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
1. 개요
武當派 Wu Tang Clan[1]
중국 호북성 무당산에 자리를 잡는 도교 일파를 가리키는 명칭. 이는 일개의 집단을 가리키는 호칭이 아니지만, 무협소설을 위시한 대중문화에서는 장삼봉을 개조로 두고 무공을 전수하는 특정 무림 문파의 이름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무협지(武侠小说), 그리고 중국의 선협소설(仙侠小说) 또는 현환소설(玄幻小说)에서 소림파와 함께 무림 양대북두 라고 칭하고, 북숭소림, 남존무당(北崇少林,南尊武当)이란 말이 중국에 있다.
무학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내공 수련을 강조하고(强调内功修炼), 이정제동, 이유극강, 이단승장, 이만격쾌, 이의운기, 이기운신, 편어음유, 주호흡, 용단수 라는 개념을 중히 여기며(讲究以静制动,以柔克刚,以短胜长,以慢击快、以意运气,以气运身,偏于阴柔,主呼吸,用短手),무당무공부주진공, 연이역불가경이침범 (武当功法不主进攻,然而亦不可轻易侵犯。무당의 무공은 공격적 이진 않다, 그러나 감히 함부로 침범 할수없다.)라는 개념을 중요시 한다.
2. 설명
무협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장삼봉(또는 장삼풍) 개파조사설은 어디까지나 재미있으라고 갖다붙인 설일 뿐이고, 실제로는 당나라 정관 연간(627~649)부터 도교사원을 건설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여 북송, 원나라, 명나라을 거치면서 건축물을 증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국내 무협소설에서 걸핏하면 써먹는(...) 영락제가 무당파와 관련이 깊은 인물인데, 쿠데타로 황제 자리를 빼앗은 인물이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당산 도교를 선전수단으로 이용했다.
결국 특정한 인물을 조사로 모시는 통일된 종파가 아닌, 시대별로 건설을 명한 황제나 건설을 주도한 도사 등을 건물의 조사로 삼고 독자적인 영역을 맡고 있다는 편이 옳겠다.
무협계 대중문화 매체의 영향으로 무당파 무술은 태극검과 태극권이라고 상식처럼 퍼졌지만, 실은 왜곡도 이만저만한 왜곡이 아니다, 라는 의견도 있으나. 딱히 화낼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든지 이건 무협 소설 내의 설정이며 사실 왜곡의 목적이 아니다. 악영향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무협지만 보고 태극권이 무당파 무술이라 하는 좆문가 정도?
전설에 따르면 무당파 조사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을 창시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태극권의 원형은 진가구에 전해지던 가전무예 '진식 태극권'이 맞으며, 진식 태극권에서 파생한 '양식 태극권'이 널리 퍼지면서 유명해졌다는 설이 정설이다.
사실 무협물 덕분에 무당파 이름을 팔아서 돈맛(...)을 볼 것 같으니까 중국인들이 이런 왜곡을 방관하는 측면도 있긴 하다. 하남성 정부가 소림사와 소림무술로 장사가 짭짤하게 되니, 호북성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해서 무당파 무술 마케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당산에 있는 무술학교들은 대부분 우슈(...)와 양식 태극권을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조차 외부에서 고용되어 온 사범들이 대부분이며 무당산 수련자가 진가 태극권사에게 가서 틈틈이 배워간다고 하니 태극권 원류의 진위를 논하기도 뭣하다.# 하물며 무당태극권, 무당형의권, 무당팔괘장 등 유명한 내가삼권이 모두 무당파 무공이란 주장까지 듣고 보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흔히 무협소설을 보면서 상상하게 되는 낡은 중국식 건물이 산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사람이 거의 없는 건물들도 꽤 있기 때문에 이러한 건물들은 반쯤 폐가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꼭 역사가 오래되어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된 도관이나 사원도 많다. 사실 이러한 파괴는 무당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 전역에서 빈발했다. 문화대혁명 때 전승이 끊어져버린 무형문화재 또한 많다.
지금이야 서양 방송국들이 만든 다큐를 보면 실제 무당산에 장문인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여도사들도 있지만, 이러한 무당파 무술은 현대에 와서 복원하거나 만들어낸 거라 보면 된다.
2015년 3월, 소림사처럼 다른 나라에 지부를 세우겠다는 진출 계획을 발표했다. 소림사는 외공 위주의 몸쓰는 법에 너무 치중한다면서, 자신들은 정신 수양과 건강법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게다가 2016년 진출할 국가들을 밝혔는데 대한민국이 포함되어 있다.
3. 무협소설에서의 무당파
중국 호북성 무당산을 근거로 삼는 문파. 대개 장삼봉이 창설한 도가 문파로 문인은 전부 도사로 묘사한다. 검법이 특히 유명하며 국내 무협소설에선 무당파를 대표하는 무공은 태극검과 태극권이라고 공식처럼 나오는데, 이는 김용의 《의천도룡기》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초필살기는 태극혜검. 구파일방의 하나로서 무협소설에서 거의 개근에 가까운 출석율을 보이고 있다.
이 곳 출신들을 비꼴 때는 대체로 "말코도사"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도사들이 관을 쓰기위해서 머리를 뒤로 당기면 눈이 치켜올라가고 이마가 드러나서 말머리형상이 되기때문에 이를 비하하는 뜻이다. 주로 사파쪽 인물이 저런 표현을 쓰지만 고승들이 스스로를 땡중이라고 비하하는 것처럼 득도한 도사가 자신을 말코도사라고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문파 사람이 무당파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그 사람과 죽고 못 사는 사이거나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이거나 둘 중 하나다.
구파일방 중에서도 소림사와 함께 특히 영향력을 많이 끼치고 있으며 덕분에 소림사와는 라이벌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도교 집단 베이스에 검법을 장기로 삼는 화산파와도 라이벌 관계다.
소림사의 신물로 녹옥불장이 자주 나오는 것과 달리 무당파의 신물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장문령부(掌門令符) 자반죽간이나 송문고검 정도가 가끔 나오는 편이다.
3.1. 《의천도룡기》의 무당파
장삼봉이 개파했으며, 무당칠협이 유명하다. 장삼봉이 장군보시절일 때의 스승인 각원대사를 기리기 위해 사조로 모시고 있다. 도교의 대신령인 진무대제(眞武大帝)를 신봉하고 있다. 중원에서는 서역의 광명정을 떠나온 장무기와 명교 신도들의 본진 격으로 쓰이기도 했다. 무당칠협은 유대암이 폐인이 되고, 장취산이 사망한 후에는 무당오협으로 불리기도 한다.
3.1.1. 인물(사조삼부곡)
- 사조 : 각원대사
- 장문인:장삼봉
- 2대 장문인:유연주
- 무당칠협
- 영허자(靈虛子): 유대암의 문하로 묘사된다. [2]
- 청풍(淸風), 명월(明月): 폐인이 된 유대암의 시중을 들고 있는 두 명의 도동(道童). 나중에 장무기가 청풍으로 변장을 하기도 했다.
3.1.2. 무공
3.1.2.1. 태극권(太極拳)
의천도룡기에서는 무당파 제자들이 만안사(萬安寺)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조민과 그 부하들이 무당파를 습격했을 때, 처음 언급된다. 장삼봉이 18개월 동안 좌관하여 무학의 요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통달한 끝에 태극검과 함께 단숨에 완성했다고 묘사된다.[3] 처음으로 전수 받은 사람은 유대암과 곁에서 함께 배운 장무기이며, 구양진경, 건곤대나이와 함께 장무기의 대표 무공이 된다.
다만 이후 김용의 작품들에서 태극권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소오강호에서도 태극권이 언급되긴 하나, 태극검이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진다.[4] 서검은구록, 비호외전에서는 심지어 태극권이 무당파의 무공이 아니라 태극문(太極門)의 무공이다. 벽혈검, 녹정기에서는 무당파만 언급되며, 태극권은 언급되지 않고, 협객행에서는 딱 한 번 언급되고 무당파의 무공이긴 하다.
실제의 태극권에 대해서는 태극권 참조.
다만 이후 김용의 작품들에서 태극권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소오강호에서도 태극권이 언급되긴 하나, 태극검이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진다.[4] 서검은구록, 비호외전에서는 심지어 태극권이 무당파의 무공이 아니라 태극문(太極門)의 무공이다. 벽혈검, 녹정기에서는 무당파만 언급되며, 태극권은 언급되지 않고, 협객행에서는 딱 한 번 언급되고 무당파의 무공이긴 하다.
실제의 태극권에 대해서는 태극권 참조.
3.1.2.2. 무당장권(武當長拳)
기초 입문 권법. 총 32세(勢)로 이루어져있으며, 안시식(雁翅式), 도기룡(倒騎龍), 칠성수(七星手), 일조편(一條鞭), 정란(井欄) 등의 초식이 언급된다. 장무기가 최초로 배운 무공이자, 아버지 장취산에게 배운 유일한 무공. 주장령은 장무기가 무당장권을 쓰는 것을 보고 그가 정말 장취산의 아들인 장무기임을 파악하였다.
3.1.2.3. 면장(綿掌)
장법(掌法)으로 총 36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유극강의 무당파 무공의 정수를 담고 있어 극히 유연하고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초수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무당파의 대표 무공이었으나, 태극권이 등장한 이후에는 언급이 없다. 작중 장취산 등이 종종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장무기와 맞서 송청서가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송청서는 빈사 상태인 장무기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반격을 꾀하고 있음을 깨닫고, 강맹한 위력이라곤 없는 면장을 통해 차력타력의 술수를 봉쇄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무기는 건곤대나이 신공을 7단계까지 깨우친 상태라 면장의 미미한 힘줄기조차 놓치지 않고 틀어놓아 보기좋게 송청서를 곤란에 빠뜨린다.
여담으로 의천도룡기 내에서는 아미파에도 금정면장(金頂綿掌)이 있는데, 세부적인 운용법이나 내식이 판이하다지만 겉으로 보이는 초식이 무당파의 면장과 흡사하다는 묘사가 있다. 아마 곽양과 장삼봉의 인연, 혹은 둘 다 전수받은 구양진경의 원리에 두 문파 무공의 동일성의 비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본편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위일소가 구사하는 한빙면장도 한자를 공유하지만 이 쪽은 별 공통점이 없다.
여담으로 의천도룡기 내에서는 아미파에도 금정면장(金頂綿掌)이 있는데, 세부적인 운용법이나 내식이 판이하다지만 겉으로 보이는 초식이 무당파의 면장과 흡사하다는 묘사가 있다. 아마 곽양과 장삼봉의 인연, 혹은 둘 다 전수받은 구양진경의 원리에 두 문파 무공의 동일성의 비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본편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위일소가 구사하는 한빙면장도 한자를 공유하지만 이 쪽은 별 공통점이 없다.
3.1.2.4. 진산장(震山掌)
3.1.2.5. 진천철장(震天鐵掌)
3.1.2.6. 호조절호수(虎爪絶戶手)
무당칠협의 둘째 유연주가 무당파의 호조수를 바탕으로 변화시켜 만들어 낸 금나수법. 원래 장삼봉이 창안한 호조수(虎爪手)는 단 일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초식은 상대방을 제압해도 내공으로 운기해서 빠져나올 위험성이 많고, 이때는 모처럼 장악한 승기를 잃어버리고 상대와 내력을 겨루어야 하는 부득이한 국면이 전개될 수 있었기에 무공의 경지로 따지면 빈틈이 있는 초식이었다.
유연주는 이 약점을 없애기 위해 호조수로부터 파생되는 12가지의 변화초식을 궁리했는데, 그 결과 탄생한 호조수는 이전보다 훨씬 위력적이고 정교한 절학이 되었다. 유연주는 평소에 하듯이 자신이 만들어 낸 호조수를 스승 장삼봉에게 시연해 보이고 가르침을 구했는데, 장삼봉은 고개만 두어 차례 주억거릴 따름이지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에 유연주는 스스로 만들어낸 무공이 완성도가 낮은 줄 알고, 더더욱 연구해서 약점을 보완하고 다듬은 뒤에 장삼봉에게 다시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장삼봉은 유연주를 향해 "내가 가르쳐 준 광명정대한 초식으론 모자라서 이런 무서운 살수를 만들었단 말이냐?"라고 나무란다. 유연주가 개량한 호조수는 매 초식이 등허리 요추(腰椎)의 급소를 노리기 때문에, 위력이 대단함은 물론이고 허리의 음맥(陰脈)을 끊어 자식을 낳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뜻밖에 스승이 엄하게 나무라자 유연주는 그저 엎드려 용서를 구할 따름이었다. 장삼봉은 유연주를 엄하게 꾸짖긴 했지만, 무공 자체가 대단한 절학이니 그냥 폐기하기엔 아깝다고 여겨, 다른 제자들에게 이 일화를 알려 주고 유연주로부터 새 호조수를 전수받도록 명했다. 단 무공의 위험성을 잊지 않기 위해, 남의 자손을 끊는다는 의미의 '멸문절호(滅門絶戶)' 가운데 '절호' 두 글자를 따서 '호조절호수'라고 부르도록 명했다. 또한 생사의 위기가 다가오기 전에는 결코 써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후일 장삼봉의 100세 생일날에 많은 문파가 무당산에 몰려와 장취산을 추궁하려 하자, 장송계는 곤륜, 공동파 등의 대고수들을 기습적으로 일시에 제압하여 분위기를 무당파에 유리하도록 만들자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 때 단숨에 고수들을 제압하기 위해 제안된 초식이 바로 이 호조절호수이니 그 무시무시함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사부님의 생일에 그런 흉험한 초식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으나,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는 도사나 노인네들에게 쓰면 괜찮지'라고 어영부영 타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곤륜, 공동보다 훨씬 존재감이 있는 소림사의 삼대 신승들이 들이닥쳐서 이 기습 작전은 자연스레 무산되었다.
3.1.2.7. 태극검(太極劍)
태극권과 더불어 장삼봉이 만년에 창안한 무당파 최고의 절기. 그 핵심은 눈으로 보이는 초식이 아니라 초식이 표현하고자 하는 검의(劍意)에 있다.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수십 가지 초식은 사실 검으로 크고 작은 '원'을 그려낸다는 단일한 검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처음 장삼봉이 군웅들 앞에서 시범을 보일 때는 동작이 하도 느릿느릿해서 검초가 뻔히 눈에 보인데다 두 번째로 시범을 보일 때는 같은 초식인데 어째 동작이 딴판으로 달라져서 이것이 무슨 도깨비놀음인가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곤대나이를 터득하고 내력이 정순한 장무기는 두 차례의 시범을 통해 장삼봉의 뜻을 이해하고 태극검의 진수를 펼쳐낼 수 있었다.
태극검의 진수는 검으로 원을 그리며 상대의 직선적인 공격을 받아내고 제압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팔비신검 방동백 같은 고수가 의천검으로 펼쳐내는 검법을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다. 의천검은 고수가 휘두르면 칼집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산호금 지팡이를 절단낼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인데, 의천검의 칼날이 아니라 칼몸을 목검으로 원을 그리며 밀어내는 식으로 그 예리함을 비껴갈 수 있었던 것. 방동백은 과거 검술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태극검을 상대로는 장무기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하고 수백 초를 휘둘리며 점점 출초의 속도가 떨어지고 내공이 소진되어 가는 기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번개 같은 출수로 단숨에 죽이거나 제압하는 무림의 명문 검술들과는 목표 자체가 다르다. 이정제동, 이유극강의 무당파 무공 철학을 극한까지 추구한 검술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상대를 해치기보다 몸을 지키는 데 극히 유리하고, 싸울수록 끈기가 발휘되는 무당파 내공과 결합하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맞붙어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은리정이 자신보다 실력이 위인 주지약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태극검의 정묘함에 힘입어 오래도록 버티며 지구전을 내다볼 수 있었을 정도.
3.1.2.8.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
13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으로, 모든 초식이 손목의 신문혈(神門穴)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무장해제용으로 판단된다. 장취산이 무당산을 떠날 때, 장삼봉은 이 검법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으나 10년 후 그가 돌아왔을 때 은리정이 펼쳐보이게 된다.
3.1.2.9. 요지유검(繞指柔劍)
72초의 검법. 장검의 칼날이 부드러운 허리띠처럼 휘어지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된다. 웅혼한 내력으로 칼끝을 휘어서, 검초가 정상적인 공격로를 벗어나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적이 막아내지 못하도록 혼란을 주는 초식이다. 막성곡이 은천정과 싸울때 사용했다.
3.1.2.10. 현허도법(玄虛刀法)
유대암이 복건성의 도적떼를 처단할 때 썼다고 이름만 나온다.
3.1.2.11. 천지동수(天地同壽)
하늘과 땅이 영원히 수명을 같이 한다는 비장한 의미의 검초. 상대가 자신의 등 뒤에 있을때, 자신의 아랫배를 꿰찌르고 다시 그 칼끝으로 적의 하복부를 계속 찔러들어가는 무서운 검초다. 양소에 대한 원한에 불타던 은리정이 원수를 갚고 자신도 죽으려는 심정으로 만들어냈다.
3.1.2.12. 제운종(梯雲縱)
경공술. 구름을 사다리 삼아 딛고 오르듯 진기를 조절하여 공중에 오르는 기술. 무당파 특유의 경공술이다.
3.1.2.13. 접기타기(接器打器)
적의 암기를 받아내어 공격해오는 적의 암기를 타격하는 절예. 적의 암기를 받아서 되쏘아 날리되, 한 개를 받아내면 그 한 개로 적의 두개를, 두 개를 받았으면 그 두 개로 적의 세 개를 후려 쳐서 떨어뜨린다. 유연주와 은리정이 아미파에서 쏜 벽력뇌화탄을 태극권으로 받아낸 다음, 계속 쏘아대는 벽력뇌화탄을 받아치면서 사용했다.
3.1.2.14. 의천도룡공(倚天屠龍功)
무림에 전해지는 武林至尊, 寶刀屠龍, 號令天下, 莫敢不從, 倚天不出, 誰與爭鋒 (무림의 지존은 도룡보도라, 천하를 호령하니, 감히 따르지 않을 자 없도다. 의천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예봉을 다투랴?)의 24자를 장삼봉이 무공화한 것. 장삼봉 자신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서 일종의 지법이나 권법의 응용처럼 펼쳤으나, 장취산은 판관필로 응용하여 사용한다. 이후 장취산의 대표무공처럼 사용되어 도대금을 제압할 때 사용하고, 이후 왕반산도에서 사손과 겨룰 때 사용하여 사손을 탄복시킨다.
3.1.2.15. 진무칠절진(眞武七截陣)
장삼봉이 진무대제의 신상 앞에 놓아둔 귀장(龜將)과 사장(蛇將)의 상을 보고, 거북이와 뱀의 두 영물의 특성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무공을 만들고자 생각했다. 나흘이나 고민하던 끝에 장삼봉은 일곱 개의 무공을 만들어 냈는데, 따로따로 펼쳐도 각각 정밀하고 오묘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더욱 늘어나고, 세 사람이 합치면 더욱 늘어나고, 4명이 힘을 합치면 8명, 5명이 힘을 합치면 16명, 6명일때는 32명, 7명이 힘을 합치면 당대의 일류고수 64명을 당해낼 수 있는 개사기 무공이 되었다.[5] 장삼봉은 이 무공을 각각 무당칠협에게 전수시켜주었으나, 일곱형제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절기를 써야 할 상황은 한번도 오지 않았다.
장삼봉의 100세 생일날 소림사에서 장취산을 추궁하러 와서 도전을 받게 되자 마침내 이 진법을 쓰려 했지만 은소소가 나서서 자백한 탓에 대결이 무산되어 쓰지 않게 되었다.
장삼봉의 100세 생일날 소림사에서 장취산을 추궁하러 와서 도전을 받게 되자 마침내 이 진법을 쓰려 했지만 은소소가 나서서 자백한 탓에 대결이 무산되어 쓰지 않게 되었다.
3.2. 《무당마검》의 무당파
무당산 자체가 이미 도가의 중지로 유래가 깊은 곳이었고 장삼풍 대에 이르러 무당파를 창건하게 된다. 작품에서 장삼풍은 사패 전대의 천하제일인[6] 으로 묘사된다. 무공면으로도 장삼풍의 직계제자 허공진인은 무신이란 칭호를 받고 있으며, 그 제자 명경은 불과 이십대의 나이에 구파 장로와 동수를 이룬다는 평을 받는다.[7]
장삼풍 이후 허자 항렬 아래 현양진인이 장문인으로 있으며 민초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데 있어서 황제 저리가라 할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다만 황제가 군림을 한다면 무당은 민초와 함께 숨쉰다는 정도? 무당마검의 배경상 명은 이제 막 영락제의 치세가 시작되는 시기[8] 로 최소한 호북성[9] 에서는 황제보다도 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상황.[10] 영락제는 이러한 무당파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11] 과 재력을 주어 무당파의 영향력을 등에 업음과 동시에 신진제자들을 종군[12] 시키는 대가를 얻어낸다. 동물적인 정치감각이랄까.
결과적으로 무당파는 물질적인 부흥을 얻기는 했으나...더이상 이전만큼의 현기는 간직할 수 없었다[13] . 그야말로 대무당파로 발전하기는 하였으되 이전만큼의 민심을 얻지는 못하는 듯.[14] 그래도 명성이든 무공이든 구파의 수위급인 것은 확고하다.[15]
3.3. 《군림천하》의 무당파
소림과 더불어 구대문파중에서도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거대문파이자 ''''기산취악의 진정한 원흉''''. 당시 기산취악의 변 당시 무당파의 장문인이었던 목엽진인이 어느 여인에게 종남파를 구대문파에서 제명시킬 것을 명령받았다는 떡밥이 있으며[16] , 이로 인해 흑막 중 하나로 크게 의심되는 상태. 당대 장교(掌敎)는 삼십이대 현령진인(玄靈眞人)이며, 항렬배분은 엽(葉)-현(玄)-청(靑)
3.3.1. 대엽진인(大葉眞人)
무당의 전대배분이자 강호의 최고 웃어른인 환우삼성중 한 명. 본래 무당파의 장문인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청정을 추구하고 개인적인 수양에 힘쓰던 그의 성격으로 인해 고사하고 사제인 목엽진인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무당파 본 건물이 위치한 천주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진각(淸塵閣)이라는 전각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거주하였으며[17] 본인의 허락이 없이는 출입을 금지하며 수행한 결과 무당파의 양의무극신공을 대성한 초절정 고수. 모용봉을 둘러싼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유중악의 요청을 받아들여 본래 무당집회가 끝나갈 즈음 모습을 드러내려 하였으나 혁리공의 계략으로 인해 자취를 감춘 상태.
신분으로만 따지면 금수저중의 금수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환우삼성의 일인인데다가 무당파의 최고 어른이며, 초대 천봉궁주인 경성홍안 백모란의 아들이다.
3.3.2. 목엽진인(木葉眞人)
무당파 전대 장문인. 종남파의 구대문파 퇴출을 처음 안건으로 내놓은 사람. 발의를 하기 전날에 은밀히 굉요대선사를 찾아와, 자신이 내일 종남파의 구대문파 퇴출을 안건으로 내놓을 것이니 그 안건에 찬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굉요대선사의 말로는 의문의 여인에게 종남파를 구대문파에서 제명할 것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3.3.3. 선엽진인(仙葉眞人)
현수도장의 사부. 대엽진인과 친분이 두터워 그의 거소에 출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
3.3.4. 현령(玄靈)
현 무당파 32대 장문인. 전대 장문인이 철혈홍안의 사주를 받고 종남파의 기산취악을 주도한데다, 현 무림맹주인 위지립과 갈등을 빚고 소림을 밀어내고 무림대회를 주도하려 드는 등의 행보로 종남파를 적시할 것으로 여겨졌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의외로 소탈하고 같은 검객으로서 진산월의 경지를 솔직하게 칭찬하는데다 위지립과도 별 잡음 없이 일을 진행시키는 등 들어왔던 것과 이미지가 차이가 나고 있다. 소림 장문인 대방선사가 종남파의 구파 복귀건을 꺼낸 것을 언급하면서, 구파의 결정이 어떤 것이건 받아들이라고 말해 아니꼽게 여긴 진산월이 무당파의 투표는 어찌 될 것 인가를 묻자 의외로 선선히 중립을 지켜 기권할 것이라고 해서 진산월을 의아케 한다.[18]
결국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서 더 큰 공적을 세운 문파[19] 에게 구대문파 복귀를 허용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견 자체는 백리장손이 처음 꺼냈지만, 그걸 제안으로 만든 사람은 결국 현령진인이다. 현령진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종남파에 유리한 방향은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진산월조차도 문하제자가 부족하다는 종남파의 치명적인 약점을 절묘하게 파고든 방안에 대해 크게 경각심을 가지며, 결국 해당 제안에 대해 비틀어서 받아들인다.[20] 결국 현령진인이 진산월에게 밀려서 기존의 제안을 번복하고 해당 사안에 대해 다시 상의하겠다고 밝힌다.
3.3.5. 현우(玄羽)
무당파 당대 장문인이 가장 신임하며 무공이 제일 고강한 두 명의 사형제를 뽑아 임명하는 호법도장(護法道長) 중 한 명[21] . 먹으로 그린 듯한 눈썹에 사자코, 두툼한 입술 등 상당히 남성적인 외모를 지녔으며 그에 맞게 젊은 시절에는 사마외도를 원수와 같이 미워하여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한다. 그로 인한 별호는 혈수흑도(血手黑道). 범상치 않는 기도를 품기며 모용봉의 생일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등장했으나 누군가 술에 탄 독을 마시고 사망. 활약이 전혀 없다(...)
3.3.6. 현수(玄修)
눈처럼 새하얀 백발이지만 얼굴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혈색이 좋고 정명한 눈빛을 가진 도인. 무당파에서도 무공과 선술을 모두 익힌 몇 안되는 도인으로, 특히 선술은 무당파에서 손꼽히는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무공에도 일가견이 있어, 무당십이검 중 한 명인 청현(靑賢)이 그의 제자이다. 유중악과 상당한 친분을 자랑하는 인물로 후홍지의 의혹에 동감하여 사형인 현우에게 무당을 방문할 것을 종용했고 이에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인지 무당파의 전대 어른인 대엽진인을 모셔오겠다는 거대한 떡밥을 투척한다.
3.3.7. 현성(玄聖)
무당파의 호법도장 중 한 명. 현령진인의 사제이며 인망이 두터워 따르는 자들이 많다.
3.3.8. 무당십이검(武堂十二劍)
소림사 팔대신승에 대응하는 무당파 최고의 후지기수 집단.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특이한 신분이고, 지위나 비중이 장로들에 못지않다. 청(靑)자 항렬이다.
'''청운(靑雲)'''
무당십이검의 일원으로 무당파의 기대주. 진산월과 함께 동광사에서 쾌의당 세력과 조우해 운자추와 겨루게 된다. 당시 진산월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절정 무공을 선보며 진산월을 암담하게 만들었다. 동광사에서는 운자추와 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진산월이 조직한 대 서장무림 선봉조직 선반에 합류한다.
'''청현(靑賢)'''
무당십이검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사람됨이 진솔하고 행동거지가 무거워서 무당파 내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다. 현수도장의 제자로 청명과 함께 현우도장을 호위하여 모용봉의 생일연에 방문했다.
'''청명(靑冥)'''
청현과 함께 현우도장을 호위하여 모용봉의 생일연에 방문했다. 현우도장의 죽음에 관한 미심쩍은 점을 단번에 눈치채는 등 우직한 성격의 청현보다 눈치가 빠르다는 인상을 보인다.
'''청석(靑晳)'''
청운의 사형. 무당십이검 중 서열 삼 위의 고수.
'''청평(靑平)'''
현성진인(玄聖眞人)의 제자로, 나이로는 무당십이검의 막내지만 무공실력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공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성격 또한 겸손하여 스승인 현성진인이 무림에 출도할 때 신령(神靈)이라는 호를 하사하려 하였으나 "아직 어리석어 깨우치지 못했다(大愚不靈)"이라고 답하며 스스로 불령(不靈)을 자처, 불령검(不靈劍)으로 불리게 되었다. 머지않아 무당십이검 중 으뜸이 될 것이라 여겨지는 인물.
4. 동음이의어
無黨派.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22]
현대 민주정에선 의회정치와 복수정당의 정당정치를 기본으로 삼는데, 당적을 두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이나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를 일컬어 무당파 혹은 무당층이라고 한다.
1996년도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온 후보들이 모여 만든 '무당파' 당이 나오기도 했었다. '''당이 없는 일파'''의 '''당'''이라니 좀 아이러니할지도 모르겠다.
[1] 항목의 힙합그룹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단, 실제 중국어 발음에 따른 병음 표기로는 Wutang이 아니라 Wudang이다.[2] 유대암은 속가제자인데 제자는 출가한 도사라는 점이 좀 이상하다.[3] 작중 초반에는 장삼봉은 자신이 터득한 불완전한 구양진경을 보완하고자 태극공(太極功)을 오랜 시간 들여 만들고 있었다고 기술되었는데, 태극공을 완성하고 다음 과제로 태극권과 태극검을 만든 것인지, 방향 전환을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4] 아무래도 소오강호 전체에서 검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려졌을 수는 있다.[5] 아무리 중국의 허풍이 장대하다고 하지만 이건 도를 넘어선 수준의 허풍이다. 7명이 64명의 힘을 낸다면 이십팔수대진이나 천강북두진을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수준의 무공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된다. 결정적으로 무당칠협은 당대의 최고 수준 고수들인데, 대등한 상대 수십 명과 겨룰 만한 상황 자체가 아예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즉 장삼봉의 뇌내망상 혹은 작가의 과장법. 애시당초 진무칠절진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호조절호수니 뭐니 고심할 필요 없이 7명이 뭉쳐서 이 기술로 몽땅 휩쓸어버리면 상황 끝이다...하지만 장삼봉의 100세 생일때는 유대암이 폐인이된 상태라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했다.[6] 뭐 물론 철위강의 스승이 반초차로 이겼다곤 하지만... 인품에서 반초차로 뒤졌다고 패배를 시인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세속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은거했다.[7] 배분으로 따진다면 명경역시 구파의 장로급이다.[8] 연왕으로 난을 일으키고 2년의 내전을 종식시키며 명실상부한 황위에 오른 후,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폭적인 인사조치 직후의 시점[9] 좀 더 넓게 잡으면 안휘성까지[10] 그렇다고 무당파가 야욕수준으로 황제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세속적인 욕망과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황제의 어명이 있기 전까지 무당파는 자급자족한다. 그야말로 농사지어 먹고 산다. 그냥 막말로 '''가난하다'''. 애써 묘하다고 표현하지만. 물론 이 동네 도사님들은 감히 주치, 주치하며 황제의 이름을 입에 올리곤 하는 대인배들.[11] 천검 천화진인이 삐진 이유중 하나[12] 다섯은 원나라 북벌로, 나머지 다섯은 남해 왜구 토벌로. 명경 일행은 처음엔 북으로, 돌아와서는 이내 남으로 떠난다.[13] 이대 제자들이 명경에게 까불었다가 개발살 나는 장면은 무당마검중에서 시원씁쓸한 장면중 하나[14] 허나 나중에는 북벌과 왜구 토벌에서 돌아온 이들과, 특히 무당마검 명경의 영향으로 문파가 커진만큼, 다시 현기를 되찾았다는 간접적 표현이 나온다[15] 한백무림서에서 구파의 수위는 소림이다. 나찰사만 따져봐도 제일 낮은 수준이 악도군 급이라니... 애초 한백림은 무림의 미국(...)의 위상으로 소림을 설정했다고 한다 .[16] 심지어 무당파가 기산취악의 직접적 원흉이라는 것을 증언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림사의 전대 방장인 굉요대선사이라서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상태. 워낙 충격적인 사실인지라 굉요대선사조차도 고뇌한 끝에 침묵하려고 했으나 이 사건이 덮는다고 해서 해결된 사안이 아님을 통감하고 결국 입적하기전에 본인의 제자이자 이후 소림사의 방장이 되는 대방 단 한명에게만 진실을 밝힌다. 이후 대방도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 한명에게만 이 사실을 밝힌다.[17] 사문의 웃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부터 식사까지 본인 스스로 해결하였다[18] 진산월은 무당파같은 명문 정파가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므로 무당파는 이번에도 종남파의 복귀를 반대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이를 지적함으로서 우리 종남파에 적대적인 무당파가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가 라는 뜻으로 질문한 것. 그런데 정작 나온 답변은 전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였으니 진산월은 의아한 것이였다.[19] 형산파와 종남파 중에서[20] 기존의 제안은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 대해 형산파와 종남파끼리 공적 세우기 경쟁을 시키는 것이라면 진산월이 비틀어서 받아들인 것은 형산파에 대해 종남파는 신경 자체를 쓰지 않고 진산월 혼자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 나서고, 서장 무림과의 싸움이 끝나면 둘중 힘이 더 강한 문파가 자연스럽게 구대문파에 복귀하는 것이다.[21] 무당파의 청색 도복 대신 검은 도복을 입는다[22] "무 당파"로 발음 해야한다 위의 무당파는 "무당 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