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드코프 K-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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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코프 K-37(Гудков К-37)'''
1. 제원
2. 중기관포로 무장한 전폭기
3. 시피탈니의 세일즈
4. 반론
5. 개조와 실전
6. 남겨준 유산


1. 제원


형식 : 시제 전투기
설계 : 미하일 구드코프
전장 / 전폭 / 전고 : 8.81 m / 9.80 m / 4.40 m
익면적 : 17.62
중량 : 2,860 ~ 3,240 kg
동력 : 클리모프 M-105(Климов М-105) 액랭식 V-12 엔진 (1,180 hp) 1기
최대속도 : 548 km/h
힝속거리 : 550 km
상승한도 : 8,900 m
무장 : 37mm Sh-37(37-мм Ш-37) 중기관포 1문 / 7.62mm ShKAS(ШКАС) 기관총 2정

2. 중기관포로 무장한 전폭기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에 적 지상군의 주력인 장갑차전차 같은 기갑차량과 싸우기 위해 전투기에 대구경 포를 설치하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엔진 출력의 한계로 인하여 전간기에 각국에서 시도된 다양한 시제기 중에서 실전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완성도를 가진 단발 전투폭격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우, 1937년 가을에 보리스 G. 시피탈니(Борис Гавриилович Шпитальный : 1902~1972)가 37mm 구경의 포탄을 발사하는 Sh-37(Ш-37) 중기관포를 발표하면서 이 무기야말로 오랜 숙원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여겨졌다. 원래 이 기관포는 수평 사격시 1,000 m 거리에서 60도 경사진 20mm 두께의 장갑판을 관통하는 위력이 있어 T-26 같은 경전차에 탑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전투기에서 기총 소사를 하게 되면 비행속도와 중력이 더해져 훨씬 파괴적인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무기를 탑재한 전폭기는 소련 공군이 이전부터 연구해오고 있던 장갑 돌격기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런 대구경 기관포와 함께 1,000마력급 엔진이 실용화되자 드디어 단좌 단발기에 중기관포를 갖춰 대전차 공격 능력과 공중전에 모두 대처할 수 있는 전폭기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3. 시피탈니의 세일즈


이와 같은 잊혀진 아이디어를 다시 끄집어 낸 것은 "전투기의 황제"로 불리던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와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의 설계주임 3인방 중에 하나인 미하일 구드코프였다. 1936년 2월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항공산업 회의에 참가한 보리스 시피탈니는 폴리카르포프에게 자신의 제15실험설계국에서 강력한 37mm 자동포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귀가 번쩍 뜨인 폴리카르포프는 시피탈니에게 마침 자신이 그런 무기를 찾고 있었다고 하면서 전차포를 가진 전투기에 관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맞받아 치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 계획을 제일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당시 항공인민병참국의 결정으로 목제 전투기를 개발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미하일 구드코프였다. 구드코프는 중기관포로 무장한 단발 전폭기에 관한 계획을 항공병참국에 제안했고, 이를 검토한 연방 국방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обороны / ГКО)는 같은 해 3월 1일에 시제기 개발과 제작에 관한 허가를 내주게 된다.

4. 반론


반면, 항공인민병참국장인 알렉세이 샤쿠린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굳이 중기관포를 갖추기 위해 별도의 기종을 처음부터 개발하는 것은 중복 투자이니, 당시 주력 전투기로 생산될 예정이 잡혀있던 야코블레프 Yak-1에 37mm 기관포를 설치하는 방안을 고려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 제301설계국의 공장장인 에스킨(Эскин) 기사는 알렉산드르 S. 야코블레프(А. С. Яковлев)와 공동으로 실시한 점검 결과 Sh-37 기관포는 너무 길고 커서 Yak-1에 그대로 설치하면 조종석까지 총몸이 들어오게 되므로 노즈의 길이를 늘려야만 한다며 야크기에 37mm 포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이렇게 해서 구드코프는 Sh-37을 전용 무장으로 삼는 전폭기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기체의 설계가 시작되었을 때, 시제 기관포는 클리모프 엔진의 실린더 사이에 그대로 넣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총몸은 들어가더라도 커다란 37mm 포탄을 공급해줄 탄창과 급탄 기구를 넣을 자리가 모자랐던 것이다. 구드코프의 엔지니어들은 약실에 미리 장전해둔 포탄 1발을 포함해 20발 탄창을 겨우 우겨넣을 수 있었다.

5. 개조와 실전


'''K-37'''이라고 불린 이 실험기는 LaGG-3 전투기 1대를 골라 특별히 개조되었다. 개조기는 1941년 6월까지 58회의 공중 사격을 수행했으며, 그 중 54회는 37mm 중기관포의 실탄을 발사한 실험이었다. 1941년 말까지 구드코프는 30대의 LaGG 전투기에 Sh-37을 장착하는 개조를 했는데 물론 실전용이 아닌 테스트 용도였다. 그렇지만 독소전의 여파로 인해 전선에서 전투기가 부족해지자 같은 해 10월에 모스크바 부근의 전투에서 제43항공사단(43-й авиадивизии)에 파견되어 실전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탑재 기종인 LaGG-3 자체가 결함기로 불릴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기관포 자체도 원래 항공용으로 설계된 것이 아닌데다 생산 결함으로 인해 제대로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피탈니 국장은 이 무기가 성공적이라고 믿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5대의 전차를 전투기로 파괴했다며 보고했지만, 그가 언급한 시기에 공군에서 작성된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K-37은 전선에 없었다.

6. 남겨준 유산


더군다나 제301설계국은 원래 맡겨진 목제 전투기 개발이 최우선 과제였던 탓에 K-37의 개량 작업에 더 이상 자재와 인력을 양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결국 K-37은 개조된 20대가 전부였다. 생산 수단이 없는데다 Sh-37 기관포 자체가 안고 있는 것이 분명한 구조적 결함은 구드코프가 처음 생각한대로 개발을 계속 밀고 나갈 수가 없게 했지만,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새로 개발된 NS-37 기관포를 이용해 라보츠킨야코블레프 설계국에서 실현시킬 수 있었다.
개조된 K-37 전투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원래 사양으로 되돌려져 전선에 보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