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관

 


'''구치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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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29 代》'''
'''太宗 6年~
成宗 1年'''

'''제29대'''
'''1466.4.18~
1466.10.19'''







'''성명'''
구치관(具致寬)
''''''
이율(而栗)·경률(景栗)
'''생몰연도'''
음력
태종 6년 ~ 성종 1년
양력
1406년 ~ 1470년 9월 13일[1]
'''국적'''
조선
'''시호'''
충렬(忠烈)
'''작위'''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1. 개요
2. 역임지위
3. 여담


1. 개요


조선시대의 영의정으로, 본관은 능성 구씨(綾城 具氏)이다. 1406년 태종 6년에 출생했으며 1470년 성종 1년 9월 13일에 죽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에 있다. 신도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사가정 서거정이 지었으며 족보에 써져 있는 글은 사간 박효원이 지었다[2]. 부인은 청주 이씨 이중부(李仲扶)의 딸이다.
1429년 사마시(생원시)를 급제하고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 살이를 시작했으며, 세조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신임받는 신하가 되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좌익좌리공신이 되어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중요한 직책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생애 중 가장 특기할만한 사건은 사육신 사건 당시 국문을 실질적으로 구치관이 담당했던 것이다. 당시 세조의 친국은 첫날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관이 담당했다. 하지만 육신전의 망령에 휘둘리는 사육신 일화에서는 구치관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악당으로서의 인지도마저 없다. 또 하지만 그의 행적이 해동명신록과 여지승람에 실렸다.
조선 중후기 구씨로서 당상에 오른 대신들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라 보면 된다. 근현대 인물인 후손 중에서는 정치인 구자옥, 화가 구본웅, 가수 구창모, 기업인 구현모 등이 있다. 방계 후손이지만 인조의 모후 인헌왕후가 그의 동생인 구치홍(具致洪)의 고손자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구치관 졸기를 보면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으니 참고바람.

2. 역임지위


년도
지위
비고
1434년
문과 급제


정9품 승문원정자
관찬 서적의 교정 및 주요 제향 축문 관장

정9품 예문관검열
왕의 측근으로 왕명 대필 등의 사무 관장

정8품 예문관대교
사고 서적의 관리와 왕과 신하의 대화 기록 관장

정7품 승정원주서
승정원일기 기록 등의 업무 관장

정6품 사헌부감찰
관리의 비위 규찰

종5품 황해도사
지역관리 비위 규찰

3. 여담


구치관 졸기에 따르면 세조의 정난 때 함길도에서 역당을 제거하고 세조를 주변에서 보필하게 되면서 큰 신임을 받게 되었고, 세조에게 문무를 겸비했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3]. 이후 그를 평안도 절도사에 제수하고 나서는 "이제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치관이 있으니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이후 구치관은 진서 대장군에 봉하여 토벌된 야인의 잔당을 막으라 했을 때에는, "능성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말하며 큰 신임을 보이기도 했다.
사후 순성 붕량 경제 좌리 공신이 호를 추증받았으며, 정질(貞質)·정간(貞簡)·정소(貞昭) 등의 시호를 봉상시에서 논의했으나 "'능성은 평생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청백하게 조심하여 살았다. 지금 아뢴 바 시호는 실제에 부응하지 아니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라는 말에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졸기에 따르면 구치관은 용모와 행동이 엄숙하고 확연하게 지키는 것이 있어서 이익과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4],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전형 선발의 임무를 맡았으나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다. 혹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옮길 사람도 도리어 옮겨주지 않았다.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종합해보면, 세조 대의 고위관료들 중 거의 유일하게 청렴하게 살았던 대신이었다. 당시 큰 뇌물 사건이 터졌을때, 고위급 대신들 중에서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한 명이 구치관이었다. 사실 이런 면모 때문에 졸기에도 보이듯 동료 대신들에게 '편벽한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치관편.[2]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치관편2.[3] 그래서 족보에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된다는 뜻으로, 문무를 다 갖추어 장상(將相)의 벼슬을 모두 지냄을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 그래서 족보에 청백리(淸白吏,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