 우연적인 몇 가지 요소가 원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킨 대가로 후기 로마 제국이 그전 로마 제국의 유연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실상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그녀가 말하는 유연성이란 체계적인 관료제 운영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무질서한 황위 계승 방식을 고집하면서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은 그만두란 얘긴데, 사실 3세기의 위기는 그런 게 미비했던 내부 상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응을 못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전통에 대한 이상한 강박적인 집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대응을 늦춰서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가며, 로마인들도 슬슬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여러 대응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4세기의 경제 회복과 체제 안정화. 로마 제국이 3세기에 이런 과제들을 그저 손놓고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며, 그 해결책들을 종합해서 본격적인 체제 수술에 들어간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지만 그런 작업들도 3세기의 황제들이 이미 한 여러 조치들의 선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게다가 테트라키아 이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의 체제변화로 인해 제국 동부는 동로마 제국으로 무려 11세기를 더 존속할 수 있었다. 서부는 경제력부터가 동쪽에 비해 약해서 150년 만에 멸망해버렸지만.
결국 이 50년에 육박하는 군인 황제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제 제도를 두어 질서를 되찾는 듯 하면서 끝나는 듯 싶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위가 끝난 후 다시 황제들끼리 내전이 일어난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누르면서 로마의 혼돈은 잠시 진정된다. 이후 로마의 황제는 전제 군주로 바뀌어가고 제국 내에는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지만, 이후로도 로마의 황제 암살이나 군부의 황제 교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군인 황제 시대의 등장은 로마의 행정 체계가 전 세계가 로마로 대동단결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서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장 황제가 어딘가로 간다하면, 바로 황제가 떠난 자리에서 "'''황제 내놔!'''" 하고 난리가 나는 판이었다.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로마인과 로마화되어가는 야만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100% 로마화된, 로마로 대동단결한 하나된 로마인들의 나라였고, 게르만이니 뭐니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판에 이른 상태로, 그야말로 제대로 된 세계 보편 제국에 이른 상태였으나, 로마의 행정은 이런 보편 제국 개념에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 문제는 오현제 시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이미 다키아 원정이라는 대원정에서 전 지중해 세계가 다키아로 가는 장관을 연출한 시점에서 이미 로마가 더이상 과거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없는, 세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세계 정부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음을 보인 바가 있었고, 원수정의 매우 큰 문제인 너무 쉬운 황제 옹립과 행정체계의 부실로 인한 각 속주들의 "황제의 관심 요구"가 겹처진 결과, 사방 팔방에서 황제가 튀어나오게 되는 막장 사태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나락에 빠진 원인을 상세하되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홉 줄로 정리 가능하다.
- #1 - 로마의 영토 확대(전쟁의 장기화, 값싼 곡물 공급, 은화의 질 하락)
- #2 - 로마의 전쟁 심화(왕국 혹은 민족 단위의 존폐 전쟁 심화, 로마 외부 세력의 사회 체제 및 대단위 전투 수행 능력 향상)
- #3 - 중산층 몰락(대농장주들의 자영농 핍박, 군대 사병화 징조, 무산 계급의 대두)
- #4 -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군대 내의 절대 권력자 형성, 불길한 하극상과 새로운 형태의 내전 징조)
- #5 - 로마의 행정 한계성(로마가 자국의 세계화에 대처 불가능, 지극히 단순하고 원시적인 세금 제도[12] )
- #6 - 로마의 외치 한계성(발전하는 외세의 침공과 군대의 기강 저하에 대한 대처 불가능)
- #7 - 로마의 내치 한계성(대국적 혼란(#4 + #5~6)이 낳은 새로운 형태의 내전에 대한 대처 불가능)
- #8 - 로마 특유의 유연성 저하(전쟁 장기화↑+군대 하극상↑+행정↓+전쟁↓+정치↓+경제↓ = 노답)
- #9 - 3세기의 위기(악재(#5~8)의 반복)
3. 해당 시기의 로마 황제
3세기 가운데 235~284년 집권한 황제들의 대체적 연표와 중요한 이정표적 업적을 나열한다. 악행이나 실수는 워낙 다루는 곳이 많아서, 해당 황제의 목록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군인 황제'들을 살펴보면 자질이나 능력이 생각보다 역량이 뛰어난 인물도 많고, “난세만 아니었다면...”라고 부를 정도로 불운한 황제들이 생각보다 많다. 즉, 이미지와 달리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자는 적다. 다만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거나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 등의 일이 터진 경우가 많아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제거당한 경우가 꽤 많다.
이는 그전 시기와 그 후 시기를 살펴봐도 드문 일이며, 제위 계승 시스템이 극도로 불안정하지만 반면 나태하거나 현실안주형 군주는 오래 못 가는 로마 특유의 황제 계승 시스템의 장단점이 극도로 표출된 시기인 게 원인이다. 그리고 정말 이들이 군인 황제였는지도 의문시 되고 있다.
사실 소위 군인 황제라고 칭해야 하는 기간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즉위한 대대장 출신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와 갈리에누스 사후 일리리쿰 출신들이 연달아 황제가 되는 시기 외에는 많은 황제들이 원로원 계층이었고, 생각 외로 이름난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들도 꽤 보인다[13] .
그러나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들을 보면 알듯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부터 사두정치 황제까지 일부를 제외하고 죄다 발칸 반도 출신 군인이 많고,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황제가 대다수라고 해석한다면 ‘군인 황제 시대’라는 것은 말이 된다. 이들 중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는 몇 없었고 그들마저 단명했다. 특히 발레리아누스 이후로는 타키투스만이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이고 그마저도 패닉에 빠진 군대가 원로원에게 황제 선출을 떠넘겨서 세워졌다. 그리고 이들 군인 황제는 이미지와 달리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쪼개질 뻔한 제국을 구했으며 개혁도 해냈다.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5~238, 암살)
로마 제국 최초의 순수 군인 출신, 그것도 현직 대대장으로 군의 추대를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다. 간단히 말하면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을 연 1번 타자. 이름만 보면, 트라키아 지방을 정복한 군인 황제 같지만 트라키아 태생이라서 트라쿠스라고 불린 황제다. 현역 군인으로 있던 시절에 활약했던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3년 동안 라인강 유역의 게르만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성과를 냈지만, 원로원과의 관계도 최악인 데다 서민들에게도 지나친 세금 인상과 물자차출로 인기가 없었다.
3세기의 위기 중 첫 번째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의 황제들. 원로원이나 지역 주민들이 세금을 마구잡이로 뜯어가는 막시미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황제들로, 모두 원로원 의원이었다. 카르타고에서 북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옹립된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전승 기록과 달리 오현제와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터키 지역 태생의 신참자 출신이다. 반면, 이탈리아 로마에서 원로원에게 공동황제로 옹립된 푸피에누스[14] 와 발비누스는 모두 원로원 계층의 세습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카로 종종 비공식적 왕조 중 하나인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묶여 서술되기도 한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공동황제로 옹립될 당시, 로마 민중들의 추대로 카이사르 칭호를 얻었고 두 황제가 병사들에게 로마 시내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뒤 단독황제가 됐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근위대장이던 장인이 갑자기 죽은 뒤 멘붕 상태에서 교전 중 암살(또는 전사)됐다.
- 필리푸스 아라부스(244~249, 자살)
로마제국 천년제를 주최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 별칭처럼 아라비아 태생의 베두인족 출신이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 출신으로 소년 황제를 암살한 배후로 알려져 있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후임자 데키우스가 조직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했다는 고대 전승 기록이 있다.
- 데키우스(249~251, 전사)
3세기부터 등장한 발칸 반도 태생의 로마 황제 1번타자. 로마 황제 중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한 최초의 황제인 탓에 4세기 이후 평가가 현재까지도 극과 극으로 갈린다. 발칸반도로 침입한 고트족을 막다가 공동황제였던 장남과 함께 출전했다가 최초로 전사한 로마황제다.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251~253, 암살), 아이밀리아누스(253, 암살)
데키우스 전사 후 연이어 즉위한 황제들로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혼란기를 잘 보여주는 시기 제위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전자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에트루리아계 로마귀족이었고 후자는 말 북아프리카 속주의 섬에서 태어난 토착민족 태생에 미천한 가문으로 태어나 자신의 능력 하나로 황제까지 된 사람이다. 갈루스는 자신이 지지하던 데키우스 전사 후 옹립됐는데 고트족과의 협상에서 연공금을 비롯해 로마인 포로를 내주는 등 각종 굴욕협상을 했고, 귀국 후 전염병이 터진 탓에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 신경쓰게 된 까닭에 욕을 많이 먹었다. 따라서 데키우스 부자가 전사한 위기상황 속에서 나름 노력했어도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군을 재정비해 반격 후 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해 갈루스와 내전을 벌였고 결국 패전 후 암살당했다. 하지만 승리한 그 역시 석 달 만에 갈루스의 동료이자 지지자인 발레리아누스 부자가 군의 추대로 즉위해 이탈리아로 들어오면서 다시 내전이 벌어졌고 아이밀리아누스 역시 갈루스처럼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3세기의 위기 중 가장 큰 위기. 두 사람은 부자 관계로 갈루스처럼 공화정 이래 에트루리아계 노빌레스를 대표한 명문귀족이었고, 그 가문은 크라수스를 배출한 리키니우스 가문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그 능력만 보면 훌륭했지만 동쪽, 서쪽에서 계속 밀려오는 외적의 공격 탓에 장남 갈리에누스와 협동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어 7년 내내 동방으로 건너가 거의 전쟁만 치뤘다. 그러다가 그는 에데사 전투 중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에게 붙잡혀 최초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가 됐다. 아울러 갈리에누스 역시 아버지가 포로가 된 이후 서방과 동방에서 밀려오는 외적들 탓에 욕은 욕대로 먹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이들 부자 시대 때 로마 제국은 사실상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3분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마군의 대대적인 전술 교리 개편이 바로 이들 부자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 시기 때 성장한 일리리아계 장교집단들은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뒤 연이어 3세기 군인황제들로 즉위했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268~270, 병사)
클라우디우스 2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후 로마시민권자가 된 집안 출신으로 일리리아계 장교집단 중 첫 번째로 즉위했고, 갈리에누스 암살 후 벌어진 혼란을 막는 데 주력해 야만족을 크게 격파하고 어느 정도 로마 제국의 교통정리를 했다. 여담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작성된 믿을 수 없는 책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어머니가 이 황제의 조카라고 한다.
-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암살)
순수 군인 황제 중 평이 좋은 일리리아 삼총사 황제 중 한 명. 갈리에누스 시대에 배출된 일리리쿰 태생 초엘리트 장교 집단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즉위 후 특유의 성실하고 엄격한 성품으로 제국의 기강을 잡고 로마시의 성벽 건설. 삼분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무너져가던 제국 방비선을 재구축하여 3세기의 위기를 어느 정도는 잠재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개인 비서가 비리를 저지른 뒤 이를 감추기 위한 개인적 이유로 어이없게 암살된 탓에 수개월 동안 차기 로마 황제가 결정되지 않았다.
- 타키투스(275~276, 병사)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후 황제로 지명되었을 때 나이가 일흔 다섯이었다. 개인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국고에 돌리고, 목욕탕을 짓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 페르시아 전선으로 이동 중 병사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는 같은 씨족명을 쓰고 있긴 하지만, 후손일 가능성은 낮다. 이와 별개로 타키투스의 저작을 널리 퍼뜨려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게 하긴 했다.
- 프로부스(276~282, 암살)
갈리에누스 시대에 등장한 일리리아 출신의 세 황제 중 마지막 황제. 군사, 정치를 잘 수행했고, 군인 출신 황제 중 생전과 사후 모두 로마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평이 굉장히 좋은 황제 중 한 명이다. 즉위 직후 갈리아 중앙까지 유린하던 게르만족을 모두 물리치고 트라키아 일대를 공격한 야만족까지 제압한 뒤, 포로들과 항복한 게르만족, 퇴역병사들을 제국 각지 도시, 농촌 재건을 위해 정착시켜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전투에만 익숙한 병력들에게 토목공사와 농사를 가르쳐서 농민화를 추진하려던 계획이 현역 병력들에게 지지를 못 얻은 탓에 휘하 병사들의 폭동으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원로원 의원으로 프로부스의 근위대장 출신이던 중 황제가 폭동으로 암살되자 옹립된 황제. 프로부스가 수행 중인 페르시아 원정을 이어받아 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동부 국경에서의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카루스는 숙영텐트에 번개가 떨어져 사망, 같이 참전한 누메리아누스는 마차 안에서 살해된 채 근위대장 디오클레스(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발견됐다. 여담으로 카루스는 대머리였는데, 페르시아 측에게 자신의 머리숱을 소재로 교섭을 위해 온 사절단에게 무섭게 경고한 일화가 유명하다.
- 카리누스(282~284, 암살)
카루스의 아들, 누메리아누스의 형.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내전에서 패한 이유와 무절제한 사생활 탓에 군인황제 시기 황제 중 평이 안 좋은, 가장 악명 높은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황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패배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탓에 정확히 알 수 없다.
-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이어짐.
4. 비공식적 세습왕조들
대중들에게도 난세로 알려진 시대인 만큼 황제가 눈뜨고 일어나면 바뀐 시대지만,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이전 세습왕조와 같은, 항구적 세습왕조 구축 시도를 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세습 시도를 하는 과정을 보면 눈에 띄는 만큼 약육강식으로 계속 제위찬탈만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라면 과거 왕조들처럼 몇 십 년 이상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황제와 그 가문이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사 연구 학자들 중에서 일부는 몇몇 황제들을 묶어 세습왕조로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밑의 왕조는 비공식적인 명칭일 뿐이다.
- 고르디아누스 왕조: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
[1] 전사한 것은 양반이며 독살, 암살로 죽은 경우나 그런 위협을 버티다 못해 그대로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2] 단독재위만 칠 경우 그 절반정도인 8년[3] 5명의 현명한 황제(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다스리던 시기로 3세기의 위기와 대조적으로 로마 최전성기라고 불리며 후세의 평가도 후한 편. 다만 3세기의 위기의 예고편을 찍던게 이 시대의 옥의 티이기도 하다. 사실 이 때부터 게르만족이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외세의 위기로 접근해왔다.[4] 오현제 시기~3세기의 위기의 사잇구간인 시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도 내전이 빈번한 심각한 시대였다. 그리고 이 기간이 무려 70년. 오현제 이후 곪아가던 기간도 길었다.[5] 게다가 이 사잇구간을 이루는 두 시대는 다름아닌 (순번대로) 다섯 황제의 시대와 세베루스 왕조였는데 이중 전자는 황제 칭호가 경매 매물로 올라오질 않나, 3년동안 황제랑 황제 '''자칭자'''들이 도합해서 무려 5명(황제 2명 + 자칭자 3명)이나 등장해서 암살당하거나 서로 쌈박질해대지 않나 하던 막장 시대였다. 후자가 그나마 전 시대의 혼란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긴 했으나 바루 이후 시대인 3세기의 위기, 즉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면서 로마 제정이 버틸 수가 없다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6] 이게 어느 정도냐면 어떻게든 로마 정규군에 들어간다면 그게 엄청난 영예로 여겨질 정도였다.[7] 어떻게 보면 오히려 3세기의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대두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정설에 더 가깝다. 즉, 인과관계가 거꾸로 된 것.[8] 단적인 예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절조차도 암살당한 황제가 하나(칼리굴라)에 자살한 황제가 하나(네로)이다.[9] 그러나 반면 바로 그랬기에, 바로 어제까지 야만족 족장이었던 자도 제국의 성공한 고관이나 장군을 할 수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로마 시민들의 합의만 얻어내면 로마 황제를 할 수 있었으며, 나태하고 통치에 무책임한 황제는 바로바로 쫓겨나거나 제거되는 뜻 밖의 장점도 있었다. 3세기 황제들의 자질이 다들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건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10] 로마 말기에는 그래서 노예로 운영되던 라티푼디움이 부자유 소작농, 즉 농노로 운영되는 콜로나투스로 바뀌게 된다. 기존의 노예도 일부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는 거의 다 해방시켜 소작농으로 전환했다.[11] 참고로 이들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 참정권 등을 인정받지 못한 대신 병역도 어지간해서는 부과되지 않는 등(실제로 전쟁의 대부분은 기사와 용병에 의해 치러진다) 스파르타의 노예 계급인 헬로트(헤일로타이)와 유사한 측면이 꽤 많다. 다만 헬로트와 달리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생명권 등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차이도 존재한다.[12] 시오노 나나미가 매우 좋아하는 작은 정부의 예시로 엉뚱하게 자주 들어지기도 한다.[13]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14] 고대전승에 따르면 대장장이 아들이었으나 귀부인의 양자가 된 케이스라고 하는데, 20세기 이후 유물, 유적 등을 통해 이탈리아 세습귀족임이 밝혀졌다.[15] 전승된 이야기에서는 암살됐다고 하지만,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 중 전사했다고 한다.[16] 소 발레리아누스인데 형 갈리에누스가 암살될 때 같이 밀라노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로마에서 조카와 같이 살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17] 장남은 요절, 차남은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날 당시 살해됐고 막내아들은 로마에서 숙부 소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또는 아버지와 숙부가 밀라노에서 암살된 직후 로마에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