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창일은 1896년 4월 6일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 성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달냐워스토크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군 장교로 종군했다. 1917년 12월 러시아에 있는 한인 단체들이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로 통합되자 이에 참가하여 활동했으며, 1919년 1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변경되면서 해외 한민족의 대표최고기구를 표방하자 역시 참여했다.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할 대한국민의회 대표로서 윤해와 함께 선발되어 1919년 9월 파리에 도착했으나 그때는 이미 회의가 폐회된 뒤였다. 이에 두 사람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 <자유한국> 등을 프랑스어로 발표한 뒤 1920년 5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러시아로 돌아갔고, 1920년 6월 문창범, 박용만, 유동열, 안병찬, 김하석(金夏錫), 최고려(崔高麗)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다. 또한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참석했고 창조파의 입장에 서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새 지휘 단체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후 1933년 8월 조선공산당 지린성 화룡현위원회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1944년 함흥, 원산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하얼빈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수행하다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서울에 들어온 고창일은 남조선과도입법의회(南朝鮮過渡立法議會) 의원을 역임했으며, 정이형, 김용모, 최종섭, 윤기섭, 허간룡, 허규, 하상훈, 박건웅 등과 함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 기초위원회의 소집 책임자가 되었지만 미군정이 이 법을 인준해주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 서상일 외 관민의원 43명이 유엔조사위원회에게 소련의 조선독립 천연공작을 배제하고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감시해 달라고 요청하자는 내용의 긴급동의안을 입법위원 205차 본회의에 상정하자, 그는 정이형, 김규식, 김돈, 박건웅, 원세훈, 여운홍, 문무술 등과 함께 반대했지만 끝내 긴급동의안이 통과되자 김규식, 여운홍, 김붕준, 강순, 박건웅, 허규, 허간룡, 문무술, 김돈, 황진남, 정주교, 정이형 등 23명의 관선의원과 함께 퇴진했다. 1948년 3월 18일에 개최된 입법의원 제211차 회의는 입법의원에서 이탈한 고창일 외 23명을 제명 처리했다.
이후 고창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입장을 바꿔 대한민국 정부에 가담하기로 하고 초대 외무부 차관을 맡았으며, 1949년 외무부 장관 서리가 되어 한국의 UN 가입 선청서를 제출해 유엔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고창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