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1. 개요


1. 개요


光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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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있는 문화유적.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가 제일 가까이에 있다.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 중 남문으로 '''남소문(南小門)'''이라고도 부른다.[1]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세워지면서 '광희문'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지어졌다. 1422년 세종 때 개축되었고 1719년 숙종 때 문루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1928년때 일부가 훼손되고 광희문 문루를 보수할 돈이 없다는 구실로 혜화문과 함께 철거해서 문루도 사라졌다. 1975년에 도로 확장을 명목으로 홍예까지 철거했다. 다행스럽게도 홍예를 남쪽으로 15미터를 옮겨가 문루와 함께 다시 쌓은게 바로 현위치 광희문의 모습이다. 지금도 광희문 자체는 원위치로 가지 못하였다.
별칭으로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 있다. 전자는 인접한 청계천의 오간수문에서 이어지는 물길 중 하나가 이쪽으로 빠져나갔다는 이유에서 광희문 건축 당시부터 불려왔고, 후자는 조선왕조 시절 한성부 내에서 사망한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광희문을 따라 내려가면 당시 묘지가 많았던 수철리(현 금호동)가 나왔기 때문.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관문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빛처럼 빛나다'''는 이름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짙은 '''통곡문(痛哭門)''' 또는 '''시신문(屍身門)'''이라고도 불렸다.
이 때문인지, 천주교 순교성지 중 한 곳으로, 인근에 순교기념관이 있다. 즉, 남소문, 서소문 모두 순교성지.
이괄의 난 당시 한양도성을 점령했다가 이틀 만에 도주한 이괄과 그 잔당이 이 문을 통과하여 도망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이괄은 부하 장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 의해 살해당한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시킬려는 일제에 맞서 싸우다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광희문 앞에다 놓기도 했었다.
한양도성이 허물어진 후에는 문 주변에 울타리를 쳐놓고 보호하느라 인파들이 가까이 접할 수 없었던 관문이었다. 그 당시 울타리를 넘을 경우 벌금 또는 훈방조치 경고가 있었으나 2014년 2월 17일에 서울시 훈령에 따라 개방되어 앞으로는 인파들이 광희문을 가까이 보거나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문 주변에 있던 울타리는 철거되었다.
한때 수도권 전철 5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청구역은 초창기에 광희문의 이름을 본따서 광희문역이라고 명명하였던 적이 있었다. 광화문역과의 혼동이 우려되고 광희문은 청구역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당시 동대문운동장역)에 더 가까워서 서울 중구에서 역명 변경을 요청해 현재 역명으로 변경하였다고 하는데, 지역 주민들의 민원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광희문이 본래 뜻과는 달리 좋은 의미로 통용되진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넣은 모양이다.
영화 살어리랏다에서도 내레이션을 통해서 언급되었는데 광희문이 아닌 '''시구문'''으로 나온다. 장군의 아들에서는 집단 '''시구문파'''라는 이름을 통해서 나온 적이 있다. 야인시대에도 시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엄밀히 말하자면 세조 때 진짜 남소문을 9번째 문으로서 정남쪽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 지었다가 예종 때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영 좋지 않다는 결정을 내려 폐문했다고 한다. 현재 남산 동쪽의 남소문터가 바로 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