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image]
[1]
1. 개요
2. 전개 과정
3. 사건 후
4. 참고 외부 자료
5. 유사 사례


1. 개요


1980년 12월 9일,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고자 사회운동가들이 광주 미국문화원[2]에 불을 지른 방화사건. 이후 우후죽순 일어나는 '''80년대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다. 광주지역의 가톨릭 사회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사회운동의 성격을 띄지만 방화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2. 전개 과정


"광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적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5.18의 배후인 미국을 상징하는 미문화원을 타격해 국내외에 알려내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건 관련자 임종수의 증언#

5.18 당시의 몇몇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신들의 항쟁을 지지하고, 전두환을 몰아낼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도움은 커녕 계엄군의 진압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프리카나 남미 등지의 독재 정권에 대해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미국의 행태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운동권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배반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5.18을 온 몸으로 겪은 광주의 사회운동가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3]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보여준 미국정부의 침묵(혹은 묵인)은 수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에 대한 기대가 헛된 짝사랑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착각해 배신감에 휩싸인 운동권, 민주화운동가들은 미국과 미국으로 대변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4]
그리고 그 중에 가톨릭농민회 광주분회의 회원들이 있었다. 회원이었던 정순철, 김동혁, 임종수는 12월 6일 회합을 가지고 미국에 대한 항의와 규탄을 위해 12월 9일 광주 미국문화원의 방화를 공모한다. 여기에 가톨릭농민회 회원 윤종혁과 박시형이 합류했다. 5명의 일행은 12월 9일 밤 9시 30분 경에 휘발유, 석유, 펜치 등을 들고 미국문화원 건물로 향했다. 당시 광주 미국문화원 건물은 옛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전당) 옆에 있었고, 기와지붕으로 된 단층 건물이었다. 다섯 중 셋은 망을 보기로 하고, 나머지 둘(정순철, 임종수)은 불을 지르고자 건물 지붕으로 올라갔다. 당시 미국문화원 건물은 기와 형태로 지붕을 만들어놓았는데, 방화자들은 기왓장을 몇 장 빼내고 건물 안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는 시멘트 포대 종이를 말아 불을 붙여 떨어뜨리자 건물 곳곳에 불이 타올랐다. 방화 후, 일행은 모두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가 약속한 장소에 합류하고 일단 헤어졌다.
방화 직후 처음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언론은 이 사건의 원인이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라고 밝혔다. 즉 의도적인 방화임을 언론에서 알지 못한 것. 이들은 타 도시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거사를 치르고자 했으나, 농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임종수가 검거됨으로써 덜미를 잡혔다. 임종수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동혁과 박시형은 체포되고 정순철과 윤종형은 도망갔다.. 이후 이들은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는데, 정순철의 경우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해서였다. 사건 관련자들은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 일당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나, 경찰은 이들의 행위를 그저 우발적 행동으로 몰아갔다.[5] 그리고 사건의 파급력을 걱정하여 수사과정도 극비리로 진행하였다. 사건 관련자 임종수가 미국문화원 지붕 위로 현장검증을 나갔을 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문화원 직원이 의심하자 옆의 경찰들이 조사차 이곳으로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이 사건은 '''말 그대로(...) 묻혔다.''' 이후 재판에서 임종수는 징역 2년 6개월, 정순철은 징역 5년 6개월, 나머지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3. 사건 후


이 사건의 여파로 2년 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진다. 사건 관련자였던 정순철은 3천만 원의 거금이 달린 현상수배범이 되었는데, 그의 지명수배전단을 본 김현장이 힌트를 얻어 사건의 발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건 관련자 5명 중 김동혁과 정순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윤종혁은 함평군 의원을 지냈고, 박시형은 농부가 되었으며, 임종수는 광주시청 공보실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사건 이후 광주 미국문화원은 광주지역 운동권의 단골 시위 장소가 되었다. 1982년에는 방화가 다시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1988년에는 연세대 신학생이었던 안내상(배우 안내상 그 사람 맞다)이 시한폭탄을 설치했으나 불발되고, 이후 자수하는 사건도 벌어졌다.1980년대 내내 30건이 넘는 시위 밎 방화가 그곳에서 발생했고, 1989년 5월 광주 미국문화원은 잠정 폐쇄되고 만다.

4. 참고 외부 자료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

5. 유사 사례


[1] 사진 왼쪽의 불타고 있는 차량은 1986년에 출시된 대우 르망인 것을 보아 이 사진이 촬영된 날짜는 80년 이후 추가 방화가 일어났던 87~89 사이일 것이다. [2]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있었으며, 현재는 철거되어 주차장이 들어섰다.[3] 사실 1970년대까지 한국의 운동권,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주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특히 인권외교를 표방하는 지미 카터 정권이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면 모양새를 보면서 미국에 많은 희망을 가졌다. 실제로 5.18 이전 운동권에서는 자유주의 계열의 존 롤스의 책을 주로 읽었고, 일부가 종속이론을 관심을 가지는 정도였다. 마르크스 사상이나 사회주의를 학습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반미 구호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4] 이러한 인식 아래 80년대 운동권은 반미와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마르크스 원전 읽기를 시작으로 레닌주의, 모택동주의, 주체사상, 신좌파, 종속이론 등 전세계의 오만가지 좌경혁명이론을 수입해서 한국 현실에 맞게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진 7~8년간의 이론 투쟁 끝에 결국 운동권은 민족해방을 내세우는 주류 NLPDR과 노동자계급혁명을 주장하는 비주류 PD(정파)로 재편된다.[5] 참고로 경찰의 이러한 행위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도 관련자들의 방화는 5.18과 연관이 있었건만 경찰은 이 연관관계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