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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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vochkin-Gorbunov-Gudkov LaGG-3'''
'''Лавочкин-Горбунов-Гудков ЛаГГ-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서 운영한 제공 전투기. 총 6,582기가 생산되었으며 독소전쟁 초창기에 한 단계 구식인 I-16, 그리고 동시대의 Yak-1, MiG-3과 더불어 운영,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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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최신예기 개발소식에 다급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개발된 저익단엽기로 세묜 라보츠킨(Семён Алексеевич Лавочкин), 블라디미르 고부노프(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미하일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가 의기투합하여 개발한 전투기이다. 그 때문에 세 사람의 성에서 글자를 따와서 LaGG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항공산업의 상태는 상당히 안습한 상황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발전한 금속제 항공기는 항공산업의 주류가 되었으나 금속제 항공기 제작에 없어서는 안될 경합금 듀랄루민의 원재료인 알루미늄 생산에는 대량의 전기를 필요로 했는데 소련의 전기 생산량은 이미 기존의 산업 시설을 돌리는 데에도 포화상태라 일부 대도시는 전쟁 이전부터 이미 제한 송전을 하고있는 절망적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대체제를 찾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에 주목한 것이 바로 러시아에 넘쳐나는 '''목재'''였다. 목재는 필연적으로 듀랄루민과 같은 금속에 비하면 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페놀과 타르 등을 이용한 '''화학처리 공법'''을 적용하여 비행기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얻을 수 있었고 조종계통과 주익 가동부 이외의 부품을 모조리 목재화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단지 LaGG만의 사정이 아니라 당시 소련의 공군기에 죄다 적용되는 일이었다. IL-2마저도 생산사정이 시원찮을 때는 후부 동체에 목재를 대량 사용했다. 심지어 미국조차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목재 사용 비행기를 고려하기도 했다.
1940년 3월 최초 원형기가 비행에 성공하였지만 전투기인데도 '''"조종간이 너무 무거워서 수송기를 모는 것 같다"'''는 불평을 들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성능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고급인력조차 부족했던 탓에 원래 가구를 만들던 인부들로 이것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원형기마다 성능과 안정성이 들쭉날쭉, 엄청난 차이를 보일 정도로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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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LaGG-1으로 명명된 최초 원형기는 제작을 중지하고 시험비행 결과 알려진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하여 개선해나가기 시작했고 기체의 결점이 하나 하나 고쳐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전체적인 중량을 줄이는 쪽에 주안점이 주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축의 23mm 기관포가 보다 경량의 20mm 기관포로 교체되었으며 2정의 12.7mm 기관총도 7.62mm ShKAS 기관총으로 대체되었으며 임무나 용도에 따라 100kg짜리 항공기용 폭탄 2발을 장착하거나 RS-82 로켓 6발을 장착하여 지상공격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이외에 조종성과 안정성을 향상시키기 하여 러더를 재설계 하는등의 개선 작업들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련공군 사령부는 신예 전투기를 개발중인 각 설계국에 신형 전투기들의 최대 항속거리가 1000km를 넘어야 한다는 공문을 하달했다. 이렇게 항속거리를 늘리려면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므로 라포츠킨은 LaGG-1의 주익을 재설계하여 2개의 낙하식 외부연료탱크가 장비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무렵 1,260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신형 M-105PF 엔진이 개발되었고 이 신형기의 엔진으로 장착된다.
이렇게 개량을 받은 신형기는 I-301이라고 새롭게 명명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기체의 제작에 이용한 공장이 GAZ-301이라는 호출기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6월 원형기의 첫 비행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소련공군이 실시한 테스트를 비교적 무난히 통과하여[1] 1940년 10월부터는 양산을 허가받아 본격적인 기체의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소련공군에서는 이 전투기를 LaGG-3로 명명해 실전부대에 배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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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써놓으면 부족한 기술력과 열악한 환경하에서 어찌어찌 해결책을 찾아 나름 준수한 성능을 뽑아낸 기체처럼 보이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정체는 '''2차 세계대전기에 가장 성능 나쁜 전투기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오는 최악의 전투기'''였다.
LaGG-3가 일선에 배치되고 I-16같은 물건만 보다 이 현대적인 디자인을 본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은 처음에는 "우리도 이제 멋진 전투기를 몰게 됐다!"면서 '''그랜드 피아노'''란 별명을 붙여주면서 너도나도 몰아보겠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몇 번 몰아보고 나서는 조종사들이 태도를 바꾸고 비행기를 까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그랜드 피아노에 날개 단 것처럼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LaGG-1 시절부터 조종사들에게 불평을 들었던 비행기의 둔중함과 시원찮은 비행안정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원인은 우선 클리모프 M-105PF 수냉식 엔진이었는데, 가뜩이나 저출력인 주제에 강력한 토크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엔진 자체의 무게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뭘 잘못 건드린 것인지 기체 무게중심이 전방으로 쏠려 있었고 비교적 무거운 기체의 특성까지 더해져 종안전성이 개판이었으며 특히 이/착륙 비행특성이 형편없었다.
이 와중에 클리모프 엔진의 수명은 보장 수명 '''25시간'''으로서 군용으로도 절대 부적합한 수준의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엔진 한가운데 떡하니 달아놓은 ShVAK 기관포의 사격 반동으로 인해 안 그래도 짧은 수명은 더 줄어들었고 제때에 엔진 교체를 해주지 않는다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엔진이었던 것이다.
다른 원인으로 비행기 자체의 무게에 있다. 동일한 엔진을 쓴 Yak-1은 기동성이 더 좋고 속도도 더 빨랐으나, LaGG-3는 상대적으로 더 무거웠다. 사실 익형설계 자체는 Yak-1의 삼각익보다 더 양력효율이 괜찮은 설계라고 하는데 원체 무거운 덕분에 익면하중도 G-2급이고, 출력이 낮다보니 비행속도도 느린편이고 기체의 자중이 무겁다보니 상승률도 망테크.
목재라 방호력도 두랄루민에 비해 낮은데다 항속거리를 늘려보겠답시고 주익에 연료탱크까지 박아놨는데 심지어 항속거리등을 위해 방어력을 약화한 일본군도 하는 방루처리조차도 안 되어있었다.그러고도 당연 '''일본기보다 기동성·내구성·항속거리·무장 등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열악'''했다. 동체의 목재 부품에 페놀수지처리를 하면 내화성이 꽤 좋아지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무 기준이고''' 방루처리도 안 해놓은 연료탱크에 불이라도 붙으면 아주 X되는 전투기. 이쯤되면 이미 스핀, 실속이나 이/착륙시 기체가 전복해버리는 문제는 약과 수준. 가스작동식 플랩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리고 유압과 다르게 가스압은 힘이 딸려서 조종간도 수송기급으로 무거웠고 300kph쯤 넘으면 플랩이 펴지지도 않았으며 레이저백 형식의 캐노피는 후방 시야가 형편없었다.
이런 와중에 전황이 급해지면서 기체 한대라도 전선에 내보내야 했던 시기의 상황과 열악한 공업사정이 맞물려 공정 중 불람품도 다수 사용되어서 옼스놀러지(...)를 이용해 만든 기체들도 많아 기동 중 날개가 떨어져 나간다던가 엔진이 이유없이 폭발한다던가(...) 하는 사고도 다발했으며 상술했듯이 '''가구 장인들까지 제작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기체의 개개 성능이 제멋대로였다.
더욱이 자체적으로 비행가능한 연료 생산이 제대로 안됐던 만큼 기름이 없어 날지 못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소련 공군은 옥탄가 70 정도의 저옥탄가유만 뽑아내고 있던 실정이었는데, 1940년 기준으로 약 3000만톤의 유류 중 약 88만톤의 유류가 이 저옥탄가의 항공유였던 실정.
이런 단점 때문에 생산중단 조치가 내려질 뻔 했으나, 독소전이 개전되고 전투기 소모가 늘어나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소련군은 LaGG-3 양산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기동성의 Yak-1 전투기나 고공성능이 뛰어난 MiG-3과 비교하면 뭔가 내세울게 없는 안습한 스펙이었던 까닭에 배치되는 족족 독일군 전투기에게 격추되었다. 게다가 개떡같은 비행안정성은 물론이고 기체마다 성능이 들쑥날쑥하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아 조종사들을 괴롭혔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점에 시달리다 지친 조종사들은 제식기호 LaGG를 비꼬아서 '''보증서 붙은 나무관짝("ла"кированный "г"арантированный "г"роб)'''이라 부르면서 깠다. LaGG-3를 운용하는 일선 전투기 부대 지휘관들이 '''"우리 부대는 관을 조종하고 있다"'''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계속 생산이 된 것은 전투기 한 기가 아쉬운 상황에서 생산성이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2] 실제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1941년 9월 2일 총 45기의 LaGG-3를 공급받은 제 44 항공연대는 독일공군과의 전투에서 한달만에 전력의 2/3에 가까운 29기 피격이라는 엄청난 전투손실을 입고 16기만이 살아남았을 정도. 남은건 결국 생긴거 하나만큼은 미래적이고도 세련되게 잘 빠진 멋드러진 외형밖에 없었다.
결국 전황이 안정되고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자 스탈린이 '''"늬들 거지같은 LaGG-3 때려치고 야크기 뽑아!"'''라고 지시를 하면서 LaGG-3는 생산이 중지되었다. 사실 스탈린 입장에서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넣지 않은 것만 해도 자비를 베푼 격이나 마찬가지라 이후 절치부심한 라보츠킨은 이 전투기에 공랭식 엔진을 얹어 저공에서 소련 전투기중 최상의 성능을 내던 La-5, La-7을 설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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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도 노획된 적이 있는데 1942년, 가족에 대한 사상적 탄압으로 고초를 겪고 있던 소련 극동공군의 어느 상사는 일본의 선전에 경도되어 자신의 비행기 조종 설명서와 기밀 문서와 같이 LaGG-3을 타고 만주의 자무쓰 비행장으로 망명을 하였으나 왠 난데없는 소련기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본 일본군은 처음엔 격렬한 대공포화로 대응했지만 곧 귀순기라는 걸 알아채어 비행장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대공포화에 기체 일부가 손상되어 동체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착륙 과정에서 냉각기와 프로펠러가 손상되었지만 하얼빈의 야전 수리장에서 수리되어 비행 가능 상태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래부분 랜딩기어 커버가 제거되고 피트관이 일본제로 바뀌었다. 이후 기체에 히노마루가 그려진 채 비행제85전대 전대장 야마모토 고로 등의 파일럿들에 의해 시험 비행이 실시되었다. 일본군은 LaGG-3 동체 대부분이 목재로 만들어진 걸 보고 비웃었고[3] 엔진또한 일본의 사카에 엔진에 비교 대상이 아니였다. 하야부사와의 모의 공중전 결과 하야부사랑 비교해서는 속도 빼고는 모든 면에서 뒤쳐지게 되는데 조종간은 노획했던 I-16보다 훨씬 더 무거웠고 일본기의 기동성에 비하면 돌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본 파일럿들은 조종하기 까다로웠다고 한다. 심지어 속도도 저속기인 하야부사와 비교 해서 그런거지 하야테와 비교한다면 암담한 수준이다. 기체는 급히 수리된지라 냉각기와 프로펠러 문제는 끊임없이 시험비행 파일럿들을 괴롭혔고, 일본 본토로 이송되어 가노츠 비행장에서 본격적인 시험비행을 하려던 중 브레이크가 고장나 착륙에 실패하고 산산조각나버려 수리 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 이 기체의 후방부로 보내 참고용 교보재로써 사용됐다.[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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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vochkin-Gorbunov-Gudkov LaGG-3'''
'''Лавочкин-Горбунов-Гудков ЛаГГ-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서 운영한 제공 전투기. 총 6,582기가 생산되었으며 독소전쟁 초창기에 한 단계 구식인 I-16, 그리고 동시대의 Yak-1, MiG-3과 더불어 운영, '''활약'''했다.
1.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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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 : 8.81m
- 전폭 : 9.80m
- 전고 : 2.54m
- 익면적 : 17.4㎡
- 엔진 : 클리모프 M-105PF V자형 12기통 액랭식 엔진, 출력 1,260마력
- 자체중량 : 2,205kg
- 전비중량 : 2,620kg
- 최대탑재중량 : 3,190kg
- 최대속도 : 575km/h
- 항속거리 : 1,000km
- 최대상승고도 : 9,700 m (31,825 ft)
- 상승속도 : 14.9 m/s (2,926 ft/min)
- 익면하중 : 191.1 kg/m² (31 lb/ft²)
- 무장
2. 개발
유럽의 최신예기 개발소식에 다급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개발된 저익단엽기로 세묜 라보츠킨(Семён Алексеевич Лавочкин), 블라디미르 고부노프(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미하일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가 의기투합하여 개발한 전투기이다. 그 때문에 세 사람의 성에서 글자를 따와서 LaGG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항공산업의 상태는 상당히 안습한 상황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발전한 금속제 항공기는 항공산업의 주류가 되었으나 금속제 항공기 제작에 없어서는 안될 경합금 듀랄루민의 원재료인 알루미늄 생산에는 대량의 전기를 필요로 했는데 소련의 전기 생산량은 이미 기존의 산업 시설을 돌리는 데에도 포화상태라 일부 대도시는 전쟁 이전부터 이미 제한 송전을 하고있는 절망적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대체제를 찾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에 주목한 것이 바로 러시아에 넘쳐나는 '''목재'''였다. 목재는 필연적으로 듀랄루민과 같은 금속에 비하면 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페놀과 타르 등을 이용한 '''화학처리 공법'''을 적용하여 비행기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얻을 수 있었고 조종계통과 주익 가동부 이외의 부품을 모조리 목재화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단지 LaGG만의 사정이 아니라 당시 소련의 공군기에 죄다 적용되는 일이었다. IL-2마저도 생산사정이 시원찮을 때는 후부 동체에 목재를 대량 사용했다. 심지어 미국조차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목재 사용 비행기를 고려하기도 했다.
1940년 3월 최초 원형기가 비행에 성공하였지만 전투기인데도 '''"조종간이 너무 무거워서 수송기를 모는 것 같다"'''는 불평을 들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성능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고급인력조차 부족했던 탓에 원래 가구를 만들던 인부들로 이것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원형기마다 성능과 안정성이 들쭉날쭉, 엄청난 차이를 보일 정도로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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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LaGG-1으로 명명된 최초 원형기는 제작을 중지하고 시험비행 결과 알려진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결하여 개선해나가기 시작했고 기체의 결점이 하나 하나 고쳐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전체적인 중량을 줄이는 쪽에 주안점이 주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축의 23mm 기관포가 보다 경량의 20mm 기관포로 교체되었으며 2정의 12.7mm 기관총도 7.62mm ShKAS 기관총으로 대체되었으며 임무나 용도에 따라 100kg짜리 항공기용 폭탄 2발을 장착하거나 RS-82 로켓 6발을 장착하여 지상공격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이외에 조종성과 안정성을 향상시키기 하여 러더를 재설계 하는등의 개선 작업들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련공군 사령부는 신예 전투기를 개발중인 각 설계국에 신형 전투기들의 최대 항속거리가 1000km를 넘어야 한다는 공문을 하달했다. 이렇게 항속거리를 늘리려면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므로 라포츠킨은 LaGG-1의 주익을 재설계하여 2개의 낙하식 외부연료탱크가 장비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무렵 1,260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신형 M-105PF 엔진이 개발되었고 이 신형기의 엔진으로 장착된다.
이렇게 개량을 받은 신형기는 I-301이라고 새롭게 명명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기체의 제작에 이용한 공장이 GAZ-301이라는 호출기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6월 원형기의 첫 비행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소련공군이 실시한 테스트를 비교적 무난히 통과하여[1] 1940년 10월부터는 양산을 허가받아 본격적인 기체의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소련공군에서는 이 전투기를 LaGG-3로 명명해 실전부대에 배치하게 된다.
3.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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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써놓으면 부족한 기술력과 열악한 환경하에서 어찌어찌 해결책을 찾아 나름 준수한 성능을 뽑아낸 기체처럼 보이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정체는 '''2차 세계대전기에 가장 성능 나쁜 전투기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오는 최악의 전투기'''였다.
LaGG-3가 일선에 배치되고 I-16같은 물건만 보다 이 현대적인 디자인을 본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은 처음에는 "우리도 이제 멋진 전투기를 몰게 됐다!"면서 '''그랜드 피아노'''란 별명을 붙여주면서 너도나도 몰아보겠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몇 번 몰아보고 나서는 조종사들이 태도를 바꾸고 비행기를 까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그랜드 피아노에 날개 단 것처럼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LaGG-1 시절부터 조종사들에게 불평을 들었던 비행기의 둔중함과 시원찮은 비행안정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원인은 우선 클리모프 M-105PF 수냉식 엔진이었는데, 가뜩이나 저출력인 주제에 강력한 토크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엔진 자체의 무게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뭘 잘못 건드린 것인지 기체 무게중심이 전방으로 쏠려 있었고 비교적 무거운 기체의 특성까지 더해져 종안전성이 개판이었으며 특히 이/착륙 비행특성이 형편없었다.
이 와중에 클리모프 엔진의 수명은 보장 수명 '''25시간'''으로서 군용으로도 절대 부적합한 수준의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엔진 한가운데 떡하니 달아놓은 ShVAK 기관포의 사격 반동으로 인해 안 그래도 짧은 수명은 더 줄어들었고 제때에 엔진 교체를 해주지 않는다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엔진이었던 것이다.
다른 원인으로 비행기 자체의 무게에 있다. 동일한 엔진을 쓴 Yak-1은 기동성이 더 좋고 속도도 더 빨랐으나, LaGG-3는 상대적으로 더 무거웠다. 사실 익형설계 자체는 Yak-1의 삼각익보다 더 양력효율이 괜찮은 설계라고 하는데 원체 무거운 덕분에 익면하중도 G-2급이고, 출력이 낮다보니 비행속도도 느린편이고 기체의 자중이 무겁다보니 상승률도 망테크.
목재라 방호력도 두랄루민에 비해 낮은데다 항속거리를 늘려보겠답시고 주익에 연료탱크까지 박아놨는데 심지어 항속거리등을 위해 방어력을 약화한 일본군도 하는 방루처리조차도 안 되어있었다.그러고도 당연 '''일본기보다 기동성·내구성·항속거리·무장 등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열악'''했다. 동체의 목재 부품에 페놀수지처리를 하면 내화성이 꽤 좋아지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무 기준이고''' 방루처리도 안 해놓은 연료탱크에 불이라도 붙으면 아주 X되는 전투기. 이쯤되면 이미 스핀, 실속이나 이/착륙시 기체가 전복해버리는 문제는 약과 수준. 가스작동식 플랩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리고 유압과 다르게 가스압은 힘이 딸려서 조종간도 수송기급으로 무거웠고 300kph쯤 넘으면 플랩이 펴지지도 않았으며 레이저백 형식의 캐노피는 후방 시야가 형편없었다.
이런 와중에 전황이 급해지면서 기체 한대라도 전선에 내보내야 했던 시기의 상황과 열악한 공업사정이 맞물려 공정 중 불람품도 다수 사용되어서 옼스놀러지(...)를 이용해 만든 기체들도 많아 기동 중 날개가 떨어져 나간다던가 엔진이 이유없이 폭발한다던가(...) 하는 사고도 다발했으며 상술했듯이 '''가구 장인들까지 제작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기체의 개개 성능이 제멋대로였다.
더욱이 자체적으로 비행가능한 연료 생산이 제대로 안됐던 만큼 기름이 없어 날지 못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소련 공군은 옥탄가 70 정도의 저옥탄가유만 뽑아내고 있던 실정이었는데, 1940년 기준으로 약 3000만톤의 유류 중 약 88만톤의 유류가 이 저옥탄가의 항공유였던 실정.
4. 실전
이런 단점 때문에 생산중단 조치가 내려질 뻔 했으나, 독소전이 개전되고 전투기 소모가 늘어나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소련군은 LaGG-3 양산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기동성의 Yak-1 전투기나 고공성능이 뛰어난 MiG-3과 비교하면 뭔가 내세울게 없는 안습한 스펙이었던 까닭에 배치되는 족족 독일군 전투기에게 격추되었다. 게다가 개떡같은 비행안정성은 물론이고 기체마다 성능이 들쑥날쑥하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아 조종사들을 괴롭혔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점에 시달리다 지친 조종사들은 제식기호 LaGG를 비꼬아서 '''보증서 붙은 나무관짝("ла"кированный "г"арантированный "г"роб)'''이라 부르면서 깠다. LaGG-3를 운용하는 일선 전투기 부대 지휘관들이 '''"우리 부대는 관을 조종하고 있다"'''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계속 생산이 된 것은 전투기 한 기가 아쉬운 상황에서 생산성이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2] 실제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1941년 9월 2일 총 45기의 LaGG-3를 공급받은 제 44 항공연대는 독일공군과의 전투에서 한달만에 전력의 2/3에 가까운 29기 피격이라는 엄청난 전투손실을 입고 16기만이 살아남았을 정도. 남은건 결국 생긴거 하나만큼은 미래적이고도 세련되게 잘 빠진 멋드러진 외형밖에 없었다.
5. 말로
결국 전황이 안정되고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자 스탈린이 '''"늬들 거지같은 LaGG-3 때려치고 야크기 뽑아!"'''라고 지시를 하면서 LaGG-3는 생산이 중지되었다. 사실 스탈린 입장에서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넣지 않은 것만 해도 자비를 베푼 격이나 마찬가지라 이후 절치부심한 라보츠킨은 이 전투기에 공랭식 엔진을 얹어 저공에서 소련 전투기중 최상의 성능을 내던 La-5, La-7을 설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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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도 노획된 적이 있는데 1942년, 가족에 대한 사상적 탄압으로 고초를 겪고 있던 소련 극동공군의 어느 상사는 일본의 선전에 경도되어 자신의 비행기 조종 설명서와 기밀 문서와 같이 LaGG-3을 타고 만주의 자무쓰 비행장으로 망명을 하였으나 왠 난데없는 소련기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본 일본군은 처음엔 격렬한 대공포화로 대응했지만 곧 귀순기라는 걸 알아채어 비행장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대공포화에 기체 일부가 손상되어 동체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착륙 과정에서 냉각기와 프로펠러가 손상되었지만 하얼빈의 야전 수리장에서 수리되어 비행 가능 상태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래부분 랜딩기어 커버가 제거되고 피트관이 일본제로 바뀌었다. 이후 기체에 히노마루가 그려진 채 비행제85전대 전대장 야마모토 고로 등의 파일럿들에 의해 시험 비행이 실시되었다. 일본군은 LaGG-3 동체 대부분이 목재로 만들어진 걸 보고 비웃었고[3] 엔진또한 일본의 사카에 엔진에 비교 대상이 아니였다. 하야부사와의 모의 공중전 결과 하야부사랑 비교해서는 속도 빼고는 모든 면에서 뒤쳐지게 되는데 조종간은 노획했던 I-16보다 훨씬 더 무거웠고 일본기의 기동성에 비하면 돌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본 파일럿들은 조종하기 까다로웠다고 한다. 심지어 속도도 저속기인 하야부사와 비교 해서 그런거지 하야테와 비교한다면 암담한 수준이다. 기체는 급히 수리된지라 냉각기와 프로펠러 문제는 끊임없이 시험비행 파일럿들을 괴롭혔고, 일본 본토로 이송되어 가노츠 비행장에서 본격적인 시험비행을 하려던 중 브레이크가 고장나 착륙에 실패하고 산산조각나버려 수리 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 이 기체의 후방부로 보내 참고용 교보재로써 사용됐다.[4]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