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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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과정
2.1. 전쟁 직후
2.2. 세계 권력의 이동
2.3. 군사 기술 발전
2.4. 전간기의 끝
3. 기타


1. 개요


'''전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의 빈 과도기를 말하는 단어다. 연도로 따지자면 일반적으로 1918년부터 1939년까지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일을 중일전쟁의 개전일로 본다면 1937년까지로도 볼 수 있다. 파시즘군국주의, 그리고 국가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했던 시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의 이름을 따 베르사유 체제라고도 불린다.

2. 과정



2.1. 전쟁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피해는 막대했고, 유럽 국가들은 전후 피해로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전제군주제 국가들, 이를테면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은 전제군주정이 폐지되게 된다. 그 중 독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고 러시아 제국에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되는 등 유럽 국가들에게 공화주의적 열풍이 불던 시기였다. 물론 공화정민주공화정은 다르기도 하고, 민주 공화국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나치가 대두하고 소련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가 확립되는등 독재가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후일의 일이지만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으로 에스파냐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제국들의 급격한 붕괴로 정세가 불안해졌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전승국이었지만, 격전지가 되거나, 전쟁 초반 서부전선의 주역을 맡아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청년인구의 1/3 가량이 증발하는 등 인적자원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영국은 초기에 참전 준비가 안된 상태여서 육군이 확충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프랑스는 독일과 영국에 비해서 인구가 딸렸기에 같은 피해 규모라도 프랑스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2.2. 세계 권력의 이동


이 시기에 세계 경제의 중심은 유럽이 아닌 북아메리카, 더 정확하게는 '''미국'''으로 옮겨 갔으며, 역설적으로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대공황이 세계 전체로 퍼져 세계 대공황을 만들어 냈다는 것으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지금의 미국과는 다르게, 전간기의 미국은 철저히 고립주의적인 국가였다. 그 일본 제국과도 외교로 해결하려 했을 정도. 전간기의 일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초중반에도 미국의 고립주의적 성향은 여전해 렌드리스 정책으로 연합국에게 도움을 줬을지언정 참전은 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이 당시 미국이 아직까지 세계 무대를 다스리는 패권국가로서의 역할을 원하지 않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미 1890년대에 미국은 전 유럽의 생산량을 앞서기 시작했으며, 서부개척이 끝난 이후에는 그야말로 미친듯이 발전했기에 원한다면 얼마든지 세계 무대에 나설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은 것은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하는 고립주의 노선 때문이었다.
추축국 입장에서는 무기는 줬지만 참전은 하지 않았다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겠지만, 법적으로 따지자면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추축국도 렌드리스에 따라 무기를 수령할 수 있었다.[1]

2.3. 군사 기술 발전


전쟁발전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인류 기술사에서 기술의 발전을 급격히 촉진시키는 촉진제의 역할을 해 왔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군사 기술 개발에 쏟지 않으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이 빠른 기술 발전을 가져오는 것. 당장 1차 대전만 해도 참호전으로 인해 전쟁 전에 남아있던 전열보병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초기 형태의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고, 최초로 탱크가 나타났다. 또 2차 대전은 1차 대전 때 모습을 보이던 복엽기가 사장세에 들었으며, 기존의 참호전에서 기동전, 화력전으로 전술이 변하고 기존의 거함 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이 항공모함의 재조명으로 인해 사장되고, 본격적으로 항공모함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기술 발전은 철저하게 군사 기술에만 집중된 것으로 나머지 문화, 사회, 일반 기술은 모두 쇠퇴하므로 전쟁으로 인해 인류 자체가 진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간, 끔찍했던 참호전을 견뎌낸 유럽 국가는 그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차, 비행기 등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1차 세계 대전의 패러다임이었던 참호전을 단번에 깨부수고, 기동전 또는 화력전으로 대표되는 현대 군사 교리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마치 기관총이 발명되면서 전열보병이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이러한 서유럽의 군사기술 발전은 리프 전쟁 당시 리프 봉기군을 진압하는데 크게 쓰였다.
비군사 분야의 경우 텔레비전이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

2.4. 전간기의 끝


한편, 이 시기의 동아시아에선 중화민국국민당의 두 차례의 북벌반장전쟁으로 연달아 대륙에 흝어진 각지 군벌들을 격파하는 등 조금씩 중원제패의 길을 걷고 있었고, 조선은 여전히 일본 제국에게 합병당해 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 제국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잠깐의 호황을 끝으로 군국주의로 급격히 경도되었다. 결국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키며 국제정세를 위협하더니 급기야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해버리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한 다음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컬어 '''영구적인 평화가 아니라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휴전이 될 것'''[2]이라고 했는데,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지도 못했으며,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당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1320억 마르크라는 미친 배상금으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전 국민이 경제난에 시달리면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또, 후에 도스 안과 영 안으로 배상금을 감면해주기는 했으나, 이미 아돌프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즘 극단주의가 들어선 뒤였고, 결국 독일은 라인란트를 기점으로 재무장 완료를 선언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국제연맹은 휴지통에 처박혔다. 미국은 먼로주의와 국민여론 때문에,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국제연맹에서 빠졌고, 유엔과 달리 자체적인 무력행사 수단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이 강한 두 강대국이 빠진데다가, 국제연맹의 제재를 어기더라도 그것을 강제할 무력수단이 전혀 없다보니 그야말로 이름뿐인 연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추축국의 공격을 시작으로 또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휘말리게 된다.

3. 기타


전간기(Interwar)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을 말하지만, 같은 혹은 유사한 세력과 반대편 역시 유사한 세력이 여러차례 전쟁을 벌이는데 중간에 공백이 있는 경우 전간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 중간의 휴식기를 Interwar라 부르기도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3차례 벌어진 포에니 전쟁의 경우도 중간의 휴식기에 가끔 이 단어를 쓰기도 한다.
한편, 전쟁은 전쟁이라도 전혀 다른 별개의 세력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별개의 전쟁의 경우에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병자호란은 보통 전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시대에 대하여서는 전쟁 시기까지 포함하여 '양란(兩亂) 시기'라는 말을 주로 쓰는 편이다.

[1] 렌드리스가 가지는 가장 큰 상징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 연합군의 물자의 대부분을 미국 혼자 지원했다.'는 것에 있다. 물론 당시 영국, 프랑스, 소련도 자체적으로 군사물자 생산은 가능했고 상당부분은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있었으나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 내전, 대숙청,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에게 탈탈 털린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물자생산이 불가능했으며, 영국 역시 대공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미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휘말렸고, 프랑스는 이미 본토가 나치 독일에 먹혀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동시에 상대해야했고 인도양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까지 상대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장비들이 적의 장비보다 질적으로도 우월했다.[2] "This is not a peace. It is an armistice for 20 years.", Memoires (1963) by Paul Reynaud, vol. 2, p.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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