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리장드
멜리장드는 보두앵 2세와 모르피아의 장녀로 태어났다. 원래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국을 다스리던 시절 지역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멜리장드는 아버지가 보두앵 1세의 후계자로 선출되는 13살까지 에데사에서 성장하였다.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를 추천했다. [3] 1130년 멜리장드는 풀크와의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남편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를 두고 풀크와 멜리장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풀크는 야파 백작 위그 2세와 멜리장드의 추문을 문제삼았다. 위그는 보두앵 2세의 충신이었으며 멜리장드의 사촌으로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는 1136년 화해하여 차남 아모리 1세를 낳았다. 멜리장드는 1143년 풀크가 사냥 중 발생한 사고로 사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의 이마드 앗 딘 장기의 군대에게 함락되어 멸망하자 위기를 느낀 멜리장드는 교황에게 자발라의 위그를 특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시작된 제2차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3세가 주도하였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종료되었다.
1152년 성년이 된 보두앵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 하였지만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와 대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멜리장드가 받은 영지는 예루살렘를 비롯해 사마리아, 나블루스 등 보두앵이 받은 영지보다 더 풍요로운 편이어서 보두앵은 불만을 품었다. 결국 보두앵이 남쪽으로 진격한 결과 왕국의 전권을 얻게 되었다. 1153년 모자는 화해하였고 멜리장드가 정치적 조언을 맡기도 했다.
1161년 멜리장드는 뇌졸중으로 기억력이 감퇴되어 더 이상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의 동생들인 트리폴리 백작부인 오디르나(오디른)와 베다니의 수녀원장 이오베타(이베트)가 간호를 맡았다. 그해 9월 11일 멜리장드가 사망하자 그녀의 장남 보두앵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