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진경

 

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신조협려에 등장한 킹왕짱 내공심법.
1. 구양진경의 탄생
2. 구양진경의 행방
3. 내용
3.1. 구양신공(九陽神功)
4. 평판
5. 여담


1. 구양진경의 탄생


소림사에 달마 대사가 <능가경>을 처음 가져 왔을 때, 천축에는 아직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경문을 패다라엽이라는 일종의 종려나무 잎사귀에 뾰족한 바늘로 새겨서 기록해 넣었다. 달마대사가 이 패엽 불경을 가져와 소림사에 전했는데, 간수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소림사의 승려들은 패엽경을 다시 백지에 옮겨 썼다. 하지만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문을 베껴 쓰다보니 행간이 무척 넓어졌다. '''바로 이 넓은 행간에 소림사의 누군가가 구양진경을 한자로 적어넣은 것이다.'''
구양진경을 만든 저자는 자신의 성명이나 출신 내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으나, 후기에 경전을 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밝혀두었다.
그는 그저 평생도록 유가의 선비로, 도가의 수도자로 떠돌다가 만년에 가서는 불문에 의탁하여 승려의 몸이 되었다. 그는 왕중양과 평소 술벗으로 사귀던 사이였는데, 그와 내기하여 이긴 끝에 구음진경을 빌려보고,[1] 진경에 담긴 상승 무학에 깊이 탄복하였다. 하지만 구음진경은 오로지 노자의 사상에만 일변도로 치우쳤기에,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극복하고, 음으로 양을 이겨내는 이론에만 치중했을 뿐 음양이 서로 돕고 보완하는 묘리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2]
이에 구음진경의 무학에 온전히 만족할 수 없었던 저자는, 소림사로 돌아온 후에 범어판 <능가경>의 행간을 빌려 자신이 깨달은 상승 무학의 원리를 저술하고 이름을 '구양진경'이라고 붙이게 되었다. 그 내용인즉 순음(純陰) 일변도인 구음진경이나 순양(純陽)을 추구하는 소림 무학과 달리, 음과 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보완하는 중화(中和)의 도리를 갖춘, 새로운 형태의 무학이었다.
장무기는 이 후기를 읽고 '음양의 조화를 바탕으로 무학을 만들었다면 음양병제경이라고 했어야지, 굳이 구음진경을 의식해서 구양진경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하나의 집착이 아닐까' 라고 평했다. 어찌되었든 이름 자체가 구음진경과 쌍을 이루는 느낌이기 때문에 화산에서 양과, 소용녀, 천하오절 등의 이름난 고수들이 각원의 말 한 마디 '구양진경'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2. 구양진경의 행방


소림사 승려들은 하나같이 한문으로 쉽게 번역된 능가경만을 보았기 때문에, 까다로운 범어로 된 능가경을 읽어보려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능가경의 행간에 감춰진 구양진경 역시 소림사 장경각에서 오랜 세월 동안 보관되어 있을 뿐, 읽어본 이가 없었다.
신조협려 시대에 이르러 장경각을 관리하게 된 각원대사는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기질이 아니어서, 장경각에 수십 년을 기거하는 동안 별 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서책은 죄다 읽어보았다. 그 과정에서 진본 능가경 역시 들춰보게 되었고, 중원의 한어로 쓰여진 구양진경 역시 몽땅 다 읽어보고 외우게 되었다. 비록 각원은 '''소중한 능가경 원본에 비하면 구양진경은 언젠가 사라질 신체를 단련하는 건강법이니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선현이 남긴 좋은 수행법이라고 생각해서 곧이곧대로 내용을 따라 수련을 했다. 본인은 덕분에 잔병치레 한 번 없었음을 뿌듯하게 여기고 어린 제자인 장군보에게도 조금씩 기초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사실 본인도 모르게 절정의 내공을 축적하게 된 것이다(...).
윤극서소상자는 구양진경이 기록된 능가경을 훔쳐서 서역 곤륜산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둘 다 서로가 먼저 무공을 익힐까봐 경계하여, 무공을 수련하지 못하고 서로 소유권 다툼을 벌이다 죽게된다. 이들은 구양진경 4권을 기름 종이에 싸서 원숭이의 뱃속에 넣어서 숨겨두었는데, 윤극서는 죽기 직전에 하족도에게 유언을 남겨 각원대사에게 전달했으나 너무나 불분명한 말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구양진경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3]
이들은 구양진경이 적힌 네 권의 능가경을 한 원숭이 뱃속에 숨겨놓았는데 90여년이 지나서 장무기가 이 원숭이를 치료해주다가 발견하고 터득하여 현명신장의 음기도 치료됨과 동시에 절세고수가 된다.
각원대사는 임종시 이 법문을 모두 외우고 열반에 들었는데 이것을 들은 사람이 셋으로, 후일 무당파 시조 장삼봉이 되는 제자 장군보, 아미파 시조 곽양, 소림사의 나한당 좌장 무색선사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들은 구양진경의 내용을 자파에 전하게 되고, 그리하여 무당구양공(武當九陽功), 아미구양공, 소림구양공이 생겨나게 된다.
무공 실력은 무색선사가 가장 높았기에 소림구양공은 가장 고강(高强)한 무공의 정화를 얻게 되었다. 무학 면에서는 곽양이 가장 박식했기 때문에 아미구양공은 가장 박학(博學)함을 얻었다. 장군보는 각원대사를 가장 오래 모셨기 때문에 무당구양공은 가장 순수(純粹)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기억한 분량이 불완전 했고, 각각의 깨달음과 무공수위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게 되어 원본 등장 때까지 각파의 구양신공은 불완전한 것이다. 각 문파에 전해진 아류 구양공은 원본과 비교하자면 분량도 잘해야 4분의 1, 오류까지 생긴 것을 고려하면 10분의 1 정도 밖에 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4]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각 문파의 비전절기로 전수되고 있었다.
장무기는 구양진경을 터득한 후, 동굴을 파서 원본을 넣어두고 장무기가 책을 묻어두었다고 써두었다. 어쩌면 훗날 구양진경을 발견하는 기연을 얻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3. 내용


무학의 원리와 내공심법, 무공의 초식을 모두 수록한 종합무공서인 구음진경과는 달리 구양진경은 초식은 없고 무학의 원리와 내공심법만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의도 자체가 구음진경에 기록된 상승 심법이 도가적 원리에만 집중하는 것을 한탄하여 음양이 서로 돕는 이치에 따라 무공이론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구음진경의 경우 황상이 복수를 위해 오랜 세월 수련한 무공의 총체를 옮겨적은 것이라,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묘한 초식들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구양진경에 기록된 무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요체가 아래의 네 구절이다.
굳셈과 부드러움을 아울러서 중시하는 '''강유병중(剛柔竝重)''', 음과 양이 서로 돕고 보완하는 '''음양호제(陰陽互濟)''', 상대방의 낌새에 따라 공격과 수비를 전개하는 '''수기이시(隨機而施)''', 상대방보다 뒤늦게 움직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3.1. 구양신공(九陽神功)


구양진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공심법.
킹왕짱이라서 장무기는 이것만 수련하고도 고수 반열에 도달했다(...). 본격적으로 강해진 것은 건곤대나이를 익혀서 잠재력을 마음껏 끌어낼 수 있게 된 이후였지만, 내공의 경지만 놓고 보면 왕년의 곽정, 양과 등 절정 고수들에게 뒤지지 않았을 정도다.
당연하지만 그냥 몇 년 공부해서 내공의 극치에 도달할 만큼 편리한 신공은 아니다. 장무기의 내공이 온전해진 것은 포대화상의 보물인 건곤일기대 안에 갇혔다가, 외부로 분출되는 내공이 갈 곳이 없어 응축되면서 '''수십 명의 내공 고수가 외부에서 임독양맥을 개통하도록 도움을 준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 단숨에 대성한 덕이 크다. 작중에서도 천하에 다시 없을 '''기연'''으로 언급될 정도다.
그러므로 평생 수련한 곽정이나 장삼봉의 경지를 아직 새파랗게 젊은 장무기가 따라잡았은 것 자체는 굉장하지만, 그것이 구양신공 >>>> 기타 내공심법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장무기의 진도가 엄청 빨랐던 것은 맞지만[5] 아무 집착도 잡념도 없이 할 짓이 없어서 꾸준히 내공 수련만 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작중에서 아류 구양공들이 자꾸 구양신공에 물을 먹어서 그렇지, 내공의 고하를 따지면 소림 심법도 극한까지 수련하면 구양신공에 뒤지지 않는다는 서술이 등장한다.

4. 평판


구양진경에 수록된 무학의 이치는 극히 심오하고 구양신공의 위력 또한 가히 대단하다. 신조협려 말미에 양과 등의 절정고수들도 이론으로 명확히 하지 못하고 막연히 깨닫고 있던 이치를 각원대사가 속시원하게 한 마디로 풀어 말하는 대목이 있을 정도이니 그때까지 무학의 패러다임에서 한 발짝 나아간 신묘한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단 무림을 뒤집어 엎은 구음진경과 다르게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극히 드물어 평판 자체는 드높지 않다. 장무기가 날뛸 때마다 '흐압! 구양신공!' 하고 기합을 지르는 것도 아니므로(...).
단 구양진경이 상승의 무학 비결임은 분명하나 기존의 모든 무학을 월등히 압도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의천도룡기 내의 묘사로도 소림신공과 구양신공은 극한까지 수련할 경우 고하를 가리기 힘들다고 되어 있다.[6]구음진경 역시 창시자의 특성상 도가적 묘리에 치우쳤을 뿐 심오함이 구양진경보다 뒤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구양진경보다 실전적 무공은 훨씬 탁월하다.[7] 다만 의천도룡기 시점에서 장삼봉을 제외한다면 단연 원탑의 지위를 고수하는 장무기의 무공 근간이 되는 것이 구양진경이기에 상대적으로 모든 여타의 무학이 뒤쳐져 보이는 감이 있을 뿐이다. 또한 당대의 강호에서 으뜸가는 문파들이라 불러 마땅한 아미, 소림, 무당에서 비전되는 각 파 아류 구양공이 원본 구양공의 열화카피이기 때문에(...) 해당 문파 고수들은 진본 구양신공을 상대하는 데 있어 불리함이 있다 하겠다.[8]

5. 여담


'''사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까지는 없다가 의천도룡기를 위해 나중에 덧붙인 설정의 산물이다.'''
구양진경이 의천도룡기 서장부터 본편 시점까지 내내 핵심적인 장치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구양진경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사실 등장 자체는 무척 뜬금없다. 다들 황상의 모든 무공이 담긴 유일한 비급인 구음진경의 존재를 알고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것이 제 1차 화산논검 시기의 상황인데, 그때부터 신조협려 말기까지 구양진경 같은 것은 전혀 암시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각원이 신조협려의 마지막 장면[9] 직후에 등장해서 '구양진경이라는 경전을 되찾고자 한다'라고 말하니까 모두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음진경과 한 쌍을 이루는 구양진경!'''이라며 구양진경의 존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정말 그렇게 구양진경이 구음진경과 한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했으면 무림 고수들이 구음진경만 주구장창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구음진경 자체가 '달마대사가 썼다'에서 '황상이 썼다'로 설정 대격변을 겪은 물건이고, 최신 개정판에서는 그마저도 황상의 복수심이 들어간 무공들 때문에 구판처럼 정정당당한 정파 무공들만 있는 것도 아니게 되었다. 구양진경 역시 의천도룡기를 위해 급조된 설정이긴 하지만, 왕중양의 구음진경을 읽어 본 수수께끼의 이인을 저술자로 제시함으로써 '왜 강호에 소문이 나지 않고 이런 상승 무공의 비급이 숨어 있게 되었는가'의 문제는 잘 꿰어맞춘 편이다. 물론 여전히 구음진경을 알고 있는 고수들이 '구음진경과 쌍을 이루는 구양진경!'이라고 대번에 이해하는 부분은 설명이 안 되지만....[10]

[1] 사실 이 저자의 설정은 이것밖에 밝혀지지 않아서 흠으로 꼽히기도 한다. 과거 무림에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킨 희대의 기서 구음진경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학을 창안해 낸 고수이면서도 이전이나 이후나 언급이랄 것이 전혀 없다. 왕중양과 술벗을 하며 내기에도 이길 정도의 고수라면 천하오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스펙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게다가 구음진경이 재앙의 근원이라 여겨 제자들에게도 익히지 말라 엄히 당부한 왕중양이 구음진경을 보여주는 내기를 했을지도 미심쩍다. 하지만 이미 무림에서 도가와 불가의 도리를 깨운친자로 왕중양은 그가 구음진경을 보더라도 구양봉같이 무림에 풍파를 몰고갈자로 보지 않기에 보여줬을 가능성도 있다.[2] 이는 사실 구음진경의 상권 마지막 부분인 총강이 범어로 적혔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황상은 구음진경 총강에 음과 양, 도가와 불가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지를 정리해 두었지만 후세에 이를 얻은 사람이 천하를 제멋대로 할까 두려워 일부러 범어로 번역해 이를 한자로 음차했다. 본래 황상이 무공 고수가 된 것은 전 중원의 도가경전을 전부 정리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총강의 최상승 구결을 빼고 보면 황상 무공의 근원인 도가의 음유한 도리만을 논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3] 윤극서는 '경서를 기름종이로 싸서 원숭이 뱃속에 숨겨놓았다'라고 전하고 싶었으나, 부상이 심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족도가 전달할 수 있었던 내용은 '경전, 기름, 안' 정도다.[4] 장삼봉의 경우 비교적 분량도 많이 기억하고 오류도 적을 가능성이 있는 편이다. 아무래도 각원을 옆에서 오랫동안 수행하며 진경의 내용을 배울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무당구양공으로도 장무기의 한독을 풀어버리는 일은 어림없었던 것을 보면 역시 진본 구양신공에 비할 바는 아닌 듯하다.[5] 건곤일기대에 갇히기 전부터 이미 내공의 깊이만 따지면 멸절사태 등 6대문파 장문인급보다 훨씬 윗길에 있었다(!).[6] 의천도룡기에서 나오지 않은 역근경만 해도 구양진경보다 절대 아래라 볼 수 없다.[7] 두 무공 중 오직 하나만 수련했을때 구양진경의 최대치는 각원이나 건곤대나이를 익히기 전의 장무기지만 구음진경은 수련자를 내외공 권각법의 일류 고수 이상으로 만들어준다.[8] 멸절사태가 아미구양공의 원리로 후려쳐낸 불광보조 일 초식은 아미파 무학의 정수이자 당대 어떤 고수도 소홀히 받아낼 수 없는 극도로 신묘한 초식이지만, 장무기가 하필 진본 구양공의 원리로 대비하고 있던 터라 '''물로 물을 치는 형세가 되어''' 장무기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하다못해 그냥 아미파 장법으로 후려쳤다면 타격을 줄 수 있었으련만....[9] 구판은 양과와 소용녀가 옥녀상 앞에서 절하면서 그냥 끝이다(...). 나머지 내용은 의천도룡기를 위해 덧붙인 것이다.[10] 각원의 엄청난 내공이나 반탄지기, 무학의 이치에 대한 탁월한 이해 때문에 자연스럽게 믿었다고 보면 말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원은 내공의 수련만 보면 구음진경의 총강을 숙지한 일등대사, 곽정에 뒤지지 않았고 그 반탄지기에 이르러서는 이들 고수들조차 불가능한 경지였다고 묘사되기 때문. 하지만 각원이 언급하는 구양진경의 무학 이치는 음유한 무공인 구음진경과 짝을 이룬다기에는 다소 어색한 감이 있는 음양조화와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내용이기에 역시 어색함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