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호

 

高在鎬
일본식 이름: 長澤在鎬
1913년 8월 7일 ~ 1991년 10월 18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대한민국법조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장흥(長興)[1], 호는 취봉(翠峯)이다. 고재청국회부의장이 그의 친동생이다.

2. 생애


1913년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삼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2]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조선변호사시험과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모두 합격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장을 거쳐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대법관 임명 당시 '''41세'''로 이는 최연소 대법관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자.
대법관 퇴임 후 1961년에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65년 5월부터 1966년 5월까지, 1973년 5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1] 23세 '''재(在)''' 규(圭) 항렬.[2] 인근의 용수리·유천리와 함께 장흥 고씨 집성촌이다. 고재욱 전 동아일보사 사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