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사회
1. 개요
科學者社會 / Scientific Community
과학자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사회.
서구의 과학자사회의 기원은 17세기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과학자들의 독립적 학술단체가 출현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대학과 학회 및 연구소 등으로 과학이 제도화됨에 따라 과학자사회의 성장과 분화 그리고 조직화가 전개되어왔다.
서구에서 과학자사회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말에 과학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로버트 머튼을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과학자사회의 규범구조, 보상체계, 계층화 등을 전체 과학시스템을 유지하고 통합시키는 기능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 그 기원이다. 한국에서는 과학사회학을 비롯하여 과학철학과 과학사와 같은 과학학의 역사가 매우 짧기에 초창기에는 서구의 모델을 토대로 피상적으로 과학자사회를 이해하였으나,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김환석을 비롯한 여러 과학사회학자들에 의하여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구조 그리고 한국 과학자의 사회화와 정체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2. 과학자사회의 개념
2.1. 마이클 폴라니의 과학자사회
과학자사회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것은 마이클 폴라니인데,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영국에서 논의된 '과학의 계획화'를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과학의 계획화는 존 버널과 조지프 니덤을 비롯한 과학적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는 진보적 과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들은 소련의 사회주의적 경제의 일부로서 국가가 과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모델을 제시하였다. 당시 세계 대공황을 겪으면서 사회주의경제에는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들 역시 과학의 계획화 모델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1938년 8월부터 과학의 계획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운동에 자유주의적 입장의 과학자들은 반대하였는데, 이들 중 대표자는 마이클 폴라니였다. 유대계 헝가리인인 그는 독일에서 활동한 명망있는 화학자였으나 나치의 집권으로 1933년 영국으로 명망을 왔기에 누구보다 전체주의적 국가권력의 위험을 우려하고 반대하였다. 그는 1935년 소련 방문을 통해 소련 역시 전체주의임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리센코 사건에 대해서도 서구의 과학자들 중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영국에서 논의되는 과학의 계획화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폴라니는 과학의 계획화 운동이 확산되자 자신의 입장을 함께하는 존 베이커와 같은 자유주의적 과학자들과 더불어 1939년 과학자유협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폴라니는 과학연구의 결과는 예측불가능하기에, 과학의 계획화에 동의하는 이들이 주장하듯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연구를 중앙집중적으로 계획하거나 조직할 수 없다라고 보았다. 그는 지속적인 과학적 진보를 보장하는 길은 개인연구자들에게 가능한 한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과학활동은 정부의 계획과 통제보다는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최선이며, 그런 특성을 갖는 과학자사회가 지식의 진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폴라니의 과학자사회에서 개인과 학자들은 연구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시도할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나, 연구의 결과는 그 과학자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평가를 받아야할 책임이 있다. 즉 폴라니의 과학자사회란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비공식적 집단 혹은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것이며, 최대한의 개인적 자유와 엄격한 집단적 규율을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의 과학자사회 개념은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폴라니가 그 개념을 학술적 목적에서보다는 과학의 계획화를 반대하는 논거로 제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2. 과학제도 사회학
로버트 머튼은 비록 과학자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과학자집단의 독특한 내부구조와 역학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진행하였고 과학제도 사회학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1938년 발표된 그의 박사논문 <17세기 영국에서의 과학, 기술과 사회>는 청교도주의가 왕립협회의 탄생과 성장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분석하여 사회적 가치가 근대과학의 성장을 촉진하였음을 주장하였으며, 1937년 미국 사회학회에 발표한 《과학과 사회질서》에서는 나치 정권에 의한 과학 자율성 억압을 분석하였다.
그는 1942년에 발표한 논문 <민주적 질서에서의 과학과 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과학자 집단의 독특한 규범을 제시하였다. 머튼의 이러한 시도는 사회적 가치가 과학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기 위하여 과학활동을 제도화된 행동규범을 지닌 사회적 활동으로 간주한 사회학적 관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비록 과학사회학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이 네가지 규범이 보편적이지 않다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과학자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준거점을 제공하고 있다.
과학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석되었지만, 과학이라는 사회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머튼이 1957년에 《과학적 발견에서의 우선권》라는 논문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밝혀지지 못했다. 머튼은 과학적 업적에 대해 동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제도적으로 강화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자기지속적 보상체계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이 제도화된 동기가 과학자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저 엄격한 규범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라고 본 것이다.
2.3. 토머스 쿤의 과학자사회
폴라니가 제창한 과학자사회 개념은 토머스 쿤에 의해 독창적인 형태로 부활되었다. 그는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지식의 변화를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설명하였는데, 이때 과학자사회의 사회구조가 패러다임 작동의 기초를 이룬다고 보았다.
2.4. 과학지식사회학에서의 과학자사회
폴라니와 머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과학자사회 개념과 쿤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과학자사회 개념이 충돌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1970년 영국의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지식사회학을 주창하면서 이 충돌을 거세어졌다.
미국의 과학사회학자들은 머튼과 쿤은 과학자사회의 복잡성에 대해 사회학적 이해를 돕는 데에 있어 좋은 지침을 제공하기에 상보적이라고 보았는데, 그들과는 달리 영국의 과학사회학자들은 머튼이 안정된 규범에 따라 작동하는 하나의 일반적 과학자사회를 상정한 반면, 쿤은 주기적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와 규칙을 바꾸는 복수의 과학자사회를 상정하기에 서로 대립적이라고 보았다. 이 두 모델을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한 다음, 영국의 과학사회학자들은 머튼의 견해에 대해서 과학자 행태에 대한 경험적 증거와 불일치하다고 비판하며 쿤의 모델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3. 과학자사회의 연구 역사
4. 서구의 과학자사회의 형성
5. 한국의 과학자사회
5.1. 과학자사회의 형성
서구의 과학과 기술이 들어온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였으나, 대학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전문으로 배운 한국인이 등장한 것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887년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하여 4년 후 졸업했던 변수(邊燧)가 대표적인 최초의 한국인 과학기술자이며, 이외에도 의학사 학위를 받은 서재필, 과학 분야 학업을 수료한 것으로 알려진 윤치호 등이 최초의 과학기술자로 거론된다. 이 과학기술자들의 출현은 고종의 개화정책에 의해 가능했는데, 동도서기론자들의 서기 수용정책은 서양의 과학기술 전반에 대한 수용정책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변수나 서재필과 같이 미국 유학으로 학위를 받은 이들은, 이 고종의 개화정책으로 미국과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1883년 미국에 보빙사로서 파견되었던 인물들인데, 그들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과학기술을 배웠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관비 유학생 파견정책이 입안되었는데, 이것으로 국가 발전의 뿌리가 될 과학기술자들을 양성하려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 유학정책은 1907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사비로 일본으로 유학 바람을 일으키는 데에 어느정도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