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 2세
예루살렘 왕국의 3대 국왕. 보두앵 2세는 레텔 백작 위그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부르를 영지로 받았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6촌 친척들인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볼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00년 불로뉴의 보두앵이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로 즉위하자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1104년 셀주크 제국이 에데사를 공격하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하란 전투에서 패하여 셀주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보에몽 1세의 조카 탕크레드가 섭정이 되었다. 보두앵 2세는 1108년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지만 탕크레드는 에데사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보두앵은 몇몇 이슬람 제후들과 연합하여 탕크레드와 싸워 결국 축출했다. 그러나 1110년까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 대부분은 모술의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118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죽자 보두앵 2세는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기 위해 예루살렘 왕국으로 갔고 에데사는 조슬랭 1세에게 넘어갔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인 순례자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1113년에 구호기사단, 1118년에 성전기사단이 창설되었다. 보두앵은 성전기사단의 본부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근처에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이 기사단의 이름이 성전기사단이 되었다. 1119년부터 1126년까지 섭정단이 전멸한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 되기도 했다.
보두앵 2세는 1124년 또 튀르크족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기도 했으나, 곧 풀려나서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1129년 성전기사단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보두앵 슬하에는 딸만 4명 있었는데 장녀 멜리장드는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결혼시켰고 이 두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 차녀 알리스와 삼녀 오디에르나는 각각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2세와 결혼시켰다. 막내딸 이오베타는 왕이 된 후 태어난 자식으로, 그녀는 성 안나 수녀가 된 뒤 훗날 세워지는 베다니의 수녀원의 수녀원장으로 살아간다. 보두앵 2세는 1131년 8월 21일 병사하고 멜리장드와 풀크 부부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