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마

 

1. 개요
2. 정사
3. 미디어 믹스


1. 개요


郭馬
(? ~ ?)
삼국시대의 인물로 오나라의 합포태수 수윤 수하의 사병대장이다.

2. 정사


수윤이 계림태수로 임명될 때 수윤이 질병 때문에 광주[1]에 머물러 있었기에 곽마에게 5백의 병사를 주어 먼저 그 곳으로 가서 이민족들을 회유하게 했는데, 279년에 수윤이 죽자 법으로 인해 그의 군대가 다른 곳으로 흩어져야 했으므로 몇 대에 걸쳐 곽마와 정을 쌓은 군사들은 슬퍼하고 있던 도중에 손호는 광주의 호구를 정확하게 조사해 조세를 확실하게 부과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부장 하전, 왕족, 오술, 은흥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광주독 우수 등을 죽인 후에 왕번의 동생 왕저와 왕연이 당대의 명사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스스로 도독교, 광이주제군사, 안남장군이라고 칭해 은흥을 광주자사, 오술을 남해 태수에 임명하면서 하전에게는 창오군, 왕족에게는 시흥군을 공격하도록 시켰다[2].
손호가 등수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보냈지만 시흥에서 왕족에게 막히면서 남해태수 유락이 살해당하거나 광주자사 서기가 축출되는 등 토벌하지 못했으며, 손호는 오가 멸망할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이로써 오는 멸망하는구나"라고 한탄했다. 손호가 도준도황을 시켜 정벌하게 했지만 그 직후에 서진이 오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도준과 도황은 북쪽으로 향했으며, 결국 오는 서진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 후의 곽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서진에 채용되었는지, 그 이전에 죽었는지도 불명이다.
서진육기는 '변망론'에서 서진의 오 정벌을 가리키는 '태강의 전투'와 곽마의 반란을 가리키는 '광주의 난'을 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삼국지하진으로 시작해서 곽마로 끝났다. 또한 이 둘의 나이는 대략 100살 안팎 정도로 차이가 난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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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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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PK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최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답게 능력치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삼국지 9에서 자신의 주인인 수윤과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6/74/40/20. 몽충, 충차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8/71/49/30/50에 특기는 4개.(징병, 혼란, 기염, 반격) 징병 특기를 가지고 있으나 매력이 50밖에 안되는 관계로 없는 것보단 나은 수준에 불과하다. 특이하게 사병을 가진 재야장수로 등장하지만 병력 3천의 일반 보병대라 가치를 많이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의리는 무시, 성격은 저돌, 음주는 대량, 관심은 무예, 물욕은 탐욕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부터 수윤과 헤어져야 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삼국지 11에선 무력, 통솔이 70언저리라 후반부에는 쓰일 수밖에 없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3 PK에서 복귀했는데 능력치는 68/71/47/21. 특기는 훈련 1, 공성 1, 일기 1. 전수특기는 훈련으로 전법은 창병공격진. 그런데 전작에 비해 의리가 경시, 성격은 대담에다 보물흥미에 관심있고 애주도가 보통으로 되어있으며 이상위명이 저돌맹진이다. 일러스트는 간사한 모습으로 검을 쥔 채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8, 무력 71, 지력 47, 정치 21, 매력 50으로 개성은 숲전, 동원, 주의는 할거, 정책은 장사강화 Lv 3, 진형은 장사, 전법은 급습, 대갈, 강습, 친애무장은 수윤, 혐오무장은 없다. '''드디어 17년 만에 주인인 수윤과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었다!'''
삼국전투기에선 고우키로 패러디되었다. 난을 일으켰다는 데서 1컷, 마지막에 관심 가져달라며 또 1컷 등장.

[1] 현재의 중국 광시좡족자치구광동성홍콩 일대.[2] 손호가 점점 세가 기울어가던 오나라에 확인사살을 한 폭군이었으므로 광주 일대에 조세를 부과하려한다는 것은 곧 현지인들을 착취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이 문제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내로라하는 성군들조차 호구조사를 자주 시행하는 것을 꺼리던 판국이었다. 각종 복지정책으로 국민들이 낸 세금을 되돌려주는 현대의 국가와는 달리, 전근대 시대에는 그런 거 없으므로, 세금을 많이 자주 거둔다는 것이 학정의 상징이었다. 곽마를 포함한 광주의 여론이 대폭발할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