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1. 개요
2. 명단
3. 일정
4. 그들의 뒷이야기

使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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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앉은 이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뒷줄 선 이는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1883년 7월 조선이 최초로 서양(미국) 국가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 1882년 5월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미국은 특명 전권 대사[1]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다. 따라서 조선도 공사를 보내야 했는데 당장 보낼 형편은 못 되었고, 대신 푸트의 건의로 답례차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래서 선발된 것이 다음 명단이었다.

2. 명단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2]이자 고종의 외사촌[3], 그리고 후에 순종의 처남[4]까지 되는 왕실 외척. 한마디로 당시엔 젊은 세도가였다. 이렇게 써놓으면 단순 낙하산 인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수신사로 일본도 다녀오고 묄렌도르프와 같이 청도 다녀오는 등 외교 면에서 기존부터 활동해온 인물이었다. 신분과 맞물려, 조선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본래 조선에서는 과거 명, 청에 사신을 파견할 때도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正使)는 왕실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외척처럼 신분이 높은 인사를 일부러 선정한 경우가 많았다. 미 신문에서는 Prince Min으로 통칭했다. 'prince'는 '왕자' 외에도 최고위 귀족의 칭호(공)로도 쓰이므로 민영익을 지칭하는데엔 적합한 표현이다.
역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내아문 외아문 통리아문의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유능한 신진 관료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수신사로 김옥균의 수행원 역 등을 맡으며 일본에 다녀왔던 인물이었다.
이상 3인이 공식으로 벼슬을 받은 외교 사절이었고, 이하는 수행원들이었다.
수원 최경석[5]
수원 변수
수원 고영철
수원 현흥택
통역 우리탕[6]

3. 일정


7월 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는데[7] 이들로만 보내기는 좀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8]과 그의 비서 겸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가 동행하게 된다.[9] 이에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사실 보빙사의 기록은 오늘날 한국 측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보빙사의 주요 인물인 홍영식, 서광범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실패 후 역적으로 단죄되어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국 내 일정은 신문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충실히 기록했기에 오늘날 당시 일정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15일 샌프란시스코로 출항하여 9월 2일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사절단을 국빈으로 예우했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대접받으면서 워싱턴 D.C.에 오고 보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던 것... 그래서 9월 18일에 가서야 뉴욕의 호텔에서 드디어 기념할만한 아서 미국 대통령과 조선 외교 사절의 첫 만남이 성사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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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진 세명은 아마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으로 보인다. 절을 받는 사람은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이다. 자세한것은 체스터 A. 아서 목록 참조.
당시 보빙사 일행도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진 않는단건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는 적절한 예절인지 토론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 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의 정확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민영익 등 아서 대통령을 알현한 일행은 관복으로 갈아입었기에 애초에 저런 복장이 아니며, 모자 역시 관모여야 한다. 또 뉴욕 타임스의 1883년 어카이브에 따르면 민영익 등 3명이 들어오자 그들은 서로를 향해 bow하고(여기서 bow를 절로 보면 아서 대통령도 절한 것이 된다) 대통령과 악수한 후 서양식으로 접견했다고 하는데, 그럼 절한 이후 곧바로 악수도 했다는 소리가 될 수 있다. 조선식으로 먼저 예법을 차리고 서양식으로 예법을 차렸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때 다른 수행원들은 모두 문 밖에서 벽을 바라보며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는 외교 사절이 접견할 때 권한이 낮은 수행원들이 취해야할 행동이다. 따라서 위 삽화는 1) 문밖에서 엎드려 있던 사람, 2) 서양에 알려진 조선의 양반 복장 등을 바탕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단, 민영익 일행은 대통령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복수의 목격자가 있다. 그림과 같은 식의 절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보빙사를 수행했던 Clayton Foulk의 기록을 보면, 보빙사 일행은 다소 허세를 부리고 배 멀미를 하는 생리적인 문제는 보였을지 몰라도, 식사 및 공연 등 다양한 일정에선 최대한 세련되게 처신하고 그들이 본 것 역시 상세히 기록했다.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문화 부적응 꼰대 같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당시 보빙사 대표들이 이미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외국 문물에 대해 어느정도 익숙해있던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10]
하여튼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견학도 하고 차관 요청도 하고 기술 전수 요청도 하고 박람회 개최 협조 요청도 하는 등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10월 12일 귀국 인사차 백악관에 방문하고, 아서 대통령은 군함 한 척을 내주어 본국까지 타고 갈 것을 권한다. 그래서 세 패로 갈라졌는데,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이 군함을 타고 유럽 등으로 건너가 각국을 순방하고 1884년 5월 귀국했다. 그리고 이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허가 아래 미국에 남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을 하기로 했으며,[11] 나머지 홍영식 및 수행원은 바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 귀국해 국왕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로웰이 따라와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참고로 유럽을 보기로 한 민영익 등의 일행은 대략 포르투갈,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을 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 싱가포르, 일본 등을 거쳐 왔다. 즉, '''조선인 최초로 거의 세계일주를 한 셈'''. 이때 조선인으로선 처음으로 피라미드#s-2.1도 방문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 유행했던 피라미드 등반 및 탐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생으로서 남의 무덤 위에 올라가거나 안에 들어가보는 건 상상도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피라미드는 왕릉이니 말 다했다.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유명 블로거 迪倫가 보빙사 일행의 미국 일정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고 있으니 역덕후라면 참고해보자.

4. 그들의 뒷이야기


보빙사 사절역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온건 컨셉을 유지하던 민영익갑신정변 당시 사이가 틀어진 급진 개화파들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 친청 근왕파가 되었다. 사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큰 부상을 입었으나, 보빙사 당시의 인정을 생각해 알렌에게 인도되었으며, 그는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문젠 여기까진 좋았는데 1886년 조러 밀약 등 고종의 친러거청 정책에 반대해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다 일이 꼬여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는 것(...). 그리고 훗날 귀국했으나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4년 사망했다.
홍영식은 미국의 정치 행정 제도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우정 시스템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하여 만든 게 우체국.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3일 천하로 끝난 직후 살해당해 효수되었다(...).
서광범갑신정변 일로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망명, 이후 알바 등으로 먹고 살며 공부하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 사법 제도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후 권력 다툼 속에 주미 조선 공사직으로 일종의 좌천이 되어 도미, 잠깐 동안 활동하다가 1896년 아관파천의 여파로 해임되고 미국에서 지내다 1897년에 폐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최경석은 보빙사 때 농업 근대화를 위해 종자 및 가축, 비료 등을 얻어와 귀국 후 땅을 하사받아 농장을 만들었다. 이 양반은 갑신정변에도 무사하여 일이 잘 되는가 싶더니 1886년 병사(...). 당연히 농장은 흐지부지되었고 그때 들여온 젖소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변수(邊燧)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도미하여, 1887년 메릴랜드 주립 농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1891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 '''미국 대학 최초의 조선인 졸업생'''이 된다. 재학 중이던 1890년부턴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도 근무. 하지만 안타깝게도 1891년 열차에 치여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참고로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KBS 수요기획에 방영되기도 했다.
유길준은 1년 정도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이후 1년간 유럽을 구경하고 귀국하였다. 그 사이에 갑신정변이 났기 때문에 유길준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1885년 말부터 7년간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이 시기 서유견문 등을 쓰게 된다. 갑오개혁 땐 내무부를 맡아 개혁에 힘썼는데, 이때 무리하게 단발령을 내리다 되레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이후엔 을미사변 관련해 고종에게 역적으로 지목되며 갑신년 동지들보단 뒤늦게(?) 일본 망명 크리를 타게 된다. 그래도 고종 폐위 후 귀국하긴 한다.
고영철은 역관으로 한성순보의 편집, 번역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영어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된 경험이 있었고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어울렸다. 격동의 시기에도 군수를 지내며 무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이 서양화가로 유명한 고희동이다.
현흥택은 최경석과 함께 무관 출신으로, 이후 관운이 풀리는듯했으나 을미사변때 시위대 대장으로 시위대를 이끌고 궁에 침입한 일본군을 끝내 막지 못했다. 이후 춘생문 사건때 이범진, 이완용과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YMCA가 발족되자 자문위원을 맡았다. 부지문제로 YMCA 회관설립이 어려워지자 몸소 400평 가까운 땅을 기증했다. 그의 아들과 조카도 YMCA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발전에 힘썼다.
우리탕(오례당)은 조선에 그를 불러준 묄렌도르프가 실각한 후에도 해관원으로 근무하다 1890년 은퇴 후 제물포(인천)에서 큰 돈을 벌어[12] 지역 유지로 잘 살다가 1912년 제물포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족으로 우리탕은 뮐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 왔을 뿐 본래 외교관이긴 했다.
로웰은 보빙사와 같이 다니면서 홍영식과 친해져서 조선에서 국빈 대접을 받고 사진사와 동행해 최초로 고종사진을 찍는 등 잘 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Choson : the Land of Morning Calm>[13]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에는 천문학자로 변신해 자비로 로웰 천문대를 건설, 화성운하와 더불어 화성인이 있다고 주장하여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명왕성(당시 가칭 Planet X)의 궤도를 예측해 탐사하던 중 1916년에 사망했다. 참고로 명왕성은 이후 클라이드 톰보가 로웰이 세운 로웰 천문대에서 1930년 발견하게 된다.

[1] 청나라, 일본과 동급의 외교관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고종이 미국을 신뢰하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2] 명성황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가 1874년 폭탄 테러(운현궁에서 저질렀다는 말이 많다)로 숨지자 사후 양자로 입적하였다.[3]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 집안 출신이며, 더더욱이 민영익의 양아버지 민승호는 여흥 부대 부인(흥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의 친남동생.[4] 친 여동생이 순종황제의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이다.[5] 오위장을 역임한 무관으로, 미국에서는 육군 대령으로 예우했다.[6] 묄렌도르프의 해관 설치 일로 고용되어 온 중국인. 영어 / 중국어 통역을 맡았다.[7]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 - 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다.[8] 화성 운하설의 그 로웰 맞다. 후술된 내용과 해당 항목도 참고하자.[9] 이는 한국어영어가 바로 직통되는 통역관이 당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영어 ↔ 중국어 ↔ 한국어, 혹은 영어 ↔ 일본어 ↔ 한국어로 통역한 셈.[10] 1887년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 때문에 미국에 파견된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 이하영 등은 상대적으로 나이든 축에 속해서 그랬는지 보빙사 일행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인솔한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면서, 특히 월남 이상재 선생이 많이 '더티'(비유가 아니라 원문에도 그리 쓰여있다.)했다고 한다.[11] 다만 2여년만에 귀국해, 최초의 미 대학 조선인 졸업생은 후술되어있는 보빙사 수원 출신 '변수'가 되었다. 참고로 유길준은 근대 시기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기도 하다.[12] 학창 시절 절친으로 지낸 프랑스 후작이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전 재산을 우리탕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후 부동산 투자 등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13] 조선 기행기로,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