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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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도 (서아시아 부분)
1. 개요
2. 준비
3. 과정
3.2. 니케아 공략
3.3. 아나톨리아 전역
3.5. 외전1: 킬리키아 진공과 에데사 백국의 성립
3.7. 다시 예루살렘으로
4. 결과
4.2. 외전2 : 안티오키아 공국의 위기
4.3. 외전3 :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
5. 평가


1. 개요


말 그대로 십자군 본대의 첫 번째 원정.
원정 기간은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약 3년 간. 동로마 제국령 유럽을 지나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며 튀르크인들을 격파하고 레반트로 진군, 분열 상태였던 레반트를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가톨릭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2. 준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선동으로 유럽의 유력한 제후들이 원정에 대거 참가했다. 대표적인 이들이 하(下) 로렌 공작인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의 형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그의 동생 베르됭 백작 불로뉴의 보두앵, 사촌 동생으로 부르(Bourcq)의 영주인 레텔의 보두앵, 타란토 공작 보에몽과 사촌 살레르노의 리처드,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툴루즈 백작인 생질(Saint-Gilles)의 레몽 4세, 베르망두아(Vermandois)의 백작 위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블루아(Blois) 백작 에티엔 2세 등 이었다. 물론 이러한 대영주나 활약한 인물들 외에도 중소 영주나 활약상이 미미한 인물들도 많았다.
유력한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총사령관으로 여겼지만, 자존심이 센 귀족들의 연합군인데도 교황은 그 서열과 지휘권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교황이 지목한 지도자가 실패할 경우 질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영주들보다 지위도 높고 군사 지원을 요청한 당사자인 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서 뒷일을 처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을 불러들인 장본인이었음에도, 외세를 끌어들이는 도박수를 던질 정도로 당시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던 황제는 원정 기간 동안 주로 수도와 그 인근에 머물렀다. 때문에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은 레몽과 동행한 교황의 대리인이자 정신적 지주인 르 퓌(Le Puy)의 주교 몽테유의 아데마르(Adhemar de Monteil)였다.
대신 황제는 교황과 긴밀히 협조하며 원정군의 규모와 관련 인사를 면밀히 파악했다. 비록 민중 십자군이라는 통제하지 못한 집단이 있었지만, 교황은 적합한 인물에게서만 성전을 위한 맹세를 받고 성모 승천 축일(8월 15일)을 출정일로 정하는 등 나름대로 원정을 통제했다. 동방에서 요구하는 것은 자질이 부족한 깡패 집단이나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군중이 아닌 통제 가능하고 정예한 군대이기 때문이었고, 9개월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원정군은 물론 동로마 제국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제국 정부는 군수 지원을 위해 육해상의 루트와 스케줄을 미리 설정하고, 행군로 상의 거점마다 물자를 비축함은 물론 상인들에게 시장을 준비시켰다. 십자군의 편의를 위한 통제로 안정적인 물가가 유지되었으며, 현지 주민에게는 이러한 시장 접근이 금지 되었다. 통역을 수배하는 한편 호위와 감시 그리고 제재를 위한 군 부대를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교육시켰으며, 집결지인 키보토스(Kibotos)에는 아예 서유럽인들을 위한 수도원까지 새로 세웠다. 덕분에 십자군은 제국령에 들어설 무렵 미리 준비하고 있던 동로마인들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는 대신, 그 자금으로 시장에서 식량을 비롯한 군수품을 구매하여 무난히 콘스탄티노플로 향할 수 있었다.[1]
최소 3만에서 최대 8만으로 추산되는 대군이 다양한 경로로 들어섰음에도 제국령 유럽이 황폐화 되지 않았으며, 자잘한 충돌은 있었지만 대체로 큰 말썽 없이 신속하게 집결에 성공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철저한 준비와 십자군에 대한 기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교황과 황제가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는 사실 또한 나타낸다.

3. 과정


당시 레반트 정세는 말리크샤, 알 무스탄시르, 부리 왕조 문서 참조

3.1. 콘스탄티노플


가장 처음 도착한 것은 베르망두아의 위그였다.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차남인 그는 불륜 문제로 파문당해 입지가 약해진 형 필리프 1세를 대신한 프랑스 왕실의 대표였다. 오만하기까지한 서신을 황제에게 보낼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왕제(王弟)는 예정대로 1096년 8월에 출발하여 로마시를 거쳐 바리(Bari) 항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려했지만, 그만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함대가 난파되어 거지꼴로 디라히온 항구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디라히온 관구의 도독 요안니스 콤니노스#s-3가 그를 맞이했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마누일 부투미티스 제독을 파견하여 위그를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왔다(1096년 10월 말). 황제는 위그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앞으로 그들이 정복하는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할 것이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병력도 적고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보다 먼저 와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던 위그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한편 고드프루아는 로트링겐(로렌) 지역에 있던 그의 영지를 팔아치우는 등 막대한 재정 손해를 감수하고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삼형제 중 막내인 보두앵을 민중 십자군 때문에 십자군에게 날이 선 헝가리 왕 칼만에게 통과할 때 까지의 인질로 보내 헝가리의 통행권을 얻어냈고, 민중 십자군이 폐허로 만든 베오그라드를 거쳐 베르망두아의 위그 다음으로 빠른 1096년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고드프루아를 황궁에 초대하여 위그와 같은 요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고드프루아는 위그의 선례를 듣고 아예 황제의 초대를 거절했다. 이미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바치고 은혜를 입은 고드프루아로서는 또 다른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로마 황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수도 인근에 타국의 군세가 있는 것이 불안했던 황제는 위그를 보내 고드프루아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고드프루아가 계속 거부하자 그의 군대에게 시장 이용을 금지시켰다. 군수 지원이 끊기자 분노한 고드프루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약탈했고 알렉시오스는 이에 유격대로 대응하는 한편 일시적으로 시장을 열어주며 회유했다. 기다려도 상황에 진전이 없자 고드프루아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의 사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지휘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방비는 매우 굳건했고 동로마군과 싸워 패퇴한 고드프루아는 결국 황제와 타협했다. 1월 20일에 황제를 알현한 그는 충성을 맹세하고 영토를 양도할 것을 약속한 다음에 바다를 건넜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인 보에몽은 1097년 4월 9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디라히온 전투 등 동로마 공격에 종군하면서 아드리아 해 동쪽의 점령지를 상속받았지만, 1085년에 이르면 제국의 반격으로 이탈리아로 완전히 축출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노력 끝에 타란토 공작위와 약간의 영지를 얻었으나, 본래 계승받을 것이리라 기대한 것에 비하면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십자군 선포 직전의 보에몽은 아말피 공화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십자군의 소식을 듣자 보에몽은 이를 중단하고 원정군을 급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달려왔다. 한때 적이었던 그를 동로마인들은 당연히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살레르노의 리처드가 아드리아 해를 건너던 중 동로마 해군을 해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보에몽은 자신이 더이상 적이 아닌 성전군임을 강조하며 병사들을 엄격히 단속했다. 그리고 황제의 초청을 받아들여 위그와 고드프루아가 수락한 서약을 했는데, 그는 한편으로 총사령관직과 일부 점령지를 영지로 줄 것을 은밀히 황제에게 요구했다. 황제는 외교적인 수사로 그것을 교묘히 거절했고 보에몽은 곧 바다를 건너서 4월 26일 소아시아의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나르본 공작이자 프로방스 변경백으로 남프랑스의 13개주를 지배하는 대귀족이었다. 그는 십자군 창설 연설에 감명받아 전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부인과 어린 아들을 비롯한 친족 및 수많은 가신, 성직자들과 함께 출정했다. 교황의 대리인인 아데마르 주교와 동행한 그가 이끄는 군세는 십자군 내에서도 가장 거대했다. 그러나 그는 육로를 택했기 때문에 비교적 고된 행군을 했고, 아드리아 해 동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세르비아인들과 전투를 벌여서 제국령에 이를 무렵의 레몽과 그 부하들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디라히온에서 마케도니아로 향하기 위해 핀도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동로마인들의 오인 공격에 아데마르 주교가 부상당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아데마르 주교는 테살로니키에 머무르면서 요양했고 레몽을 비롯한 십자군들은 먼저 출발, 1097년 4월 21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알렉시오스의 서약 요구를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고,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의 중재도 거부했다. 레몽은 황제에게 직접 친정하여 십자군으로서 참전한다면 서약하겠다고 했고 알렉시오스는 "그럴 의사가 있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란 말로 레몽을 회유했다. 결국 레몽도 좀 더 완화된 서약을 맺고 소아시아로 향했다. 후일 그가 서약 준수를 매우 강조했던 것을 생각하면 황제 앞에서 냉큼 서약을 맺고 이후에 나몰라라한 보에몽과 매우 대조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십자군으로 크게 3인조가 이끄는 노르망디의 로베르, 블루아의 에티엔,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이끄는 십자군이었다. 노르망디공 로베르 2세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동생인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에게 담보로 하여 군자금 1만 마르크를 받아 원정군을 조직했다. 블루아백 에티엔 2세는 종군을 내키지 않아했지만 그의 아내인 윌리엄 1세의 딸 아델라는 남편의 십자군 참가를 독촉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십자군에 합류했다. 플랑드르백 로베르 2세는 그의 아버지 로베르 1세가 알렉시오스와 친분이 깊었던 관계[2]로 출정했다. 이들은 규모는 작지만 졍예한 군대를 이끌었고, 진군 중에 교황 우르바노 2세를 만나 강복(降福)을 받아 아드리아 해 서안에 이르렀다. 배 1척이 침몰하여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그 외의 손실없이 그들은 1097년 5월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다. 그들은 황제의 환대와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함에 넋을 잃었고 손쉽게 충성을 맹세했다. 특별히 허가를 받아 콘스탄티노플을 잠시 관광한 이들은 곧 소아시아를 건너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이러한 식으로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을 환대하고 충성을 맹세받았다. 복잡한 동로마식 궁정 예법을 과감히 생략하고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을 자주 가진 점, 서방식 충성 서약을 요구하는 한편 동방식 칭호나 명예직 수여 대신 무지막지한 선물 공세를 퍼부은 행위 등은 그의 관대함과 서유럽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냉철한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략적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애매한 동상이몽의 상황에서 자칫하면 적대적으로 돌변할 십자군 인사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한편 상하 관계를 정립하고 황제와 십자군 사이의 관계를 공식화한 것이다.

3.2. 니케아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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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이즈니크) 성으로 무슬림들의 수급을 투하하는 십자군
동로마 제국의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2천여의 병력과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함대가 합세한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1차 목표로 삼아 진군했다. 민중 십자군을 손쉽게 쳐부순 바 있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4월경 소식을 듣고는 십자군을 저평가했고, 그의 막료들의 의견마저 비슷했다. 심지어 십자군 본대엔 패장인 은자 피에르가 합류한 상태였으니 기껏해야 전의 공격의 시즌 2 정도로 보일만 했다. 이에 술탄은 십자군이 오는 것을 알고도 수도를 비우고 말라티아 공략을 지속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집결이 거의 끝난 5월즈음, 술탄은 지난번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정예병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경악했다. 술탄은 싸우고 있던 다니슈멘드 가지를 만나 로마인과 그 용병들은 튀르크의 공동의 적이란 사실을 주지시키는 등 명예를 중시하는 그의 성향을 이용하여 휴전을 맺고 니케아로 급히 돌아왔다. 그가 니케아를 구하기 위해 급히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십자군이 니케아를 포위한 후였다. 술탄은 니케아 남쪽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십자군은 5월 21일에 룸군을 격파했다. 술탄은 막대한 재화에 자신의 임신한 부인과 가족들까지 니케아에 두고 달아나야 했다. 어차피 그의 권력기반은 도시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유목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로 옮겼고, 니케아 수비대에겐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니케아 수비대는 공성군의 최고 사령관인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황제는 능수능란한 외교로 수비대의 간담을 서늘케 한 다음 니케아 측에 시민들과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칙서까지 보여주며 십자군을 시내에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6월 19일 새벽을 틈타 니케아의 항구에 동로마 제국 군함들이 정박했고,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니케아를 빠르게 접수했다. 아침이 되자 십자군은 니케아 성벽에서 휘날리는 제국의 깃발을 보고 놀랐다. 중요한 도시를 큰 피해없이 수복한 황제와 성벽 안팎의 신실한 이들은 기뻐했으며, 황제는 십자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많은 재화를 하사했다. 그러나 일부 십자군들은 관습에 따라 주어지는 사흘간의 약탈권을 빼앗겼다고, 신앙심의 문제를 돈문제로 생각한다고, 이교도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왜 피를 흘리지 않은 황제가 성을 차지하냐고 하는둥 다양하게 분개했다. 한편 술탄의 아내는 약속대로 동로마인들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다가 그녀의 친정 스미르니를 지배하는 오라비에게 보내졌다. 그녀의 오라비는 십자군의 소식을 듣고는 술탄을 찾아 스미르니에서 퇴거했고, 그런식으로 술탄의 비는 다시 남편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한편 알렉시오스 1세의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s-2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서둘러 스미르니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선을 장악하고 내륙으로 진공했다.

3.3. 아나톨리아 전역


제국이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수도를 장기간 비울 수 없었다. 때문에 레몽 백작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알레만, 헝가리인, 쿠만인 등 야만족들이 제국을 침략하여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친정할 수 없다'고 변명했다. 대신 황제는 오랜 친우이자 대리인인 타티키오스의 군세를 십자군에 합류시키는 한편, 아직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인사들에게 새로 이를 요구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다.
일주일이 지난 6월 26일, 십자군은 둘로 나뉘어 레반트를 향해 출발했다. 여름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행군하기 고된 곳이었는데, 룸 술탄국의 패잔병들이 지속적으로 청야 전술을 벌이면서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한편 클르츠 아르슬란 술탄은 숙적 다니슈멘드와 동맹을 맺고 지하드를 선포하여 십자군에 맞서려 했다. 이에 많은 튀르크 부족이 호응했다. 십자군이 출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술탄은 군대를 이끌고 고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도릴레온(Dorylaion)에 매복했다. 7월 1일 룸군은 보에몽이 지휘하는 소수의 선봉을 십자군의 본대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기습을 가했다. 그러나 곧 레몽과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본대가 나타나서 술탄의 병력을 협공했고, 술탄은 막대한 재물과 보급품을 두고 다시 패주해야했다(도릴라이움 전투). 십자군은 튀르크군이 버리고간 물자와 술탄의 재보를 약탈해 매우 풍족해졌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이후 뒤늦게 시리아에서 술탄을 돕기 위한 기병대가 달려왔지만 전세는 완전히 기운 후였다. 이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근방의 무슬림들은 큰 충격을 받고 공포에 떨게 되었다.
십자군은 도중에 점령한 이코니온카이세리를 내버려둬가며 약 3개월간 아나톨리아 고원을 행군했는데, 집결지인 키보토스에서 멀어질 수록 보급부족에 시달렸다. 제국령 유럽과 아나톨리아 해안가는 제국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어 이러한 문제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함대가 접근할 수도 없던 새로 수복한 아나톨리아 고원 내륙은 군수 지원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고행과 목적을 들은 현지 기독교인들이 물자를 제공했지만, 그마저도 부족해 행군 후반에는 약탈을 적극적으로 행할 지경이 되었다. 이윽고 1097년 10월 21일,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급품 부족으로 지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의 성벽이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3]

3.4. 안티오키아 공략


곧 4만여명의 십자군이 유서깊은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는 인구 4만에 거대한 성벽과 4백개의 망루를 갖춘 대도시였고 1085년에 튀르크가 점령한 곳이었다. 20만이 넘게 살았던 과거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촌놈들이던(...) 서유럽인들에겐 인상적인 도시였다. 안티오키아의 성주인 야기 시얀(Yağısıyan)은 40년간 셀주크 제국을 섬겨온 사람이었는데, 그의 휘하엔 6천 ~ 7천 명의 병력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지배자이자 사위인 리드완(Fakhr al-Mulk Radwan)과 그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리드완의 형제인 다마스커스의 지배자 두카크(Duqaq)도 형의 기습을 우려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근방 무슬림들의 빠른 지원을 바라기도 힘들었다. 이건 비단 안티오키아의 문제가 아니라 중근동 이슬람 세계 전체의 문제였다. 말리크 샤 1세가 1092년 말에 죽은 이후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후계 다툼과 반란, 내전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바그다드칼리프도 말리크 샤에 의해 1092년에 갈아치워진 상태인데다 셀주크 제국은 파티마 왕조 등의 공격까지 받는 상태였다. 사실상 모든 도시들이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어 명목상의 군주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할 뿐이었고, 이는 무슬림들이 십자군에 거의 대응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티오키아는 점령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강과 산을 낀 성벽의 총연장이 12km에 달해 4만여의 병력으로는 완전한 포위가 불가능할 정도였고, 도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식량과 식수를 얻을 수 있었으며 외부와의 교류도 쉬웠다.
레몽은 곧 겨울인데다 무슬림 지원군이 오기 전에 도시를 점령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를 들며 안티오키아의 정복자란 영광을 얻고자 하는 명예욕이 반영된 기습 공격을 주장했지만,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고자 야심을 품은 보에몽은 이를 반대했다. 거대한 안티오키아는 단기간에 점령하기도 어려웠고, 기습 공격이 성공할 시에 보에몽 자신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에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도 단기간 함락이 어려울 것이라고 동의하여 십자군은 1097년 10월 21일부터 1098년 여름까지 긴 공성전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레몽과 보에몽의 대립은 점점 가시화 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기독교도들이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첩자들을 심어 도시의 사정을 알아내는 한편 야기 시얀이 10년 전에 이 도시를 점령한 방법인 매수를 통해서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십자군 진영에서 십자군 정보를 알려주는 첩자들도 있었기에 야기 시얀은 십자군이 당장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곧 깨달았다. 무슬림들은 대담해졌고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다마스커스의 두카크가 보낸 지원군이 온다는 소문에 그들은 더욱 고무되었다. 결국 공성 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성 기간 내내 식량 부족으로 십자군은 큰 고통을 겪었다. 공성 시작 당시엔 식량이 풍족했지만 어디까지나 빨리 도시를 점령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안티오키아는 너무 멀었고, 겨울을 나기엔 식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말을 잡아먹었고 거름을 뒤져 곡물을 얻었으며 적군의 시체를 먹기도 했다. 블루아의 에티엔과 노르망디의 로베르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킬리키아 등지로 물러났다. 제노바 함대는 물론 제국령 키프로스와 새로 수복한 킬리키아, 라오디키아에서 동로마 함대의 보급품이 안티오키아 근처의 성 시메온 항구로 들어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십자군들은 주변을 약탈하며 식량을 보충하려 했다. 하렝크 요새를 점령하고 튀르크인 2천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을 쓸어버렸으니 약탈 반경이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키아의 군대가 걸핏하면 성에서 나와 반격을 시도했기에 거대한 누대가 세워져서 무슬림의 공격에 대비할 정도였다. 그러다 첫번째 중대한 위기가 닥쳤다. 보에몽이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변에 공격을 감행한 틈을 타서 야기 시얀이 12월 29일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레몽은 노련하게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레몽은 역습 끝에 일시적으로 안티오키아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철수했다. 한편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려던 다마스커스의 두카크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플랑드르 백작의 군사들이 패하면서 위기가 엄습했지만 보에몽은 적시에 예비대를 투입하여 지원군을 섬멸했다.
식량 사정은 자꾸 악화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은 부족했고 아데마르 주교가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흘간 단식을 선포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고 안티오키아의 방어군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성벽에 매달아 십자군을 조롱하기도 했다. 거기에 적의 지원군이 또 온다는 소식이 도달했다. 십자군 지휘관들은 보에몽에게 적의 지원군을 물리칠 임무를 맡겼다. 보에몽은 하렝크에서 25km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한 알레포의 지원군을 기습을 통해 섬멸했다. 길목에 몰려 있던 알레포군은 매우 당황했고 곧 공포에 사로잡혔다. 십자군의 맹공에 2천명이나 되는 병력이 전사했고 결국 와해되어 달아났다. 이 승리에도 식량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하지만 슬슬 전세는 십자군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한때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한 함대가 내려놓은 보급품을 레몽과 보에몽이 운반하던 중에 안티오키아 군대가 기습했는데, 십자군은 용맹히 반격하여 튀르크 군대를 무찔렀다. 안티오키아 수비대는 퇴각하여 급히 성벽을 닫았고 미처 들어가지 못한 1500명의 튀르크인들이 무참하게 죽었다. 이렇게 공성 자재들까지 받은 십자군은 본격적으로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위협이 다가왔다. 1098년에 접어들어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셀주크 제국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는데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튀르크인들은 다마스커스, 알레포, 모술로 이동했다. 모술의 아타베그인 카르부가(Kerbogha)는 이 튀르크인들을 규합하여 안티오키아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에 십자군은 매우 초조해졌다. 많은 탈영병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은자 피에르도 탈영하려다가 잡혀왔다. 한편 십자군에 합류한 황제의 대리인 타티키오스도 보급 문제를 해결을 위해 1098년 1월에 자리를 비웠다. 자신의 야망을 방해하는 장애물인 타티키오스가 사라지자 보에몽은 이 상황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마침 연이은 활약으로 입지가 높아졌던 그는 타티키오스와 제국을 비난하면서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다른 십자군들을 위협했다. 명목상 총사령관이자 자신들을 부른 황제가 현지에 없던데다가, 군수 지원마저 부족한 극한 상황은 이를 솔깃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3월 4일에 부족하나마 성 시메온 항구를 통해 동로마로부터 물자가 보급되어 이러한 반로마 감정이 잠시 누그러졌지만, 5월이 되자 보에몽은 다시 반로마 여론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즈음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수비대 대장인 아르메니아인 피루즈(Firouz)를 매수하는데 성공했다.[4] 피루즈는 보에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맡기고 도시를 내어줄 것을 약속했다. 보에몽은 십자군 인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강조한 다음 만약 자신이 안티오키아를 단독으로 점령하면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자신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이 동의했지만 레몽은 황제와의 서약을 준수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자 그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1098년 6월 2일 아침 십자군은 짐짓 카르부가를 상대하러 떠나는 것처럼 동쪽으로 떠났고 안티오키아 수비군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십자군들은 즉각 피루즈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티오키아를 들이쳤다. 보에몽의 병사들이 안티오키아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의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몇시간만에 함락됐다.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튀르크인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고, 이에 휘말린 아르메니아인들과 정교도들도 많이 죽었다. 학살 끝에 십자군은 실로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보급 부족을 해결했다. 야기 시얀은 달아나다가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잡혀 죽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그의 목을 베어 십자군에게 바쳤다.
한편 카르부가는 안티오키아가 아니라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의 손아귀에 들어간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3주나 지체한 상황이었다. 에데사 탈환에 실패한 카르부가는 곧장 안티오키아로 달려가 십자군들을 역포위했다. 이에 고무된 최후의 안티오키아 수비대들이 공세를 감행했으나 격퇴 되었다. 카르부가는 십자군들을 굶겨죽이기로 작정하고 성을 포위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이 때 피에르 바르톨로뮤란 자가 성 안드레아의 계시를 받아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고 주장하여 성 베드로 성당을 뒤진 결과 정말로 성창을 찾아냈다. 아데마르는 피에르 바르톨로뮤의 자작극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다른 십자군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5] 하지만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었고 카르부가에 협상단이 파견되기도 했다. 협상단은 은자 피에르가 이끌었는데 카르부가는 십자군의 제의를 거절했다. 십자군은 앉아서 굶어 죽을 수 없었기에 성창의 발견으로 고무된 사기를 바탕으로 6월 28일 보에몽의 지휘 하에 고드프루아, 위그, 플랑드르의 로베르, 아데마르, 탕크레드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선제 공격에 나섰다. 레몽은 와병 중이라 성의 수비를 맡았다. 카르부가는 십자군을 단번에 쓸어내기 위해 십자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십자군의 숫자는 카르부가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카르부가는 이미 십자군들이 거의 와해된 상태라고 생각하여 방심했던 것이다. 경악한 카르부가가 급히 강화를 요청했지만 대번에 씹혔고 카르부가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카르부가는 매복 작전을 통해 십자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보에몽은 매복을 예상하고 있어서 제때에 예비대를 투입했다. 튀르크군은 서서히 밀렸다. 여기서 전세가 기적적으로 뒤집혔다.
카르부가를 따라 온 아미르들은 가뜩이나 카르부가가 이 싸움에서 이기면 절대적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독선적인 그에게 감정이 안 좋았는데 카르부가의 오판 때문에 힘든 싸움을 하게 되자 망설이지 않고 카르부가를 버리고 달아났다. 카르부가는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자신이 이미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을 알자 결국 달아났다. 카르부가의 군세는 와해되었고 그는 모술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안티오키아의 패잔병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 십자군에 항복했고 십자군은 그들을 살려주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에데사에 이르는 지역이 십자군의 손에 들어왔다. 보에몽은 약속대로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 했고 레몽은 거룩한 십자군 원정에서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는 것을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한편 카르부가에 대응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떠난 블루아의 에티엔은 필로밀리온(Philomelion)까지 진군해있던 알렉시오스 황제를 찾아가 안티오키아의 절망적인 상황을 전했다. 당시 황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태였고, 술탄과 화평을 맺은 상태였으므로 콘스탄티노플로 회군했다.[6] 황제의 친정을 손꼽아 기다렸던 십자군들은 황제가 회군한 걸 알고 격노하여 날뛰었고 저 신의없는 배반자에게 지킬 서약 따윈 없다고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에 양도하다는 서약을 전부 찢어버렸다. 니케아 공성전에서 시작된 양측의 몰이해와 오해로 인한 갈등은 여기서 폭발하고 말았다. 황제의 회군 및 예루살렘으로 인도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황제의 거부는[7] 동로마에게 안티오키아를 반환할 명분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뜨거운 날씨 때문에 11월 1일까지 안티오키아에 머물렀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베르망두아의 위그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것이면 서약을 충분히 이행한 것이라면서 회군하기 시작했는데 튀르크인들의 습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위그는 3주간의 행군 끝에 7월 말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안티오키아를 회복했단 소식을 전했다.
레몽과 보에몽의 대립은 격렬해졌다. 보에몽이 도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야기 시얀의 궁전은 레몽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하필 유일하게 중재가 가능했던 아데마르 주교가 6월에 장티푸스에 걸려 1098년 8월 1일에 사망했다. 그는 십자군의 종교 지도자 역할을 충실하게 했고 도릴레온 전투와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군사적 업적도 남겼다. 또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없었던 1차 십자군에서 유일하게 그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1차 십자군은 결국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보에몽은 킬리키아 공략에 나섰고 고드프루아는 투르베셀과 라벤델, 로베르는 라오디키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로베르는 라오디키아에서 지나친 학정을 펼쳐 쫓겨난다. 어쨌거나 아데마르 사망 이후 십자군은 동로마에 더욱 적대적이 되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아데마르의 죽음을 알리면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비난했다. 아데마르는 가톨릭과 지역 정교회의 조화를 주장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십자군은 가톨릭을 강요했다. 레몽은 안티오키아를 보에몽이 차지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며 교황에게 직접 예루살렘으로 올 것을 요청했다. 레반트로 향할 마음이 없던 교황은 대리로 다임베르트를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3.5. 외전1: 킬리키아 진공과 에데사 백국의 성립


한편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과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는 1097년 가을 즈음 안티오키아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에 본대와 떨어져서 킬리키아로 향했다. 선행한 탕크레드는 3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튀르크군을 격퇴한 다음에 타르소스를 포위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라서 탕크레드를 반겼다. 보두앵이 2,5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튀르크 수비대는 달아나버렸고 탕크레드는 성에 입성하여 자신의 깃발을 걸었다. 그런데 보두앵은 타르소스의 소유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탕크레드는 분노했지만 보두앵의 병사가 더 많은 관계로 도시를 그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이후 탕크레드는 아다나를 지나 튀르크인들이 버리고 달아난 도시 마미스트라를 점령했는데, 보두앵이 불로뉴의 기메네가 조직한 함대를 타고 그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탕크레드는 보두앵의 입성은 거부했지만 그에게 식량은 제공했다. 하지만 타르소스를 잃었던 것을 수치로 여긴 탕크레드의 부하들 일부가 보두앵의 기지를 야습하기도 했다. 다행히 처 자식이 아프단 소식에 보두앵은 타르소스로 돌아갔고 탕크레드는 알렉산드레타로 이동해 그곳을 점령했다. 결국 보두앵의 가족들은 병으로 죽었고 그들이 죽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향해 본대와 합류했다.
보두앵과 탕크레드의 다툼은 두사람의 개인적인 욕망 외에도 로마 황제와의 관계에도 원인이 있었다. 탕크레드는 그의 삼촌 보에몽처럼 동로마 제국에 그다지 충성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야심도 컸지만, 그에 비해 보두앵은 황제에게 비교적 신임받고 있었고, 서약에 따라 수복한 도시를 제국에게 반환했으며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며 원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둘의 다툼은 개인적인 야욕으로 수복지를 차지하려한 탕크레드를 로마 황제의 의지에 따라 견제하려한 보두앵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안티오키아 공성전 도중에 이탈한 타티키오스가 이 지역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한다.

한편 튀르크인들에게 공격받던 에데사의 지사인 토로스가 그에게 구원 요청을 하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를 이탈해 에데사로 떠났다. 1098년 2월 6일에 보두앵은 에데사에 도착했는데, 현지인들은 보두앵을 크게 환영했다. 심지어 토로스는 보두앵을 사위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보두앵은 얼떨결에 에데사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8] 머지않아 활약상을 보이는 보두앵을 단독 통치자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토로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려 애쓰던 정교도였으나,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 정교회 교도들은 그를 싫어했다. 결국 1098년 3월 7일의 쿠데타는 보두앵을 에데사의 단독 통치자로 만들어주었다. 보두앵은 전 지배자인 토로스를 살려주었지만 에데사 시민들은 토로스를 잡아서 죽였다.[9] 원칙적으로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는 십자군으로서 에데사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줘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보두앵은 최초의 십자군 국가에데사 백국의 군주가 되었다.

3.6. 예루살렘으로


약속했던 11월 1일이 지나도 지휘관들이 안티오키아를 떠나지 않자 병사들이 분노하여 항의하기 시작했다. 11월 5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지휘관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병사들이 만약 합의하지 않으면 성벽을 부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레몽도 고집을 꺾고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다. 레몽은 보에몽이 예루살렘 공략에 참가하면 그의 안티오키아 소유권을 인정하겠다고 했고 보에몽도 동의했다. 하지만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주변의 영토 확장에만 신경쓸 뿐 끝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십자군은 노한 레몽에게 성지에 도착하면 총사령관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겨우 레몽을 달랬다. 하지만 그 직함은 아무런 권위도 없는 직함이었다.
남하하기 시작한 십자군은 1098년 11월 ~ 12월에 마라트(Ma'arrat al-Numan)라는 소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 자체는 꾸준히 이루어졌으나, 원정 거리가 길어지면서 군수 지원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굶주리고 악에 받힌 십자군은 성내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시체를 먹었는데, 안티오키아 낙성에 이어 이 소식을 들은 시리아의 수많은 아미르들이 십자군과 협상하여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1099년 1월 13일 다시 남진을 개시한 십자군은 트리폴리 북쪽에 있는 아르카(Arqa)라는 도시를 공격했는데, 마라트와는 달리 이 공성전은 무려 3개월을 넘게 끌게되었다.
이 즈음 안티오키아 회복 소식을 듣고 황제가 보낸 사절이 도착했다. 사절은 점령지의 도시 양도를 거부한 것은 서약을 위반한 것임을 강조하는 한편, 황제가 친정하거나 대리인이 이끄는 증원군이 1099년 여름이면 합류할 것이니 현위치를 고수할 것을 청했다. 친로마파 인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반로마파 인사들은 궁지에 몰린셈이 되어 더욱 강경해졌다. 반로마파는 예루살렘 진공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레몽의 권위를 공격하려던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는 여론을 업고 공성전을 반대했는데, 여기서 레몽이 지지했던 성창 사기꾼 피에르가 시죄법에 실패하면서 공성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공성전을 중단한 십자군은 5월 19일에 베이루트 북쪽의 파티마 영토에 진입했다.

3.7. 다시 예루살렘으로


다마스커스의 수니파 이슬람 영주들은 십자군이 시아파인 파티마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즐거워했다. 파티마는 전부터 십자군에게 동맹을 맺어 튀르크와의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애매하게 거절했다. 파티마는 이즈음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시 동맹을 요청했다. 현실적인(...) 그들은 십자군의 목적이 성지 탈환이라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십자군을 두려워한 시돈, 티레, 하이파, 아크레가 동맹을 요청했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했다. 6월 3일에 십자군은 야파에서 에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가도로 접어들었다. 그즈음 파티마가 병력을 동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십자군 내부에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로를 먼저 점령해서 배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6월 6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인 베들레헴이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6월 7일에 십자군은 몽조이 언덕에 올라 에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한편 예루살렘에는 파티마에서 파견한 예루살렘 총독 이흐티카르(Iftikhar ad-Daula)가 농성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성벽을 보수하고 식량을 저장하는 한편, 성 주변을 소개하고 안티오키아 때처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기독교도들을 추방하여 방어 준비를 갖췄다. 그에 비해 십자군은 처음 집결 했을 때에 비해 1/3에 불과한 숫자였다.

3.8. 예루살렘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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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한 영토를 인정할테니 화평하자는 파티마의 제안을 거절한 십자군은 6월 13일에 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는 손쉽게 공격을 격퇴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파티마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고 다급해진 십자군은 절망했지만 레몽의 수행원인 페트루스 데시데리우스란 사제가 아데마르의 영혼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십자군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만약 에루살렘의 성벽을 한바퀴 돌면 9일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0] 이에 십자군들은 순례자의 복식으로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돌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 꼴에 황당해하며 화살을 쏘아댔다. 황당한 짓(...)으로 사기도 회복하고, 제노바의 지원으로 병력과 물자를 확보한 십자군은 7월 13일에서 14일에 걸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7월 15일에 고드프루아가 성벽의 일부를 점령했다.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로렌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었고 십자군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성스러운 도시는 함락되었다.
환희에 찬 광신도 십자군은 당연히 사흘간 약탈을 벌였다. 사가들이나 야사에서는 말 고삐까지 피가 닿도록 사람을 죽였느니 예루살렘이 피바다가 되어 무릎까지 피가 차올랐다느니 하지만 재물에 더 욕심이 많았던 십자군이 그 정도로 광기에 빠졌을 것이라 믿기는 어렵다. 많은 숫자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몸값을 받고 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엄청나게 많았고, 학살이 일어났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최대한 적게 잡아도 1만, 많게는 4만에서 7만까지라고 이야기하니 중세 도시의 인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사흘간의 광기를 생각해보면 농성 준비 기간 동안 성에서 쫓겨난 현지 기독교도들은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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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의 우트르메르(십자군 국가)
위에서부터 아르메니아 왕국, 에데사 백국, 안티오크 공국, 토르토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의 전신), 예루살렘 왕국

4.1. 예루살렘 왕국의 성립


원래대로라면 예루살렘은 동로마에 반환되어야 했고 교황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십자군들은 '배신자인 동로마에겐 한치의 땅도 줄 수 없다'라며 그 동안의 지원과 맹세를 잊고 버텼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대주교나 교황 특사가 교황령처럼 예루살렘을 통치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아데마르는 죽었고 공교롭게도 예루살렘 총대주교도 며칠 전에 죽은 상태였다. 십자군의 성직자들은 새 총대주교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십자군들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파티마의 대군이 오는 상황에서 십자군들은 여유가 없었고 일단 레몽에게 에루살렘의 왕위를 권유했다. 하지만 레몽은 원정 기간동안 인기를 많이 잃은 상태였고, 십자군 주류 여론과 달리 친로마파 였으며, 예루살렘 내부의 주요 요새들을 장악하고 있어 예루살렘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이를 체면상 거절했다. 십자군 인사들은 그의 체면을 차려주는 놀이를 할 여유가 없었고 곧바로 왕관을 '''고드프루아에게 바쳤다.''' 고드프루아 역시 왕위를 거절했지만 이교도들로부터 도시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성묘의 수호자라는 호칭은 수락했다(1099년 8월 1일). 레몽이 격노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차지한 영토를 내놓을 수 없었다고 버텼지만 교회 회의를 통해 레몽은 다윗의 탑 요새를 알바라 주교에게 양도하고 철수했다. 레몽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순례를 떠났으나 아스칼론까지 이집트 군대가 왔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왔다.
8월 11일 십자군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 안에 있을 것이라고 방심한 파티마 군대를 기습 공격했고 파티마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아스칼론 전투를 기점으로 십자군들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때 4만이 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원정 기간 동안 갈라져 나가거나 소모되고 살아남은 상당수가 귀향하면서 이제 예루살렘엔 약 3백명의 기사와 2천명의 보병밖에 없었다. 지휘관이라곤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뿐이었다. 그 탕크레드도 티베리아스를 점령하고 자신의 영지로 삼아 영주로서 자립해나갔다. 이후 피사의 대주교 다임베르트가 교황 특사로 도착했는데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에 세속 지배자의 영토가 아니라 교황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드프루아를 몰아내려 했다. 그런데 고드프루아는 1100년 7월 18일 돌연 사망했다. 다임베르트에게 예루살렘을 넘겨줄 생각이 없던 고드프루아의 측근들은 급히 에데사백 보두앵을 불러 예루살렘 국왕에 즉위시켰다. 보두앵은 에데사 백작령을 자신의 외육촌인 부르의 보두앵에게 맡기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안티오키아의 지배자인 보에몽이 다니슈멘드 왕조의 포로로 잡혔다.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달려가 그곳의 안정을 확보한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갔고 다임베르트는 마지못해서 베들레헴의 강림 교회에서 보두앵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로 즉위시켰다.
1101년에 보두앵은 카이사레아와 아르수프를 장악했고 1104년 5월에는 제노바 함대와 함께 아크레를 점령했다. 1110년에는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 덕에 시돈과 베이루트를 함락했다. 레반트 해안 거의 전 지역이 예루살렘 왕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보두앵 1세는 나일강 삼각주까지 장악했지만 병에 걸려서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 1118년 4월 2일에 죽을 때까지 그는 왕국의 자립을 위해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보두앵 1세는 그와 선왕 고드프루아의 큰형 불로뉴백 외스타슈 3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고, 그 사이에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외육촌인 에데사백 보두앵이 보두앵 2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칠리아까지 이동했던 외스타슈는 그 소식을 듣고 왕위를 포기하고 귀환했다. 엄연히 살리카 법에 따라 계승자가 존재하는데 플랑드르 가문에서 레텔 가문으로 왕가가 변경되는 이 사건으로 보두앵 2세는 재위기간 내내 정통성을 의심받게 된다. 에데사 백작위는 그의 사촌 쿠르트네의 조슬랭이 물려받았다.

4.2. 외전2 : 안티오키아 공국의 위기


1103년에 석방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데사의 보두앵과 쿠르트네의 조슬랭과 연합해 알레포를 쳤지만 참혹하게 패했다. 조슬랭과 보두앵이 포로로 잡혔고 보에몽만 겨우 살았다. 보두앵 1세는 재빨리 조카 탕크레드를 에데사에 급파하여 공격에 대비했는데 공격은 이슬람이 아니라 동로마에서 왔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돌려주지 않자 분노한 알렉시오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친 것이다. 마누일 부투미티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킬리키아 일대를 점령했지만 안티오키아를 공성할 수는 없었다. 보에몽은 탕크레드를 안티오키아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 프랑스 왕의 딸인 콩스탕스 공주와 결혼한 다음에 동로마 제국을 칠 준비를 했다. 1107년 그는 아드리아 해를 넘어 디라히온을 공격했지만 1081년에 디라히온 공방전의 패배 이후 노련해진 알렉시오스 1세는 보에몽을 수월하게 격퇴했고, 보에몽은 데볼 조약을 맺어 동로마의 봉신이 되는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인 저 보에몽은 로마인들의 황제(Autocrator of the Romans) 알렉시오스 폐하와 다음과 같은 협정을 맺으며 이의 준수를 어기지 않겠습니다. ··· 진실되게 말하오니 저는 제 숨이 붙어 있는 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것이며, 로마인들 및 로마 제국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폐하에게 반항하는 그 어떤 적들에 대해서도 맞서 싸우겠습니다. (안나 콤니니(Anna Comnena), E.R.A. Sewter(역), 『The Alexiad』, (Penguin Classics, 1969년), p.425.)

이후 실의에 빠진 보에몽은 1111년 3월 3일 이탈리아의 아풀리아에서 죽었으나, 안티오키아의 섭정인 갈릴리 공작 탕크레드는 조약 준수를 거부했고 안티오키아는 독립적인 영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당연히 동로마는 보에몽의 사망 이후 조약에 따라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회수하려 했으나 탕크레드는 이를 거부했으며, 십자군을 규합하여 동로마의 시도를 무위로 돌렸다. 이러한 조약 미준수는 요안니스 2세 - 마누일 1세로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 안티오키아에 대한 명분을 남긴 셈이 되었다.
보에몽 1세 사망 이후 그의 어린 아들인 보에몽 2세가 안티오키아 공작 자리를 승계하였고 1111년 12월에 탕크레드가 장티푸스로 죽자 살레르노의 루지에로가 안티오키아의 섭정 자리를 승계했다.

4.3. 외전3 :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


한편 땅을 한뼘도 얻지 못한 레몽 백작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서약을 충실히 지켰기에 황제의 호의를 얻고있던 그는 1101년의 십자군에 총사령관으로 참여했다가 대패하여 탈출했지만, 1102년에는 황제의 조력으로 다시 레반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사이의 무슬림 영토이자 풍요로운 트리폴리를 공격했는데, 수년에 걸친 포위에도 불구하고 트리폴리가 함락되기 전인 1105년 2월 27일에 죽었다.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전인 1104년부터 트리폴리 백작을 칭했는데, 영토도 없는 작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레몽의 사촌 기욤과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이 후계자 자리를 다투었다. 보두앵 1세, 탕크레드, 에데사백 보두앵, 쿠르트네의 조슬랭이 트리폴리에 모여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기욤과 베르트랑이 트리폴리를 분할 점령하되 기욤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봉신이, 베르트랑은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이 되도록 결정했다.
툴루즈의 섭정이자 실권자였던 베르트랑은[11] 1105년 아버지가 가한 최후의 공격이 파티마 해군의 적절한 개입으로 무산된 것을 기억하고는 트리폴리 공략을 철저히 준비했다. 그는 본가인 남프랑스에서 1만여의 병력을 끌어왔으며, 제노바 공화국과의 조약으로 함대와 병력을 지원받음은 물론 다른 십자군 국가에서도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공을 들인 끝에 1109년 7월 12일 트리폴리가 함락되어 트리폴리 백작령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전투 도중 기욤이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써 베르트랑이 단독 상속자로서 트리폴리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암살 의혹을 받으며 독차지한 작위였지만, 그도 몇년 지나지 않은 1112년에 죽어 그의 아들인 퐁스가 트리폴리 백작이 된다.

5. 평가


민중 십자군을 제외하고 보면 사실상의 첫 번째 원정인데 후일의 제6차 십자군과 함께 성지를 탈환한 성과를 거둔 십자군이다. 유일하게 왕이나 황제가 참가하지 않았고 당시 '영주'들 몇명만으로 위의 영토들을 점령해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후대의 6차 십자군은 양자간에 합의하여 예루살렘을 매매했기 때문에 당시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십자군 원정에 비해 신앙심이 돋보이고 성공적이었던 1차 십자군은 매우 특이한 일이기도 하다.
이 성공으로 인해 유럽에는 십자군을 찬양하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교회에서는 신부들이 강론으로 기사들의 미덕을 매일같이 선전하면서 십자군 열기는 더 높아졌다. 진품 여부는 차치하고, 이 원정에서 성창이나 성십자가 등 성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미화한 작품들이 만들어지면서 후일 성배 탐색과 같은 성지 순례 + 성유물 발견같은 유형의 문학적 모티브도 여기서 시작된다. 이때 나온 저술들은 십자군의 원정을 마치 그리스도의 시련처럼 묘사하는데, 이미 성공하는 것은 신의 뜻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중간에 만난 안티오키아 공방전 같은 고난들은 기사들을 시험하고자 신이 내린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험담에 고무된 서유럽 세계는 십자군의 성공을 확신하고 더 많은 십자군 지원자들이 모여들게 된다. 만약 첫 번째 십자군이 실패로 끝났다면 십자군 원정이 계속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예시로 처음에 성공하고 실패해서 도전하는 것과 처음부터 실패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이 실패했다면 역사는 상당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권의 이슬람권에 대한 첫 대규모 공격이다 보니[12] 유혈과 학살도 이 때 가장 심했다. 애초에 상당수의 십자군은 이런 학살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목적 자체가 정복이 아니라 성지 순례 비슷하게 흘러간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하다.

[1] 단순히 보급 부대를 붙여주지 않고 이렇게 복잡한 방식을 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십자군의 제국 정부에 대한 의존성을 강화 2. 자금을 받게 된 십자군으로부터 호의를 획득 3. 군수 지원을 위한 기구의 간소화 4. 화폐 개혁을 단행한지 얼마 안 된 신 화폐를 제국 내에 원활히 유통 5. 행군로상 현지의 인플레이션과 독과점 방지. 물론 이 자금이 세금과 군수품 대금을 비롯한 다양한 경로로 제국 정부로 돌아올 것을 알고 취한 영리한 조치이기도 했다.[2] 로베르 1세는 성지 순례 중에 알렉시오스 황제를 만나 친분이 있었다. 또한 레부니온 전투 직전 병력이 말라 궁지에 몰려있던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에도 응하여 500여 명의 기사와 150마리의 군마를 지원해줄 정도였다.[3] 아나톨리아의 험한 지형과 기후는 십자군의 진격을 매우 힘들게 만들었고 기사들은 자신들의 갑옷을 벗어 보병들에게 던져주기까지 했다. 이는 3차 십자군 때도 재현되어 육로를 택한 프리드리히 1세#s-1의 독일 십자군이 킬리키아에 다다를 무렵엔 거지꼴이 되기도 했다.[4] 이 피루즈가 어째서 보에몽의 매수에 넘어갔는지 설이 많다. 그의 아내가 튀르크인 상관과 바람이 나서라는 설이 있고, 이슬람 교도들에 치를 떤 나머지 도시를 넘겨준 것이란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그가 곡물을 횡령한 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도 한다.[5] 당연히 성창은 가짜였고, 피에르는 이후 일종의 시죄법으로 불에 달궈진 두개의 기둥을 건넜으나 크게 다치고 죽었다. 때문에 그를 지지하던 레몽 백작의 입지는 매우 줄어들었다.[6] 알렉시오스 1세는 잘 알려진 디라히온 공방전의 패배 말고도 노르만 전쟁과 페체네그 전쟁을 치르면서 여러번의 잘 알려지지 않은 패배들을 겪었고, 40대 즈음이던 1차 십자군 당시에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보면서(...) 20대 ~ 30대의 청년기에 비해 굉장히 신중해진 상태였다. 하물며 일국의 지도자인 황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는데, 원정을 지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7]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을 아는 후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안티오키아 공략 성공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었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진공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하느님이 인도해주신' 일이었다.[8] 사실 이는 보두앵에게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보두앵의 가족들이 죽자 그 결혼으로 약속되었던 영토 역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9] 보두앵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았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영주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려했던 겉모습과는 별개로 나름의 야심이 있던 보두앵이 쿠데타를 획책해 토로스를 쫓아내고 그 뒷처리를 주민들에게 뒤집어 씌운 것 일수도 있다.[10] 팔레스타인 + 성벽 돌기 + 함락의 조합은 아무래도 구약의 예리코의 전투에서 모티브를 딴 것으로 보인다.[11] 다름이 아닌 레몽의 첫째 부인의 소생이었는데, 교황청에서 그녀가 레몽과 사촌 관계이니 근친상간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따라서 일반적인 혼외자와는 달리 대우도 좋았고 계승권도 주장할 수 있었다.[12] 정교회 국가인 동로마 제국이 십자군보다 먼저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을 가해 크레타 섬,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격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기에, 1차 십자군은 가톨릭 유럽의 이슬람권 심장부에 대한 첫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슬람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변경인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국가에 대해 레콘키스타가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