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아
Antonia
1. 서양 여성 이름
안토니아(Antonia)는 이탈리아의 고대 로마 시대 안토니우스 가문에서 기원한 여성 이름이다. 남성형 이름은 안토니오(Antonio).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에서 여성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이 이름은 “찬미(讚美)”, “아름다움”을 뜻을 담고 있다.
2. 고대 로마의 여성 황족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 장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매의 이름이다. 이름이 모두 안토니아라서 자매 중 첫째는 대(大) 안토니아, 둘째는 소(小) 안토니아라고 구분해 부른다.
2.1. 대(大) 안토니아(BC 39 ~ AD 32)
영어로는 안토니아 더 엘더(Antonia the Elder), 안토니아 메이저(Antonia Major)라고 불리며 풀네임은 율리아 안토니아(Julia Antonia)이다. 로마 내전 당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상호 우호 등을 위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친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낳은 두 딸 중 장녀이다.
아버지 안토니우스가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에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자살한 이후, 어머니와 이복 오빠 율루스 안토니우스, 동복여동생 소 안토니아와 함께 외삼촌 부부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일원으로 거둬졌다. 대 안토니아는 이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보호를 받으며 황족으로 대우받았으며, BC 22년경 명문귀족가문의 자제이자 장군이며 전차기수[1] 로도 상당히 유명했던, 젊은 귀족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혼인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고 이중 1남 2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 :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해 퀸투스 하테시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첫번째 남편과 사별 후, 아시아 총독을 지냈던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와 재혼했다. 조카뻘인 소 아그리피나와 상당히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조카 네로가 즉위한 뒤, 네로에게 조작된 근친상간 루머와 주술 등을 이용해 저주를 사주했다는 이유로 먼친척인 살리누스 부자와 함께 반역죄로 고발됐다. 이때 그녀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조카의 명에 따라 강제로 자살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됐다.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32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5대 황제 네로를 낳았다. 평판이 안 좋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 덕에 안 좋은 평판을 듣고, 죽을때까지 각종 비방성 소문에 시달렸다면, 이 사람은 진짜 막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가문의 권세와 어머니가 황족이라는 점을 믿고 국고 횡령, 폭행, 협박,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 도박,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기 중독, 고리대금업 등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까닭에 결국 이모 소(小) 안토니아의 시아주머니이자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직접 국고 횡령 등으로 기소돼 재판 후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내의 오빠인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죄인들을 사면시켜줄때 석방됐다. 그는 아들 네로가 2살이 되던 40년 사망했다.
-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 : 모계 친척이자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의 명문귀족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와 결혼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메살리나 발레리아를 낳았다. 이후 그녀는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와 재혼해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클라우디우스의 사위)를 낳았다. 이후 사위인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직후, 명문가인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아피우스 유니우스 살리누스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2.2. 소(小) 안토니아(BC 36 ~ AD 37)
영어로는 안토니아 더 영거(Antonia the Younger), 안토니아 마이너(Antonia Minor)라고 불린다. 본명은 동복언니와 풀네임이 똑같은 율리아 안토니아(Julia Antonia)이다. 로마 내전 당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상호 우호 등을 위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친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낳은 두 딸 중 차녀이다.
출생일이 명확하지 않은 언니와 달리 태어난 장소와 생일 등이 상당히 자세히 알려져 있다. 소 안토니아는 BC 36년 1월 31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이후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에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안토니우스가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에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자살하자, 어머니와 이복 오빠, 동복언니와 함께 외삼촌 부부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일원으로 거둬졌다.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정숙하고 교양이 풍부했다. 또 상당히 예쁜 미녀인 까닭에, 어머니와 아우구스투스 부부에게 예쁨을 받았다. 친자녀가 외동딸 율리아 밖에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가 낳은 조카들을 친자녀처럼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조카인 소 안토니아를 아주 아꼈다. 외숙모 리비아 드루실라 역시 남편처럼 소 안토니아를 예뻐했고, 일찌감치 소 안토니아를 자신의 둘째 아들 대 드루수스의 배필로 점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리비아는 결혼결정권을 쥐고 있던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해 두 사람을 결혼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편은 외삼촌의 양아들이자 외숙모의 둘째아들인 대 드루수스이다. 소 안토니아는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지만 이중 세 자녀(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리빌라) 만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안토니아 부부의 아들과 손자, 외증손자는 모두 티베리우스 사후 연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다. 이들이 바로 칼리굴라(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셋째 아들), 클라우디우스(소 안토니아 부부의 막내아들), 네로(입양손자이자 장남의 외손자)다.
정략결혼으로 대 드루수스와 결혼했음에도 남편과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하며, 남편의 임지가 있는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으로 함께 떠나 아이들을 낳고 손수 젖을 먹이고 키워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 안토니아가 26살이었을 무렵, 남편 드루수스가 29살의 나이에 개선식을 앞두고 게르마니아 땅에서 낙마사로 요절했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 로마로 돌아온 조카에게 외삼촌 아우구스투스는 수 차례 재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소 안토니아는 황제였던 외삼촌의 강압적인 명령을 모두 거부한 채 아이들을 홀로 키웠다. 이때 다른 황족 여성들이나 상류층 귀부인들과 달리 어떤 뜬소문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정절을 지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그녀는 두 황제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었고, 로마의 인질로 유학온 동맹국 왕자들과 게르만 족장들의 아이들의 기숙사로 그녀의 저택 일부가 선정돼 그녀가 살아있던 시절 내내 인질들의 기숙사로 이용됐다.
세야누스의 전횡 당시, 딸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합심해 소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등 율리우스 일가 남성들을 제거했다. 이때 세야누스 일당은 리비아 드루실라 사후, 어떤 보호자도 없게 된 율리우스 가의 미성년자 가이우스(칼리굴라)마저 죽이려고 했다. 당시 가이우스는 할머니 안토니아와 함께 살고 있었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안토니아 가족을 철저히 감시했는데, 이런 감시 속에서 안토니아는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똑똑하고 충직한 노예 팔라스에게 자신의 친필편지를 준 뒤 카프리 섬에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그녀는 티베리우스에게 죽은 남편과 장남의 마지막 혈육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으며, 팔라스 역시 마음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황제에게 모든 정황을 전해 막내손자를 살릴 수 있었다.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했는데, 세야누스의 전처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기 전 “전남편 세야누스가 리빌라와 불륜관계를 맺고,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독을 먹여 급사하는 방식으로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따라서 안토니아의 친딸 리빌라가 했던 범죄들이 드러나게 됐다. 이때 디오 카시우스 등에 따르면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며느리 리빌라를 그냥 처형시키지 않고, 피해자이기도 한 소 안토니아에게 보내 처분을 맡겼다. 리빌라는 소 안토니아의 집으로 끌려 왔는데, 누구보다 믿었던 딸이 저지른 악행들에 분노한 소 안토니아는 리빌라에게 그냥 자살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두 손자와 며느리가 고통받았던 방식 그대로 리빌라에게 되돌려줬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안토니아는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친딸을 그녀의 방에 가둔 뒤 물 한모금도 못 주게 해 굶겨 죽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가 목숨을 걸고 살린 손자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손자에게 각종 영예를 선사받았다. 하지만 멀쩡하던 손자가 중병으로 쓰려졌다가 깨어난 이후, 고종사촌관계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의심해 처형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칼리굴라의 할머니, 동시에 게멜루스의 외할머니가 되는 안토니아만이 게멜루스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열병 이후 권력과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게 된 칼리굴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눈 앞에서 친손자가 외손자를 죽이는 동족상잔을 보고 크게 상심한 안토니아는 얼마 안 가 화병으로 쓰러져 사망하고 만다.
젊은 시절 남편이 남긴 세 아이들에게 기대치가 상당해 몸이 편치 않은 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상당히 쌀쌀맞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그녀의 막내 아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에 올랐는데, 그는 오늘날 평균 이상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아들 클라우디우스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도 죽은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리워했다. 따라서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만이 생전에 누린 아우구스타(황후)의 명예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선사하고 매년 부모를 기리는 축제를 개최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태어나 티베리우스의 제수씨이자 동생 드루수스의 아내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오랜기간 생존했음에도, 자신의 딸이 사위를 독살하거나 다른 손자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손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등 온갖 못 볼 꼴을 다 지켜봐야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클라우디우스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주인공 클라우디우스에게 차갑게 대하면서도, 가문의 상쟁 등 여러 위기 상황에서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는 여장부로 묘사된다.
3. 로마 가톨릭의 성녀
축일은 4월 29일. 히스파니아의 주교 성 아가피투스(Agapitus)와 성 세쿤디누스(Secundinus)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에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역)의 키르타(Cirta)로 추방된 후 순교할 때, 함께 순교한 동정녀이다. 이때 성녀 테르툴라(Tertulla)와 쌍둥이 자녀를 둔 한 여인도 함께 순교했다고 한다.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순교자도 로마 순교록에 언급되고 있으며, 행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