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몽 드 픽퀴니

 


1. 개요
2. 생애


1. 개요


고르몽 드 픽퀴니(Gormond de Picquigny : 1069년 ~ 1128년)는 1118년부터 1128년까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였다.

2. 생애


고르몽은 같은 이름의 아버지 고르몽(Gormond de Picquigny)과 아내 아델(Adele)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로 아미앵의 주교 대리 외스타슈 다미앵(Eustache d'Amiens)과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참전 기사 아르눌 드 픽퀴니(Arnoul de Picquigny)가 있었다. 고르몽은 아르눌과 1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예루살렘 왕국에서 성직자로 지내다가 1118년 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가 선종하자 그를 대체하기 위해 선출되었다.
당시 십자군은 무슬림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1120년 고르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2세과 함께 나블루스에서 공의회를 회합한다.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선포된 조항은 일종의 우트르메르 교회와 십자군 국가 간의 일치를 보여준다.
고르몽은 약 1119년에서 1125년 사이에 왕국 내 대규모 작물 수확의 실패와 무슬림의 위협이 계속되자 지속적으로 유럽에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성묘 교회를 지키던 성묘 수도회의 수도원장 제라드(Gerard)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주교인 디에고 겔미에즈(Diego Gelmírez)에게 원조 요청 편지를 쓴다. 당시 산티아고는 디에고가 40년 가까이 봉직하면서 또 다른 크리스찬이슬람의 서부 전선이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성공적인 레콩키스타 운동을 전개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이상적 모범이었다. 도움 내용은 대부분 식량과 금전, 예루살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 원조였다.
그러던중 1123년 4월 18일 보두앵 2세가 무슬림에게 생포당하는 변고가 생긴다. 왕이 무슬림에게 구금되는 변을 당하자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보두앵 2세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고르몽은 고위 성직자와 영주들을 대의회에 호출하여 섭정(Bailliff)으로 당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돈과 카이사레아(Caesarea)의 영주 외스타슈 그레니에(Eustace Grenier)를 선출했다. 같은 해에는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무역 동맹을 체결, 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항구들을 대항하는 베네치아 해군력의 보조를 받았다. 1124년 7월 7일 고르몽이 십자군 부대의 총사령관을 맡아, 베네치아 해군의 조력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레반트의 무슬림 항구도시 티레를 하루만에 점령한다.
보두앵 2세는 당시 무슬림 군주들에 이리저리 전리품처럼 떠돌다 티무르타쉬의 수중에 있었다. 무슬림은 분열 상태였고 그는 고르몽과 면식이 있는 샤이자르(Shaizar)의 군주에게 국왕의 석방을 중재를 부탁했다. 고르몽은 그 협상에서 그들에게 8만 디나르를 지불하고 아타리브, 자다나, 아자즈 및 다른 안티오키아 공국의 요새를 티무르타쉬에게 양도해야 했다. 또한 그들과 적대 관계였던 무슬림의 베두인 군벌들을 상대로 티무트타쉬를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보두앵 2세는 몸값의 4분의 1이 지불되고 12명의 인질(보두앵 2세의 막내 딸 이오베타 드 레텔과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1세의 아들을 조슬랭을 포함)이 체납금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티무트타쉬에게 넘겨지면서 1124년 8월 29일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1127년 가을이 되자 보두앵 2세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대의회에서 귀족들과 상의한 끝에 왕국의 상속녀로 지명된 장녀 멜리장드에게 든든한 힘을 제공해줄 것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대 귀족을 초대하기 위하여 기욤 드 뷔르와 기 드 브리세발레를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 때 고르몽은 성전 기사단장 위그 드 파앵과 그의 다섯 동료들을 프랑스로 향하는 사신들과 동행하게 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가 교황청의 정식 인준을 받게 한다.
1128년 7월에 시돈에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