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양
郭襄
<신조협려>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인물.
곽정과 황용의 둘째 딸로 큰딸인 곽부와는 무려 나이 차이가 16살 정도 난다. 그 동안 이 부부가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름의 양(襄)자는 양양성(襄陽成)에서 따왔다. 곽정의 정(靖)자가 '정강(靖康)의 치욕'[1] 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정강의 정자에서 따온 것과 마찬가지로, 양양성에서의 어려움을 잊지 말자는 의미.
찌질하고 무능력(어디까지나 먼치킨 부모에 비교해서지만)한 곽부와는 다르게 황약사, 황용을 잇는 머리 좋고 말빨 좋은 타입. 황약사처럼 여러가지에 두루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무공의 진전이 느렸다고 한다.
자기 고집이 세며, 예전의 황용보다 대담하고 거침없는 성격인 점도 동사(東邪) 황약사를 닮았기 때문에 '소동사(小東邪)'라고 불리운다.
황용을 살짝 다운그레이드한 버전이라고 하면 정확할 듯하다.
다른 소설이라면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꿰찰 재목이었지만 아쉽게도 조연이기 때문에 안습한 인생을 산다. 특히 신조협려 후반부에는 금륜법왕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막판까지 '인질이 된 공주님' 포지션...-_-
황용은 곽정과의 만남을 계기로 무공과 가정, 부, 행복 등 모든 걸 손에 넣었지만 곽양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해 평생 솔로로 살았다. 양과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어떤 인물인가 알고 싶다는 호기심 수준이었지만 양과와 만나고 짧은 시간 같이 움직이며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헤어질 때 양과의 맨얼굴을 보게 되면서 완전히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후 단장애에서 뛰어내리는 양과를 보자 구해내려기 보다는 차라리 함께 죽으려는 마음으로 뒤따라서 뛰어내릴 정도로 양과에게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양과는 소용녀에게 일편단심이므로 이후에 결국 일생동안 수절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던 듯. 무공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지만(딱 사조영웅전 초기의 황용 수준) 인질로 잡혔을 때의 태도를 보면 성질이 상당히 대단한 듯하다.
최근의 개정판에서는 금륜법왕과의 교류가 대폭 강화되어 법왕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약간의 무공을 배우기도 했으며, 특히 법왕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배운 것은 이후 곽양이 불문에 귀의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2006년판에는 자신을 구하고 죽은 금륜법왕을 위해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금륜법왕의 무공을 전수받는 걸 거부했지만. 2014년판에선 짧은 시간이지만 법왕에게 무공을 배운다.
후에 비구니가 된 주된 이유는 양과를 못 잊어서다. 양과의 피해자의 한 명.
신조협려 2006년판 드라마에서 양미가 곽양 역을 맡아 싱크로율 200%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역비의 소용녀와 함께 신조협려 2006년 판이 팬들에게 반응이 좋은 이유. 단 양과, 소용녀, 곽양 역의 배우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전체적으론 그리 호평을 받지 않는다. 특히 곽양이 본격 출현하기 시작하는 후반부는 워낙 스토리에 비해 할애된 회차도 적고 묘사 또한 몹시 부실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피해를 본 캐릭터.
황용에게 태어났을 때는 금륜법왕이 곽정이 부상을 입은 것을 기회로 삼아 양양성에 쳐들어왔을 때였다. 그런데 소용녀가 곽양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곽양이 양과와 소용녀의 아이라고 착각한 이막수는 곽양을 납치해가버린다.
그리고 한달간 이막수의 손에 길러지며 표범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된다. 그리고 곽부에게 팔을 잘려서 화가 단단히 나 있던 양과가 납치해서 고묘파의 활사인묘로 데려가며, 얼마동안 옥봉 꿀을 먹여서 길렀다. 고묘에서 배가 고파서 울었던 것 덕분에, 그 울음소리를 듣고 이막수의 흉계로 석실에 갇혀 있던 야율제 일행이 벽에 구멍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곽부가 소용녀를 중독시킨 것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난 양과가 또 데려가버린다.
절정곡에서는 구천척이 부추기는 바람에 살심이 발동한 구천인에게 살해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황용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겨우 엄마 품에 안겨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6년 후, 곽부, 곽파로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안도노점(安渡老店)이라는 객점에서 사람들에게 신조협(神雕俠)의 활약상을 듣고 그를 동경하게 된다. 양과의 이야기만 나오면 곽정이 곽부를 호되게 꾸짖었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양과에 대해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곽양은 양과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산 일굴귀 중 대두귀를 따라가 그들과 만수산장의 다섯 형제의 싸움에 끼어들게 된다.
만수산장의 다섯 형제가 자신들이 부리는 맹수를 풀자, 대두귀를 돕다가 만수산장이 부리는 표범들에게 위협을 당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에 표범의 젖을 먹고 자란 탓에 표범과 같은 체취가 생겨 표범에게는 공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동경하던 신조협을 만나게 된다. 양과를 따라 구미영호를 잡으러 가다가 구미영호를 기르고 있던 영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양과를 따라 주백통을 만났으며, 양과와 주백통이 싸울때 주백통이 쌍수호박을 사용하자 양과를 돕기 위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곽정에게 훔친 거라고 화를 내면서 트집을 잡고 양과는 한 팔 밖에 없는데 양손을 쓰는 건 비겁하다면서 한 손을 묶고 싸우도록 꾀를 쓰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황용 못지않은 꾀였지만 양과는 영웅호걸답게 거절했다.
또, 양과가 여자에게 팔을 잘렸다는 이야기를 주백통에게 듣고 '어떤 독하고 나쁜 년이 그랬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주백통과 영고, 단지흥의 오랜 은원을 해결한 후 구미영호를 얻어와 만수산장의 사숙강이 살아나자,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곽부가 곽양을 찾아 잔치장에 쳐들어오자 떠나면서, 양과에게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증표로 3개의 금침을 받는다. 그리고 가면을 벗어서 보여달라는 부탁과 올해 10월 24일 생일날에 양양에 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곽부, 곽파로와 함께 집에 돌아온 후에는 함부로 행동했다고 혼났다. 곽부가 개차반이 된 것을 보고 후회하여 곽정과 황용이 엄하게 키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양양성 영웅대회가 벌어지기 직전에, 노유각이 살해되자 평소 노유각과 정답게 지내고 있었던 곽양은 노유각이 자주 들리던 성 밖의 사당에 가서 혼자 제사를 지냈다. 곽부가 찾아와서 야단을 치고,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니마성의 습격을 받는다. 무공이 강해진 니마성은 곽부와 곽양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었으나 몰래 양과가 도와주어 니마성을 처치한다.
그리고 양양 영웅대회와 개방방주 선출에 이어서, 양과의 배려로 자신의 생일잔치가 열리게 된다.
곽양은 양과가 자신이 그 동안 사귄 여러 고수들을 통해 준비해준 3가지 선물
1. 몽골군 선봉 2천명의 목숨과 그 증거물로 수천개의 귀 보따리.
2. 몽골군의 군량과 마초, 병기등의 창고를 불태우는 것.
3. 개방 제자를 사칭하여 방주의 지위를 얻으려 한 곽도의 정체를 드러내고 주살하여 노유각의 죽음에 대한 복수.
를 받게 된다. 또 덤으로 연극단과 악단, 불꽃놀이와 광대 등을 보내서 화려한 잔치도 벌여준다. 황약사도 찾아와 곽양을 귀여워해준다.[2] 그리고 황용에게 양과의 과거 사연을 듣게 된다.
양과의 사연을 알게 된 곽양은 혹시 양과가 소용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자살할 까봐 두려워, 그를 말리기 위해 양양성을 떠나 양과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중원에 돌아온 금륜법왕을 만나 납치당하고 만다.
곽양의 총명함과 착함을 본 금륜법왕이 제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괴롭힘 당하지는 않고, 오히려 몽골의 군영에서 융숭하게 대접받았다. 그리고 금륜법왕이 양과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도발하여 절정곡으로 가게 한다. 소용녀가 오지 않아 좌절한 양과가 단장애로 뛰어내리자, 당장 자신도 단장애로 몸을 던진다.
단장애 바닥에서 양과를 만나자, 양과가 예전에 전해준 금침을 꺼내주면서 양과가 약속한 마지막 3번째 부탁으로 자결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큰 수리가 내려오자 수리를 타고 올라가서 단장애를 벗어나 양과가 아래에 있다고 황용에게 말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모두 내려간 동안에, 황약사와 단지흥에게 혈도가 찍혀 쓰러져 있던 금륜법왕의 말에 속아 그의 혈도를 찍어주었다가 다시 일어난 금륜법왕에게 잡혀서 다시 몽골군영으로 끌려간다.
몽골군영에서 양양성이 아무래도 함락되지 않자, 금륜법왕과 함께 높은 망루 위에 올려져서 인질이 된다. 하지만 곽정의 딸 답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한 태도를 보인다.
황약사가 이십팔숙진으로 성내의 모든 고수들을 이끌고 출전하였지만, 몽골군의 양동작전 때문에 성이 위기에 빠지자 곽양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어 불타 죽을 위험에 빠졌다. 하지만 그때 양과와 소용녀가 신조를 타고 나타나 금륜법왕을 쓰러뜨리고 구출하게 된다.
화산논검이 있은 후, 2년이 지나 18살이 되었다.
양과를 찾아 고묘에 갔으나 몸종만 나오고 사흘간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자 다시 방황을 시작한다. 하지만 근황을 찾을 수 없어 소림사의 무색선사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각원대사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림사 승려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무색선사와 만나 오해를 풀게 된다. 그리고 곤륜삼성이 소림사에 도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만나기 위해 보름간 소림사 근처에서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서역 소림파의 3인방을 만나 그들이 곤륜삼성이라 오해하여 시비가 붙게 된다. 하지만 진짜 곤륜삼성인 하족도가 서역 소림파의 인물들을 쓰러뜨리자 함께 소림사로 올라가게 된다.
소림사에서 장군보가 나한권으로 하족도를 이긴 후,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자 각원대사, 장군보와 함께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각원대사가 입적할 때 구양진경을 듣게 된다.
소림사에게 쫓기게 된 장군보를 위해서 자신의 금실 팔찌를 증표로 주면서, 양양성에 가서 곽정의 보호를 받으라고 말해준다. 덤으로 곽파로는 순박해서 잘 지낼 수 있겠지만, 곽부는 성미가 고약하므로 비위를 잘 맞춰주라고 조언해주고 장군보와 헤어졌다.(…)
황용이 의천검과 도룡도를 만들 때 의천검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검법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곽정과 황용, 곽파로가 양양성에서 순국할 때는 사천(四川)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도울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양과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이 40세가 되자 대오각성하여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불교에 입문. 비구니가 되었으며 아미파를 창시하였다.
곽파로가 죽을 때 사라져버린 도룡도를 찾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했지만 죽을 때까지 찾지 못했으며, 그래서 아미파 장문인에게 대대로 의천검과 그 비밀을 전수하고 도룡도를 찾는 임무를 맡기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곽정, 황용 부부 양 가문의 무공을 조금씩 물려받았다. 의천도룡기 본편에서는 도화도의 난화불혈수나 낙영검법, 한소영으로부터 곽정에게 전수된 월녀검법 등을 구사하는 대목이 있다. 단 성격이 총명한데 집중력이 없어서인지 젊은 시절에는 무엇 하나 진득하게 대성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젊은 시절 곽양의 가장 탁월한 점은 '''재능이 뛰어나고 보는 눈이 좋다'''는 점인데, 아버지처럼 힘써서 적은 무공을 파고들기보다 어머니처럼 이것저것 익히고 '''보는 족족 따라하는''' 재치를 지니고 있다. 무색선사와의 십 초 내기에서 이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십 초 내에 곽양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겠노라고 장담하는 무색선사를 대적해서 십 초 모두 종잡을 수 없이 다른 문파의 무공을 구사한다. 타구봉법, 옥녀검법, 니추공, 일양지, 철장방의 철장공, 전진교의 전진검법, 주백통의 공명권 등등.... 심지어 마지막에는 소림사의 철나한으로부터 익힌 나한권의 초식으로 대들기까지 한다. 이 대결에서 사용한 무공은 대부분 정식으로 전수받기는커녕 두어 차례 견식한 정도지만, 워낙 눈썰미가 좋아서인지 겉보기만큼은 빈틈없이 재현해내는 저력을 보인다. 나한당의 수좌로서 강호의 여러 무공들을 연구해 온 무색선사조차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녀가 떨군 철나한을 보고서야 알아낼 정도.[3]
여러 무공을 배웠지만 특별히 정통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어머니인 황용, 신조협 양과의 신조를 만나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둘과 굳이 비교하자면 더 잡다하게 많은 것을 알고, 진정한 공력은 더 떨어진다는 차이점이 있다.[4]
각원대사가 임종할 때 구양진경을 듣고, 후일 아미파를 개창한 후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있던 구양진경의 내용을 모아 아미구양공을 만들었다.
장무기의 세대에서는 아미파를 개창하고 특히 검술로 위용을 떨쳤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작중 묘사되는 아미파 무공의 경지가 결코 소림과 무당에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5] [6] 결국 아미구양공을 바탕으로 무공이 대성한 듯하다. 단 나이 사십을 먹도록 강호를 주유하면서 양과와 소용녀의 자취를 쫓다가 처녀의 몸으로만 장문직을 물려받을 수 있는 아미파를 열고 독신으로 지낸 것을 보아 일생이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아미파를 개창한 후에도 양과와의 추억을 잊지 못했는지, 아미파 검법 중에는 양과와 함께 흑소에서 구미영호를 쫓았던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흑소영호' 초식이 있다.
개정판에서 아미파가 불가계통의 문파가 된 이유에는 금륜법왕과 함께 했던 시절의 영향이 있는 걸로 나온다. 양과에 대한 짝사랑을 들은 금륜법왕이 번뇌를 없애는 진언을 알려주기도 했고,[7] 마지막 순간에 곽양을 구하고 죽기까지 했다.
곽양의 일생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할만 하다.
태어나자마자 이막수에게 잡혀갔지만 이막수는 곽양에게 모성 비슷한 감정을 느껴 지극히 사랑했다. 사람을 때려죽이기만 하던 불진이 처음으로 남을 이롭게 했던 일이 바로 곽양 주변의 벌레를 쫓으려고 슬슬 휘둘렀을 때다.
양과가 이막수와 황용에게서 몰래 빼돌리고 다시 황용에게 돌아올 때까지도 양과와 소용녀에게 많은 애정을 받았다.
16년 후 신조협에 대한 호기심에 대두귀를 따라 나섰을 때 귀찮으니 죽이려던 서산 일굴귀들 사이에서 묘하게 호감을 느낀 대두귀의 만류로 해를 입지 않았고, 만수산장에서 서산 일굴귀가 모조리 표범들에게 물려 죽을뻔 했을 때도 같이 있던 곽양은 표범들이 오히려 반가워하며 혀로 핥았다.
이후 양과의 요청으로 많은 무림인사들이 생일을 축하해줄 때도 곽양 본인의 천성적인 호방함으로 많은 호감을 샀고, 금륜법사에게 잡혀 끌려갈 때도 품성과 재능에 호감을 느낀 금륜이 제자로 삼고자 굉장히 많은 애정을 쏟았다. 심지어 개정판 기준 금륜의 최후는 곽양을 구하려다 사망한 것이다!
<신조협려>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인물.
1. 개요
곽정과 황용의 둘째 딸로 큰딸인 곽부와는 무려 나이 차이가 16살 정도 난다. 그 동안 이 부부가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름의 양(襄)자는 양양성(襄陽成)에서 따왔다. 곽정의 정(靖)자가 '정강(靖康)의 치욕'[1] 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정강의 정자에서 따온 것과 마찬가지로, 양양성에서의 어려움을 잊지 말자는 의미.
찌질하고 무능력(어디까지나 먼치킨 부모에 비교해서지만)한 곽부와는 다르게 황약사, 황용을 잇는 머리 좋고 말빨 좋은 타입. 황약사처럼 여러가지에 두루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무공의 진전이 느렸다고 한다.
자기 고집이 세며, 예전의 황용보다 대담하고 거침없는 성격인 점도 동사(東邪) 황약사를 닮았기 때문에 '소동사(小東邪)'라고 불리운다.
황용을 살짝 다운그레이드한 버전이라고 하면 정확할 듯하다.
다른 소설이라면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꿰찰 재목이었지만 아쉽게도 조연이기 때문에 안습한 인생을 산다. 특히 신조협려 후반부에는 금륜법왕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막판까지 '인질이 된 공주님' 포지션...-_-
황용은 곽정과의 만남을 계기로 무공과 가정, 부, 행복 등 모든 걸 손에 넣었지만 곽양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해 평생 솔로로 살았다. 양과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어떤 인물인가 알고 싶다는 호기심 수준이었지만 양과와 만나고 짧은 시간 같이 움직이며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헤어질 때 양과의 맨얼굴을 보게 되면서 완전히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후 단장애에서 뛰어내리는 양과를 보자 구해내려기 보다는 차라리 함께 죽으려는 마음으로 뒤따라서 뛰어내릴 정도로 양과에게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양과는 소용녀에게 일편단심이므로 이후에 결국 일생동안 수절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던 듯. 무공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지만(딱 사조영웅전 초기의 황용 수준) 인질로 잡혔을 때의 태도를 보면 성질이 상당히 대단한 듯하다.
최근의 개정판에서는 금륜법왕과의 교류가 대폭 강화되어 법왕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약간의 무공을 배우기도 했으며, 특히 법왕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배운 것은 이후 곽양이 불문에 귀의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2006년판에는 자신을 구하고 죽은 금륜법왕을 위해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금륜법왕의 무공을 전수받는 걸 거부했지만. 2014년판에선 짧은 시간이지만 법왕에게 무공을 배운다.
후에 비구니가 된 주된 이유는 양과를 못 잊어서다. 양과의 피해자의 한 명.
신조협려 2006년판 드라마에서 양미가 곽양 역을 맡아 싱크로율 200%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역비의 소용녀와 함께 신조협려 2006년 판이 팬들에게 반응이 좋은 이유. 단 양과, 소용녀, 곽양 역의 배우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전체적으론 그리 호평을 받지 않는다. 특히 곽양이 본격 출현하기 시작하는 후반부는 워낙 스토리에 비해 할애된 회차도 적고 묘사 또한 몹시 부실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피해를 본 캐릭터.
2. <신조협려>의 곽양
황용에게 태어났을 때는 금륜법왕이 곽정이 부상을 입은 것을 기회로 삼아 양양성에 쳐들어왔을 때였다. 그런데 소용녀가 곽양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곽양이 양과와 소용녀의 아이라고 착각한 이막수는 곽양을 납치해가버린다.
그리고 한달간 이막수의 손에 길러지며 표범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된다. 그리고 곽부에게 팔을 잘려서 화가 단단히 나 있던 양과가 납치해서 고묘파의 활사인묘로 데려가며, 얼마동안 옥봉 꿀을 먹여서 길렀다. 고묘에서 배가 고파서 울었던 것 덕분에, 그 울음소리를 듣고 이막수의 흉계로 석실에 갇혀 있던 야율제 일행이 벽에 구멍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곽부가 소용녀를 중독시킨 것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난 양과가 또 데려가버린다.
절정곡에서는 구천척이 부추기는 바람에 살심이 발동한 구천인에게 살해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황용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겨우 엄마 품에 안겨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 16년 후의 곽양
16년 후, 곽부, 곽파로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안도노점(安渡老店)이라는 객점에서 사람들에게 신조협(神雕俠)의 활약상을 듣고 그를 동경하게 된다. 양과의 이야기만 나오면 곽정이 곽부를 호되게 꾸짖었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양과에 대해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곽양은 양과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산 일굴귀 중 대두귀를 따라가 그들과 만수산장의 다섯 형제의 싸움에 끼어들게 된다.
만수산장의 다섯 형제가 자신들이 부리는 맹수를 풀자, 대두귀를 돕다가 만수산장이 부리는 표범들에게 위협을 당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에 표범의 젖을 먹고 자란 탓에 표범과 같은 체취가 생겨 표범에게는 공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동경하던 신조협을 만나게 된다. 양과를 따라 구미영호를 잡으러 가다가 구미영호를 기르고 있던 영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양과를 따라 주백통을 만났으며, 양과와 주백통이 싸울때 주백통이 쌍수호박을 사용하자 양과를 돕기 위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곽정에게 훔친 거라고 화를 내면서 트집을 잡고 양과는 한 팔 밖에 없는데 양손을 쓰는 건 비겁하다면서 한 손을 묶고 싸우도록 꾀를 쓰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황용 못지않은 꾀였지만 양과는 영웅호걸답게 거절했다.
또, 양과가 여자에게 팔을 잘렸다는 이야기를 주백통에게 듣고 '어떤 독하고 나쁜 년이 그랬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주백통과 영고, 단지흥의 오랜 은원을 해결한 후 구미영호를 얻어와 만수산장의 사숙강이 살아나자,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곽부가 곽양을 찾아 잔치장에 쳐들어오자 떠나면서, 양과에게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증표로 3개의 금침을 받는다. 그리고 가면을 벗어서 보여달라는 부탁과 올해 10월 24일 생일날에 양양에 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곽부, 곽파로와 함께 집에 돌아온 후에는 함부로 행동했다고 혼났다. 곽부가 개차반이 된 것을 보고 후회하여 곽정과 황용이 엄하게 키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양양성 영웅대회가 벌어지기 직전에, 노유각이 살해되자 평소 노유각과 정답게 지내고 있었던 곽양은 노유각이 자주 들리던 성 밖의 사당에 가서 혼자 제사를 지냈다. 곽부가 찾아와서 야단을 치고,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니마성의 습격을 받는다. 무공이 강해진 니마성은 곽부와 곽양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었으나 몰래 양과가 도와주어 니마성을 처치한다.
그리고 양양 영웅대회와 개방방주 선출에 이어서, 양과의 배려로 자신의 생일잔치가 열리게 된다.
곽양은 양과가 자신이 그 동안 사귄 여러 고수들을 통해 준비해준 3가지 선물
1. 몽골군 선봉 2천명의 목숨과 그 증거물로 수천개의 귀 보따리.
2. 몽골군의 군량과 마초, 병기등의 창고를 불태우는 것.
3. 개방 제자를 사칭하여 방주의 지위를 얻으려 한 곽도의 정체를 드러내고 주살하여 노유각의 죽음에 대한 복수.
를 받게 된다. 또 덤으로 연극단과 악단, 불꽃놀이와 광대 등을 보내서 화려한 잔치도 벌여준다. 황약사도 찾아와 곽양을 귀여워해준다.[2] 그리고 황용에게 양과의 과거 사연을 듣게 된다.
양과의 사연을 알게 된 곽양은 혹시 양과가 소용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자살할 까봐 두려워, 그를 말리기 위해 양양성을 떠나 양과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중원에 돌아온 금륜법왕을 만나 납치당하고 만다.
곽양의 총명함과 착함을 본 금륜법왕이 제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괴롭힘 당하지는 않고, 오히려 몽골의 군영에서 융숭하게 대접받았다. 그리고 금륜법왕이 양과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도발하여 절정곡으로 가게 한다. 소용녀가 오지 않아 좌절한 양과가 단장애로 뛰어내리자, 당장 자신도 단장애로 몸을 던진다.
단장애 바닥에서 양과를 만나자, 양과가 예전에 전해준 금침을 꺼내주면서 양과가 약속한 마지막 3번째 부탁으로 자결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큰 수리가 내려오자 수리를 타고 올라가서 단장애를 벗어나 양과가 아래에 있다고 황용에게 말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모두 내려간 동안에, 황약사와 단지흥에게 혈도가 찍혀 쓰러져 있던 금륜법왕의 말에 속아 그의 혈도를 찍어주었다가 다시 일어난 금륜법왕에게 잡혀서 다시 몽골군영으로 끌려간다.
몽골군영에서 양양성이 아무래도 함락되지 않자, 금륜법왕과 함께 높은 망루 위에 올려져서 인질이 된다. 하지만 곽정의 딸 답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한 태도를 보인다.
황약사가 이십팔숙진으로 성내의 모든 고수들을 이끌고 출전하였지만, 몽골군의 양동작전 때문에 성이 위기에 빠지자 곽양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어 불타 죽을 위험에 빠졌다. 하지만 그때 양과와 소용녀가 신조를 타고 나타나 금륜법왕을 쓰러뜨리고 구출하게 된다.
4. <의천도룡기>의 곽양
화산논검이 있은 후, 2년이 지나 18살이 되었다.
양과를 찾아 고묘에 갔으나 몸종만 나오고 사흘간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자 다시 방황을 시작한다. 하지만 근황을 찾을 수 없어 소림사의 무색선사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각원대사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림사 승려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무색선사와 만나 오해를 풀게 된다. 그리고 곤륜삼성이 소림사에 도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만나기 위해 보름간 소림사 근처에서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서역 소림파의 3인방을 만나 그들이 곤륜삼성이라 오해하여 시비가 붙게 된다. 하지만 진짜 곤륜삼성인 하족도가 서역 소림파의 인물들을 쓰러뜨리자 함께 소림사로 올라가게 된다.
소림사에서 장군보가 나한권으로 하족도를 이긴 후,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자 각원대사, 장군보와 함께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각원대사가 입적할 때 구양진경을 듣게 된다.
소림사에게 쫓기게 된 장군보를 위해서 자신의 금실 팔찌를 증표로 주면서, 양양성에 가서 곽정의 보호를 받으라고 말해준다. 덤으로 곽파로는 순박해서 잘 지낼 수 있겠지만, 곽부는 성미가 고약하므로 비위를 잘 맞춰주라고 조언해주고 장군보와 헤어졌다.(…)
황용이 의천검과 도룡도를 만들 때 의천검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검법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곽정과 황용, 곽파로가 양양성에서 순국할 때는 사천(四川)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도울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양과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이 40세가 되자 대오각성하여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불교에 입문. 비구니가 되었으며 아미파를 창시하였다.
곽파로가 죽을 때 사라져버린 도룡도를 찾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했지만 죽을 때까지 찾지 못했으며, 그래서 아미파 장문인에게 대대로 의천검과 그 비밀을 전수하고 도룡도를 찾는 임무를 맡기게 되었다.
5. 곽양의 무공
기본적으로 곽정, 황용 부부 양 가문의 무공을 조금씩 물려받았다. 의천도룡기 본편에서는 도화도의 난화불혈수나 낙영검법, 한소영으로부터 곽정에게 전수된 월녀검법 등을 구사하는 대목이 있다. 단 성격이 총명한데 집중력이 없어서인지 젊은 시절에는 무엇 하나 진득하게 대성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젊은 시절 곽양의 가장 탁월한 점은 '''재능이 뛰어나고 보는 눈이 좋다'''는 점인데, 아버지처럼 힘써서 적은 무공을 파고들기보다 어머니처럼 이것저것 익히고 '''보는 족족 따라하는''' 재치를 지니고 있다. 무색선사와의 십 초 내기에서 이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십 초 내에 곽양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겠노라고 장담하는 무색선사를 대적해서 십 초 모두 종잡을 수 없이 다른 문파의 무공을 구사한다. 타구봉법, 옥녀검법, 니추공, 일양지, 철장방의 철장공, 전진교의 전진검법, 주백통의 공명권 등등.... 심지어 마지막에는 소림사의 철나한으로부터 익힌 나한권의 초식으로 대들기까지 한다. 이 대결에서 사용한 무공은 대부분 정식으로 전수받기는커녕 두어 차례 견식한 정도지만, 워낙 눈썰미가 좋아서인지 겉보기만큼은 빈틈없이 재현해내는 저력을 보인다. 나한당의 수좌로서 강호의 여러 무공들을 연구해 온 무색선사조차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녀가 떨군 철나한을 보고서야 알아낼 정도.[3]
여러 무공을 배웠지만 특별히 정통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어머니인 황용, 신조협 양과의 신조를 만나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둘과 굳이 비교하자면 더 잡다하게 많은 것을 알고, 진정한 공력은 더 떨어진다는 차이점이 있다.[4]
각원대사가 임종할 때 구양진경을 듣고, 후일 아미파를 개창한 후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있던 구양진경의 내용을 모아 아미구양공을 만들었다.
장무기의 세대에서는 아미파를 개창하고 특히 검술로 위용을 떨쳤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작중 묘사되는 아미파 무공의 경지가 결코 소림과 무당에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5] [6] 결국 아미구양공을 바탕으로 무공이 대성한 듯하다. 단 나이 사십을 먹도록 강호를 주유하면서 양과와 소용녀의 자취를 쫓다가 처녀의 몸으로만 장문직을 물려받을 수 있는 아미파를 열고 독신으로 지낸 것을 보아 일생이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아미파를 개창한 후에도 양과와의 추억을 잊지 못했는지, 아미파 검법 중에는 양과와 함께 흑소에서 구미영호를 쫓았던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흑소영호' 초식이 있다.
개정판에서 아미파가 불가계통의 문파가 된 이유에는 금륜법왕과 함께 했던 시절의 영향이 있는 걸로 나온다. 양과에 대한 짝사랑을 들은 금륜법왕이 번뇌를 없애는 진언을 알려주기도 했고,[7] 마지막 순간에 곽양을 구하고 죽기까지 했다.
6. 마성의 매력
곽양의 일생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할만 하다.
태어나자마자 이막수에게 잡혀갔지만 이막수는 곽양에게 모성 비슷한 감정을 느껴 지극히 사랑했다. 사람을 때려죽이기만 하던 불진이 처음으로 남을 이롭게 했던 일이 바로 곽양 주변의 벌레를 쫓으려고 슬슬 휘둘렀을 때다.
양과가 이막수와 황용에게서 몰래 빼돌리고 다시 황용에게 돌아올 때까지도 양과와 소용녀에게 많은 애정을 받았다.
16년 후 신조협에 대한 호기심에 대두귀를 따라 나섰을 때 귀찮으니 죽이려던 서산 일굴귀들 사이에서 묘하게 호감을 느낀 대두귀의 만류로 해를 입지 않았고, 만수산장에서 서산 일굴귀가 모조리 표범들에게 물려 죽을뻔 했을 때도 같이 있던 곽양은 표범들이 오히려 반가워하며 혀로 핥았다.
이후 양과의 요청으로 많은 무림인사들이 생일을 축하해줄 때도 곽양 본인의 천성적인 호방함으로 많은 호감을 샀고, 금륜법사에게 잡혀 끌려갈 때도 품성과 재능에 호감을 느낀 금륜이 제자로 삼고자 굉장히 많은 애정을 쏟았다. 심지어 개정판 기준 금륜의 최후는 곽양을 구하려다 사망한 것이다!
[1] 마찬가지로 곽정의 의형제 양강의 강(康)자 또한 여기서 따왔다. [2] 생일이 같은 곽파로는 씹혔다... [3] 철나한이 소림사의 물건이고 본인이 곽양의 생일 선물로 주라고 보낸 것이니 그야말로 곽양이 뜻밖의 본인인증을 때려버린 셈(...). 하지만 철나한을 보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내기에서 졌을 상황이었다. 곽양의 십 초식 중 일부는 무색선사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공들이었고, 이미 아는 무공들은 너무나 유명하면서도 판이한 문파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4] 양과의 경우 배운 무공이 다양한 것은 비슷하지만 적지 않은 무공을 제대로 시간을 들여 전수받았다. 타구봉법만 해도 구결과 변초, 핵심정리 등을 따로 배우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요체를 파악했으며, 황약사의 옥소검법과 탄지신통 역시 황약사에게 정식으로 전수받았다. 옥녀심경은 물론이고 전진파 내공과 초식도 옥녀심경 수련과정에서 자연히 빠삭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렇듯 기초가 튼튼했기에 훗날 일신의 무공을 집대성한 암연소혼장을 창시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5] 아미파의 사상장은 음양오행의 원리로 논하자면 곤륜파와 화산파의 도검합벽보다도 경지가 뛰어나고, 아미구양공의 기기묘묘한 경지 역시 소림, 무당의 구양공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묘사가 있다. 인재의 경우 소림, 무당처럼 고수가 즐비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흠이랄까.[6] 근데 인재가 적은 건 딱히 흠잡기 뭐한 게, 해봤자 창시된 지 3~4대 정도밖에 되지 않을 아미파가 천년 동안 무림의 지존격이었던 소림, 당대 무림 최고 장로 고수 장삼봉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무당칠협이 위세를 떨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당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수준이다.[7] 단 본격적인 유가밀승의 공부는 곽양 쪽에서 거절했다. '번뇌가 없어지면 내가 양과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싫다'라는 내심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