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삼봉

 


張三丰
(? ~ ?)
1. 개요
2. 기록
3. 장삼풍? 장삼봉? 장삼뢰?
4. 《의천도룡기》의 장삼봉
5.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


1. 개요


중국 송나라, 원나라대의 도인이다. 속성이 장(長)임은 기록이 일치하지만 본명과 자에 대해서는 말이 다르다. 명사 방기전(明史 方伎傳)에서는 이름이 전일(全一) 또는 군보(君寶)이며 호가 삼봉(三丰)이라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지방지 중 민주지(岷州志)에서는 "자칭하여 장안충(長安忠)의 5번째 아들이라 하였다. 원통(元統) 계유년(1333) 6월 18일에 태어나 이름은 군실(君實), 자는 전일(全一), 별호는 보화용인(葆和容忍)이라 한다."라고 기록했다. 그 외에도 이름이 통(通)이라고도 하는 등 기록이 서로 다르다. 도호는 현현자(玄玄子)라고도 하고 원원자(元元子)라고도 한다.[1]
도호 장삼봉(张三丰)에 관해선 많디많은 중국 내 썰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游宝鸡山中,有三山峰,挺秀仓润可喜,因号三峰子。而“峰”字和“丰”的简体字同形而错称为“张三丰”。
보계산에서 등산하는데 산봉우리가 3개 있었다. 뛰어나게 빼어나고 창윤하여 마음에 드니 '삼봉자三峰子'라고 칭한다. 그런데 三峰子에서 峰과 丰의 간자체가 비슷하고 발음이 똑같다 보니 지금의 장삼봉(张三丰)이 되었다고 한다.
김용의 소설에서 무당파 개파조사로 등장하거나 언급되었다. 이후 다른 무협소설에서 이러한 설정을 차용하여 일반화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민간전설을 차용한 소설의 허구일 뿐이다. 다만 명사(明史)에서도 당시에 활동한 술법가로 언급하기는 한다.
송말 요동 의주에서 태어났으나 원나라 시대 고아가 되었고, 섬서 화산에서 화룡진인의 제자가 되어 도가수행과 신체운동을 배웠다 한다. 화룡진인의 밑에서 수행을 마친 후 무당산에 입산하여 도인들의 체력관리를 위해 무술과 수행을 결합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태극권을 창시, 이후에는 '태극권의 창시자'또는 '권성(拳聖)'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카더라'''.
말년에 우화등선하여 무당산에 살던 을 때려잡았다는 둥 전설이 다양하게 전해지며, 120세가 넘게 장수했다고 한다. 태극권을 장삼봉이 창안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하지만 태극권은 진가구의 진씨 집안 가전무예라는 것이 무술계의 중론. 장삼봉이 창안했다는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여담으로 이야기하자면 무당파 역시 장삼봉이 세우지 않았다. 역사서에는 동명이인이 3명인데 누가 무당파 창시자인지 알 수 없다. 단 명대 말의 학자 황종희(黃宗羲)가 서술하기로 내가권이 장삼봉에게서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또한, 허풍이 심하디 심한 중국소설 속에서도 장삼봉의 무학경지가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그 많디많은 중국인이 뽑은 김용필하십대고수(金庸笔下十大高手)에서 순위는 개인마다 달라도 한 자리는 꼭 차지한다.

2. 기록


사실 장삼봉에 대한 유일한 정사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황제가 장삼봉 진인을 현자의 예우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숨었다.'''

명사》 방기전

이 기록에서는 장삼봉 진인의 나이를 120세로 추정하였다. 이 기록 때문인지 중국 민간에서는 실재했던 신선이나 이인으로 전설이 대단히 많다.

3. 장삼풍? 장삼봉? 장삼뢰?


명사에서는 장삼봉(張三丰)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중 봉(丰)을 풍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풍요로울 풍(豐)자의 약자로 쓰이기 때문에 때문에 장삼풍(張三豐)으로 쓰고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중국어 발음으로는 봉(丰)과 풍(豐)의 음이 같다. 드물게 한국어로 번역된 중국 무협에서 장삼뢰(張三耒)라고 된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豐의 약자로도 쓰이는 예쁠 봉(丰)자를 쟁기 뢰(耒)자로 오독한 탓으로 보인다.
중국 유송 시대의 도사로 도호를 박양자(樸陽子)라고 한 장삼봉(張三峯)과 혼동하기도 한다. 현현자 장삼봉과 박양자 장삼봉이 둘 다 도사이며 이름이 비슷하고 중국어 발음은 똑같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둘은 서로 다른 인물이다. 본 항목에서는 구판에서는 장삼봉의 한자를 張三峯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중국어로는 봉(丰)ㆍ봉(峯)ㆍ풍(豐)이 모두 발음이 똑같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4. 《의천도룡기》의 장삼봉


[image]
2019년 판.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는 주요한 등장인물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장군보다.
무당파의 개파조사다. 《신조협려》 말미에서 벌어졌던 2차 화산논검에서 최초로 얼굴을 내민다. 당시에는 소림사각원대사 밑에 소속된 10대 초중반인 하인에 불과했으나 각원대사에게 구양진경을 일부 전수받았다. 또한 무공 초식은 전혀 모르는데도 양과에게 몇 수 지도받고 당세의 고수인 윤극서를 엿먹이는 등 자질이 뛰어났다. 이 이름을 쓸 때의 사건은 장군보 항목을 참조. 스승 각원대사가 죽고 벌어진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소림사에서 도망친 후 도가의 원리를 접목한 무공을 창안하여 나중에 소림사와 함께 무림의 양대 산맥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하는 무당파를 세운다.
의천도룡기의 본격적인 스토리는 무당파가 세워지고 시간이 지나 문파의 명성이 높아진, 그가 90세가 되는 시점에서 시작하므로, 본 작품 안에선 호호 할배라 별로 활약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 장무기의 아버지가 장삼봉의 제자였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무당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으며, 장삼봉도 종종 언급된다.
천하오절곽정, 양과, 주백통, 금륜법왕 등 엇비슷한 수준의 절정고수들이 난립했던 두 전작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에서와는 달리, 의천도룡기에서는 주인공장무기가 대성하기 전까지 장삼봉 혼자서 무림지존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장무기가 최고수준의 내공을 보유했고 건곤대나이와 성화령 신공이라는 강력한 무공을 익혔으므로 장무기가 장삼봉과 비슷한 급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위력의 강하를 떠나 무학의 깊이 면에서 명백히 장삼봉이 몇 수는 더 위임을 알 수 있다.[2][3]
소림사도액 등 소림삼대신승, 명교의 광명좌우사와 사대호교법왕,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 조민의 수하였던 현명이로 등의 당세를 주름잡은 고수들도 장삼봉보단 명백히 몇 수 아래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장무기 전대의 명교 교주 양정천이 높은 경지까지 올라 간 것 같긴 하나 그 역시 몇수 아래로 보인다.[4] 게다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보니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았다.
정파무림의 태산북두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명문정파 측에서 무조건적으로 경원하다시피하는 사파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하여, 사파에 몸담은 인물이라 해도 군자의 기질이 있다면 친구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실로 대인배적인 생각을 하였다. 즉, 정과 사를 이분법적으로 일도양단해 버리는 편파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명문정파에 속하여 사파를 매도하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사파 인물들보다 더 악독한 짓을 저지르기를 일삼는 치사한 놈들[5]이 작품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므로 장삼봉의 이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가장 아끼던 제자인 장취산이 죽은 후 사파에 대해서 확실한 반감을 품었다. 장무기에게 절대로 명교에 입교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고, 후에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가 되어 나타나기 전까지 명교에도 감정이 안 좋았다.
95세 무렵부터 해마다 아홉 달씩 폐관 수행을 하였다. 왜냐하면 장삼봉이 구양진경을 바탕으로 무당파 무공을 창안하였는데, 자기가 구양진경의 일부밖에 모르므로 그에 바탕한 무공에 결함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양진경을 온전히 알지 못한 바에야 스스로 무공을 창출하여, 지금까지 자기가 창안한 무공과 전혀 다른 것을 만들려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태극권과 태극검이다.
100세 가 되도록 여전히 숫총각이었으며, 80년간 홀로 수행한 끝에 터득한 순양무극공(純陽無極功)을 극한까지 연마하였다.
무려 110세 나이로 장무기에게 태극권과 태극검법을 가르침으로써 무공이 대성하도록 돕는다. 제자로는 무당칠협이라 불리는 속가제자 7명이 있는데, 장무기의 아버지 장취산은 그 중 다섯째다. 아무튼 엄청난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천도룡기 마지막까지 건재함을 과시하며, 장무기는 작품 내내 장삼봉을 매우 존경하고 우러러보며 그와 무당파가 위기에 처하면 자기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선다.
90세 이후로 10주년 생일마다 안 좋은 대사건이 터진다. 90세 생일 때는 제자 유대암이 폐인이 되어 돌아왔고, 100세 생일 때는 장취산이 자살해버렸다. 110세 때는 장무기가 돌아오는 좋은 일이 있어서 반전이 되긴 했으나 제자들이 납치당하고 무당산은 쑥밭이 될 뻔했다. 얼마 안 있어 막내 제자 막성곡이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으니 일종의 징크스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5.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


장삼봉(육룡이 나르샤) 문서 참고.

[1] 원원자는 '현현자'의 현(玄)을 피휘하여 나온 호칭일 수 있다. 중국 송나라에서는 황제 집안의 시조가 조현랑(趙玄朗)이라 하여 玄을 피휘하여 元이라고 썼다.[2] 장삼봉의 무술 실력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은 의천도룡기 1권에 나오는, 현명이로에 붙잡힌 장무기를 뺏는 장면이다. 장삼봉이 현명이로 중 하나가 잡고 있던 장무기를 순식간에 뺏았았다. 눈앞에서 살짝 어깨를 눌러서 순식간에 현명이로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이 정도라면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현명이로는 의천도룡기 악역 중 무공이 최고라, 주인공 장무기조차 현명이로 2명과 붙어서 단 1초에 패배했다. 만약 죽이려 했다면 단1~2초에 죽였을 것이다. 이 상황까지 고려하면 장무기와 장삼봉의 수준차는 매우 크다. 그 이후 장무기는 무당산에서 장삼봉에게 태극권과 태극검을 직접 지도받고 본인 무학의 여러 부분을 전반적으로 완성하였다. 그래서 장삼봉에게 세심하게 지도받은 지 불과 몇 달 후에 현명이로와 맞붙어 몇십 초만에 패퇴시킬 정도로 무공이 상승하였다. 장삼봉과 장무기의 무학 수준차가 이 정도이다. 장무기가 독학으로 익힌 무공의 한계를 장삼봉이 탄탄하게 다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3] 나중에 장무기의 내공을 보고 각원대사나 양과급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김용 월드에서 누가 내공제일인가는 상당한 떡밥이지만, 내공이 극에 이르면 거기서 거기이며 승패는 초식이나 전술 등으로 결정나기 마련이라, 장무기와 장삼봉은 인간이 수련할 수 있는 내력의 거의 정점에 올라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조영웅전 초반은 몰라도 후반부나 신조협려 당시의 천하오절이 이 경지이며, 이 시대에는 장무기와 장삼봉 정도만이 그 경지에 올랐다. 다만 장삼봉은 현실의 중국 민간전설에서 신선 취급 받는 실존인물이라 김용도 장삼봉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한 묘사는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의천도룡기 시점에서 장삼봉과 장무기가 동급인지,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좀 더 뛰어난지를 논하기란 무의미하다.[4] 아무래도 실존한 무학계의 전설이다보니 그만한 대우를 한 듯하다. 거기다 양정천은 명교의 비전인 건곤대나이 신공도 내공부족으로 다 익히지 못하고 주화입마로 죽었으니 이미 무공의 고하는 꽤 뚜렷하다. 양정천이 장무기보다 명백히 한 수 아래이고, 그 이후 태극권 등을 더 배우고 장삼봉에게 세심한 지도를 받은 장무기에겐 두 수 이상 아래이니, 장상봉에게는 매우 아래일 수 밖에 없다.[5] 화산파의 장문인 선우통, 대리국 주씨의 후예 주장령, 곤륜파의 장문인 부부 하태충과 반숙한 등 세어보면 굉장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