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구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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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항공 엔지니어로, 항공인민병참국의 기술부장을 거쳐 LaGG-1과 LaGG-3 전투기를 만들어낸 제301실험설계국의 설계 주임 3인방 중 한 명.
제정 러시아 시대인 1904년 12월 8일[1] 에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유전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가족으로 태어난 미하일 구드코프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기술에 대한 이해가 빠른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10년간의 의무 교육을 마친 구드코프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바쿠에 있는 국립 석유아카데미 폴리테크닉 대학의 기계공학과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따냈다. 소련 치하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된 탓에 청년 구드코프는 노농적군(РККА)에 입대했는데, 어린 나이에 공학박사 학위를 딴 수재를 그대로 썩힐 수가 없었던 군부는 이 청년을 레닌그라드 군사이론학교(Ленинградскую Военно-теоретическую )에 진학시켰다. 여기서 조종 과정을 선택한 구드코프는 조종면허를 따고 공군에서 조종사로 4년간 복무를 했다.
1928년에 군에서 제대한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제39호 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39)에 배치받아 말단 제도기사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구드코프 기사는 오소아비아힘 제1항공창(№ 1 имени Осоавиахима)에서 주임 엔지니어이자 부공장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 모스크바 항공연구소(Моско́вский авиацио́нный институ́т : МАИ)를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고, 1934년에는 연구소의 항공공학부에서 설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공업화 정책을 추진 중이던 소비에트 연방에서 항공기 설계자는 매우 귀중한 두뇌로 취급받았다. 구드코프는 중앙유체역학 연구소(ЦАГИ)에 들어가 겨우 29살의 나이에 실험부서의 설계주임으로 근무하게 된다.
1937년부터 구드코프 기사는 극동 하바롭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레(Комсомольск-на-Амуре)에 있는 제126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126)으로 옮겨가 수석 엔지니어 겸 책임자 자리에 앉혀졌다. 그와 동시에, 국방산업인민총국(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оборон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 НКОП)에서 항공산업을 관할하는 제1총무국의 수석 엔지니어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1939년 1월부터 이 부서는 항공인민병참국(НКАП)으로 독립하게 된다. 항공병참국에서 계속 유임하게 된 그는 항공기 제4부서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 자리에 세미욘 라보츠킨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는 부주임으로 밀려나게 된다.
1939년 4월 말부터 제1부서장인 블라디미르 P. 고르부노프와 제4부서장을 맡고 있던 세미욘 라보치킨은 항공병참국장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비행기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두랄루민 같은 경금속이 아니라 당시 건축자재로 개발된 일종의 집성목으로, 델타 목재(дельта-древесины)라고 불리는 재료였다. 이 청원은 러시아 본토에서 채굴되는 보크사이트 매장량이 적은데다 그 무렵 전력 생산량이 부족해 알루미늄 같은 경금속을 제련하는데 곤란을 겪고있던 소련 당국으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것이어서, 곧바로 이에 필요한 인력 집단을 끌어모았다. 5월 말에 블라디미르 고르부노프와 세미욘 라보츠킨, 그리고 구드코프가 모여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이 모스크바주 힘키(Химки)에 세워졌다. 이 싱크 탱크의 목적은 단 하나, 델타 목재 같은 대체 재료를 이용해 일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선 전투기의 시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같은 해 7월부터 세 명의 엔지니어들은 머리를 맞대고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셋 중에서 나이는 두 번째였지만 원만한 인품을 지니고 항공인민병참국에서 오래 근무했던 고르부노프가 전체 작업을 지휘하게 된다. 8월 29일, 가칭 I-301로 이름붙여진 시제 전투기 2대의 제작에 관한 제243호 결의안(Совнаркома № 243)이 항공병참국에서 발표되었고 곧바로 제작에 돌입했다.
이듬해인 1940년 10월 10일에는 제430호 결의안에 따라 I-301의 개량형인 LaGG-3가 생산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14일에 구드코프는 나이는 가장 적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전투기 생산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타간로크로 건너가게 된 고르부노프 대신 제301설계국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연장자에다 구드코프의 상급자였던 세미욘 라보츠킨은 이 조치에 내심 크게 반발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침공하면서 독소전이 터지고 말았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는 전선이 계속 밀리자 10월 16일부로 OKB-301은 제153호 공장(заводом № 301)과 함께 노보로시스크(Новосибирск)로 철수하라는 소개령을 내리게 된다. 12월이 되자 항공산업부 장관인 알렉세이 I. 샤쿠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 1904~1975)은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고려하여 구드코프에게 스몰렌스크주 비야즈마(Вязьмой) 비행장에서 예비시험을 통과한 시제 전투기 Gu-82와 구드코프 K-37(Гудков К-37)을 즉시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전투기들은 원래대로라면 고리키(Горький :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있는 제21호 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21)에서 생산에 들어갔어야만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 명령은 철회되었다.
1942년 4월, 구드코프와 그가 이끄는 OKB-301의 일부가 힘키로 돌아왔고, 9월에는 노보로시스크로 피난갔던 OKB-301이 고리키의 제156호 공장(завода № 156)으로 옮겨오게 된다. 1943년에 미하일 구드코프는 미국제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의 설계 사상을 반영시킨 실험 전투기인 구드코프 Gu-1(Гудков Гу-1)의 개발에 착수했으나, 이 기체도 얼마 안가 항공병참국으로부터 생산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1943년 6월 12일, 완성된 Gu-1의 1호기가 그로모프 비행센터의 활주로에 굴러나왔다. 이 시험비행을 위해 Gu-82를 테스트하면서 구드코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던 테스트 파일럿 알렉세이 I. 니카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Никашин : 1906~1943) 중령이 자진해서 조종간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엔진이 동체 중앙에 달린 이 시제기의 처녀비행은 니카쉰 중령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으며 재앙으로 끝났다.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구드코프는 항공기 조립에 필요한 계산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결론내리고 맹비난을 받게 된다. 항공산업부 장관 알렉세이 샤쿠린은 스탈린에게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제2국의 수석 설계주임이었던 미하일 구드코프를 직위해제하는 한편, 일체 항공기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안했고 지도자 스탈린은 이에 동의했다.
1943년 7월 6일에 내려진 항공병참국의 공식 명령에 따라, 미하일 구드코프는 수석 설계자 칭호를 박탈당하고 그와 함께 근무했던 엔지니어들은 타슈켄트에 있는 기술관리부(Отдел технического контроля : OTC) 산하의 제84호 공장(ОТК завода № 84)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즈음 세미욘 라보츠킨은 La-5 전투기의 성공으로 인해 설계국장 가운데 발언권이 커져 있었고 그는 여전히 구드코프의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귀양 생활을 하던 구드코프는 라보츠킨의 지시에 따라 제21실험설계국(OKB-21)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 독소전에서 소련이 승리를 거둔 후인 1946년까지 구드코프는 모스크바주 루이토프(Реутов)에 있는 제51호 공장(заводе № 51)에서 부수석 설계자로 근무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는 모스크바주 두브나(Дубна)의 제458항공창(авиазавода № 458)에서 실험과 작업 관리자로 일했고, 1948년 12월부터 독일에서 가져온 로켓 정찰기인 실험기 346(Экспериментальный самолет 346)의 책임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이 부서는 독일 공군으로부터 노획한 각종 군용기와 실험기들을 실험하고 분석하며, 때에 따라서는 역설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구드코프처럼 조종 경험이 있으면서 공학 지식이 풍부한 이에게는 딱 알맞는 일이었다.
1953년부터 2년 동안 구드코프는 항공산업용 기계설비 생산을 하고 있던 제491호 공장(заводе № 491)에서 제491실험설계국(OKB-491)의 국장 자리에 앉혀졌다. 설계국장에서 좌천된지 딱 10년만의 일이었다. 1956년에는 고고도 정찰용 비행선과 성층권 기구를 개발하기 위해 제424실험설계국(OKB-424)의 설계주임을 겸직하게 된다. 이때 실험과 개발 경험을 밑천으로 1959년부터는 우니베르살 공장(заводе Универсал)에서 우주선과 사출좌석에 쓰이는 낙하산 시스템을 생산했다.
구드코프의 지휘 하에 3종류의 시제 전투기 Gu-82(1941년 3월)과 K-37(1941년 5월), Gu-1(1943년 6월)이 만들어졌고, Gu-2와 Gu-VD 2종류의 실험기를 연구 및 설계했으며 나치 독일이 만들다만 여러 실험기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1983년 3월 19일에 허혈성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미하일 구드코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프레오브라젠스크 묘지(Преображенском кладбище)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에는 스탈린 상에 빛나는 연방노동영웅을 기리는 비행기를 본딴 작은 청동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스탈린 상 (Сталинская премия : 1941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메달
노력 적기훈장(орден Трудового Красного Знамени : 1945년)
미하일 이바노비치 구드코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удков : 1904~1983)
1. 소개
소련의 항공 엔지니어로, 항공인민병참국의 기술부장을 거쳐 LaGG-1과 LaGG-3 전투기를 만들어낸 제301실험설계국의 설계 주임 3인방 중 한 명.
2. 유년 시절
제정 러시아 시대인 1904년 12월 8일[1] 에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유전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가족으로 태어난 미하일 구드코프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기술에 대한 이해가 빠른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10년간의 의무 교육을 마친 구드코프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바쿠에 있는 국립 석유아카데미 폴리테크닉 대학의 기계공학과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따냈다. 소련 치하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된 탓에 청년 구드코프는 노농적군(РККА)에 입대했는데, 어린 나이에 공학박사 학위를 딴 수재를 그대로 썩힐 수가 없었던 군부는 이 청년을 레닌그라드 군사이론학교(Ленинградскую Военно-теоретическую )에 진학시켰다. 여기서 조종 과정을 선택한 구드코프는 조종면허를 따고 공군에서 조종사로 4년간 복무를 했다.
3. 엔지니어 생활
1928년에 군에서 제대한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제39호 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39)에 배치받아 말단 제도기사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구드코프 기사는 오소아비아힘 제1항공창(№ 1 имени Осоавиахима)에서 주임 엔지니어이자 부공장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 모스크바 항공연구소(Моско́вский авиацио́нный институ́т : МАИ)를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고, 1934년에는 연구소의 항공공학부에서 설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공업화 정책을 추진 중이던 소비에트 연방에서 항공기 설계자는 매우 귀중한 두뇌로 취급받았다. 구드코프는 중앙유체역학 연구소(ЦАГИ)에 들어가 겨우 29살의 나이에 실험부서의 설계주임으로 근무하게 된다.
1937년부터 구드코프 기사는 극동 하바롭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레(Комсомольск-на-Амуре)에 있는 제126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126)으로 옮겨가 수석 엔지니어 겸 책임자 자리에 앉혀졌다. 그와 동시에, 국방산업인민총국(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оборон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 НКОП)에서 항공산업을 관할하는 제1총무국의 수석 엔지니어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1939년 1월부터 이 부서는 항공인민병참국(НКАП)으로 독립하게 된다. 항공병참국에서 계속 유임하게 된 그는 항공기 제4부서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 자리에 세미욘 라보츠킨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는 부주임으로 밀려나게 된다.
1939년 4월 말부터 제1부서장인 블라디미르 P. 고르부노프와 제4부서장을 맡고 있던 세미욘 라보치킨은 항공병참국장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비행기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두랄루민 같은 경금속이 아니라 당시 건축자재로 개발된 일종의 집성목으로, 델타 목재(дельта-древесины)라고 불리는 재료였다. 이 청원은 러시아 본토에서 채굴되는 보크사이트 매장량이 적은데다 그 무렵 전력 생산량이 부족해 알루미늄 같은 경금속을 제련하는데 곤란을 겪고있던 소련 당국으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것이어서, 곧바로 이에 필요한 인력 집단을 끌어모았다. 5월 말에 블라디미르 고르부노프와 세미욘 라보츠킨, 그리고 구드코프가 모여 제301실험설계국(ОКБ-301)이 모스크바주 힘키(Химки)에 세워졌다. 이 싱크 탱크의 목적은 단 하나, 델타 목재 같은 대체 재료를 이용해 일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선 전투기의 시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같은 해 7월부터 세 명의 엔지니어들은 머리를 맞대고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셋 중에서 나이는 두 번째였지만 원만한 인품을 지니고 항공인민병참국에서 오래 근무했던 고르부노프가 전체 작업을 지휘하게 된다. 8월 29일, 가칭 I-301로 이름붙여진 시제 전투기 2대의 제작에 관한 제243호 결의안(Совнаркома № 243)이 항공병참국에서 발표되었고 곧바로 제작에 돌입했다.
이듬해인 1940년 10월 10일에는 제430호 결의안에 따라 I-301의 개량형인 LaGG-3가 생산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14일에 구드코프는 나이는 가장 적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전투기 생산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타간로크로 건너가게 된 고르부노프 대신 제301설계국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연장자에다 구드코프의 상급자였던 세미욘 라보츠킨은 이 조치에 내심 크게 반발했다.
4. 독소전 발발
1941년 6월 22일에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침공하면서 독소전이 터지고 말았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는 전선이 계속 밀리자 10월 16일부로 OKB-301은 제153호 공장(заводом № 301)과 함께 노보로시스크(Новосибирск)로 철수하라는 소개령을 내리게 된다. 12월이 되자 항공산업부 장관인 알렉세이 I. 샤쿠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 1904~1975)은 전선의 심각한 상황을 고려하여 구드코프에게 스몰렌스크주 비야즈마(Вязьмой) 비행장에서 예비시험을 통과한 시제 전투기 Gu-82와 구드코프 K-37(Гудков К-37)을 즉시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전투기들은 원래대로라면 고리키(Горький :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있는 제21호 항공창(авиазаводе № 21)에서 생산에 들어갔어야만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 명령은 철회되었다.
1942년 4월, 구드코프와 그가 이끄는 OKB-301의 일부가 힘키로 돌아왔고, 9월에는 노보로시스크로 피난갔던 OKB-301이 고리키의 제156호 공장(завода № 156)으로 옮겨오게 된다. 1943년에 미하일 구드코프는 미국제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의 설계 사상을 반영시킨 실험 전투기인 구드코프 Gu-1(Гудков Гу-1)의 개발에 착수했으나, 이 기체도 얼마 안가 항공병참국으로부터 생산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5. 시제기 추락과 처벌
1943년 6월 12일, 완성된 Gu-1의 1호기가 그로모프 비행센터의 활주로에 굴러나왔다. 이 시험비행을 위해 Gu-82를 테스트하면서 구드코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던 테스트 파일럿 알렉세이 I. 니카쉰(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Никашин : 1906~1943) 중령이 자진해서 조종간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엔진이 동체 중앙에 달린 이 시제기의 처녀비행은 니카쉰 중령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으며 재앙으로 끝났다.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구드코프는 항공기 조립에 필요한 계산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결론내리고 맹비난을 받게 된다. 항공산업부 장관 알렉세이 샤쿠린은 스탈린에게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제2국의 수석 설계주임이었던 미하일 구드코프를 직위해제하는 한편, 일체 항공기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안했고 지도자 스탈린은 이에 동의했다.
1943년 7월 6일에 내려진 항공병참국의 공식 명령에 따라, 미하일 구드코프는 수석 설계자 칭호를 박탈당하고 그와 함께 근무했던 엔지니어들은 타슈켄트에 있는 기술관리부(Отдел технического контроля : OTC) 산하의 제84호 공장(ОТК завода № 84)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즈음 세미욘 라보츠킨은 La-5 전투기의 성공으로 인해 설계국장 가운데 발언권이 커져 있었고 그는 여전히 구드코프의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귀양 생활을 하던 구드코프는 라보츠킨의 지시에 따라 제21실험설계국(OKB-21)으로 돌아오게 된다.
6. 나치 독일의 신무기 분석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 독소전에서 소련이 승리를 거둔 후인 1946년까지 구드코프는 모스크바주 루이토프(Реутов)에 있는 제51호 공장(заводе № 51)에서 부수석 설계자로 근무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는 모스크바주 두브나(Дубна)의 제458항공창(авиазавода № 458)에서 실험과 작업 관리자로 일했고, 1948년 12월부터 독일에서 가져온 로켓 정찰기인 실험기 346(Экспериментальный самолет 346)의 책임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이 부서는 독일 공군으로부터 노획한 각종 군용기와 실험기들을 실험하고 분석하며, 때에 따라서는 역설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구드코프처럼 조종 경험이 있으면서 공학 지식이 풍부한 이에게는 딱 알맞는 일이었다.
1953년부터 2년 동안 구드코프는 항공산업용 기계설비 생산을 하고 있던 제491호 공장(заводе № 491)에서 제491실험설계국(OKB-491)의 국장 자리에 앉혀졌다. 설계국장에서 좌천된지 딱 10년만의 일이었다. 1956년에는 고고도 정찰용 비행선과 성층권 기구를 개발하기 위해 제424실험설계국(OKB-424)의 설계주임을 겸직하게 된다. 이때 실험과 개발 경험을 밑천으로 1959년부터는 우니베르살 공장(заводе Универсал)에서 우주선과 사출좌석에 쓰이는 낙하산 시스템을 생산했다.
구드코프의 지휘 하에 3종류의 시제 전투기 Gu-82(1941년 3월)과 K-37(1941년 5월), Gu-1(1943년 6월)이 만들어졌고, Gu-2와 Gu-VD 2종류의 실험기를 연구 및 설계했으며 나치 독일이 만들다만 여러 실험기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1983년 3월 19일에 허혈성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미하일 구드코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프레오브라젠스크 묘지(Преображенском кладбище)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에는 스탈린 상에 빛나는 연방노동영웅을 기리는 비행기를 본딴 작은 청동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7. 서훈
스탈린 상 (Сталинская премия : 1941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메달
노력 적기훈장(орден Трудового Красного Знамени : 1945년)
[1] 12월 21일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