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대학

 



國學大學
1. 개요
2. 약사
3. 대종교 관련 재단
3.1. 설립과정에서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대학교
4.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1947년에 개교한 사립 대학으로, 개교 당시에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했다고 하며, 통폐합 당시에는 현재의 고려대학교 정릉캠퍼스에 있었다.
1967년 수도의과대학에 인수, 통합되어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가 되었고, 1971년에 우석대학교는 고려대학교와 통합되었다.

2. 약사


국학대학은 1929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1] 에 있던 보명의숙(普明義塾)을 정봉현이 인수하여 1933년 화산보통학교(화산학원)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해방 이후 정봉현의 자손인 정의채가 같은 정씨집안 사람인 국학자 위당 정인보에게 민족교육기관 설립을 의논하였고, 위당이 이에 응해 국학이라는 교명을 정하고, 정의채는 상속재산을 기부하여 1946년 국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이사장 정의채, 초대교장 정열모) 설치학과는 문학과와 사학과였다고 한다. 이후 초대 이사장 정의채가 세상을 떠나고 미망인 고대복이 2대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정인보를 2대 교장으로 초빙한다. 이후, 대학으로 승인받아 법학과와 경제학과를 추가하여 총 4개과를 갖추고 1947년 11월에 국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학장은 정인보였으며[2], 국학대학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외솔 최현배, 이극로, 양주동 등이 강단에 서기도 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초창기에 정인보, 최현배 등 연세대학교와 주요 교강사진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인보는 직접 한국학 강의를 하는 한편, 영남과 호남의 유림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학교 재정에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다고 한다. 한국전쟁 발발 후 피란 시기에는 대전 충남도청 부속건물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3] 1952년에는 문학부(문학과, 사학과)와 정경학부(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60년대에는 학내분규와 입시비리로 학교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960년 학장 노재명이 이사진 양춘선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학생 오십여명을 배후에서 선동, 공금을 제공하고 양씨에 대한 폭력을 사주했다는 기사가 보이며, 1961년 정부의 대학구조개혁 시기에 성균관대 총장을 포함한 12명의 취임인가 취소에 학장 노재명의 이름이 또 올라간다. 1961년 말 새로운 학장이 취임하고, 1962년에는 정릉에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여 이전하였으나 이 즈음 대학인가마저 정상적으로 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63년 9월 본관 신축기공식과 관련하여 '국학대학은 단과대로 부활한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1963년 졸업식에서는 2백여명의 정식 졸업생 외의 1천여명에게 돈을 받고 졸업장을 발부했다는 의혹에 검찰이 수사에 나선 적도 있다. 1964년 신입생 모집요강을 보면 국문학, 영문학, 사학, 법률학, 경제학과 모집생을 각 20명 씩 4년제로 선발했고, 국문, 영문, 가정, 지역, 상, 행정, 원예, 체육, 관광과를 2년제로 선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12월, 시설을 갖추지 못한 초급대학에 대한 정부의 폐교, 폐과 조치에 의해 지역, 관광, 체육, 행정, 국문과 각 80명 총 400명의 인원이 감축, 과는 폐과되었다. 결국 국학초급대학, 국학대학은 1966년 3월에 수도의대를 운영하던 학교법인 우석학원(友石學院)에 통합되어[4] 1967년 2월 국학대학 제17회 졸업생 배출을 끝으로 국학대학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수도의대와 통합,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가 되었다. 1971년 우석대학교도 역시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의대 설립을 모색하던 고려대학교에 인수되어 국학대학의 역사는 고려대에 통합되었다. 현재의 고려대 정릉캠퍼스가 국학대학 캠퍼스 자리.

3. 대종교 관련 재단


초대 이사장 집안부터 초대교장, 위당 정인보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홍익대학교, 단국대학교, 신흥초급대학(경희대학교의 전신)과 함께 각각 설립과정에서 대종교와의 연관성이 있다. 물론 대종교 교단차원의 설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종교측 자료에는 홍익대학과 함께 교단내의 대표적 교육기관 설립이라고 되어 있기도..국학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지니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3.1. 설립과정에서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대학교


  • 홍익대학교: 학교명부터가 단군의 홍익인간에 따온 것이다. 설립과정에 대종교 재단으로 출발하였다. 지금의 재단은 대종교와 관련성이 없다고 한다. 5.16 이후 미술대학으로 격하되었다가 환원되고, 1971년 수도공과대학을 인수해서 종합대가 되는 과정 등 업치락뒤치락하며 재단도 바뀌었다고...
  • 단국대학교: 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장형이 1914년 대종교에 입교,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를 지낸 교단의 원로급 인사. 단국이라는 교명도 단군과 애국을 뜻함.
  • 신흥초급대학: 경희대학교의 전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어 설립된 신흥대학의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5]이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 으로도 선출되었던 대종교 원로급 인사였다.

4.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


실질적 설립자와 같은 위당 정인보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국학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초대 감찰위원장[6][7]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될 때 피란을 가지 않았는데[8], 그해 7월 납북되었으며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고는 하지만, 의례 미국 탓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떨어진다. 벽초 홍명희와 막역한 친구이자 사돈[9]이었기 때문에 월북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북에서 반동으로 몰렸다고 하며, 그의 아들은 한국전쟁 중 국군 제5사단의 일원으로 철원전투에서 전사했다. 민주화 시기 이전에도 정인보 선생의 시조 등의 작품은 교과서에도 여러번 실렸다.
여담으로 위당은 워낙 대쪽같은 성품에 고지식해서 국학대학장 시절에 학교에서 개인 자가용을 내준다고 했는데도, 흑석동 집에서 서대문 학교까지 전차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5. 기타


  • 국학대학 축구부가 당시 대학축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시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1954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 1960년 대학축구리그 우승
  • 학장에 취임한 위당 정인보가 지은 <국학대학가> 가사
물이건 맛을 보고 흙이건 맛자

잘바더 키워 ‘물릴’ 오늘 우리다
5천년 3천리가 ‘함빡’ 안기니
짐크고 길이 멀다 국학대학아

‘해동청’ 매서운눈 찌저지도록
세계를 살피랄제 ‘나버텀’봐라

강서(江西)에 무친 그림 용(龍) 다시 살고
토함산 사길 나한(羅漢) 거러나온다

'호미'도 갈려니와 살손조니라
바다 밋 산호빗은 깁허야 곱다

우악재 저기노코 독립문예라
뜬 구름 나려서라 ‘얼’이 솟는다||

6. 관련 문서



[1] 현재의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인근이다. 이이화의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에서는 국학대학이 현 현저초등학교 자리라고 하는데, 현저초등학교는 없다(...). 다만 국학대학의 신입생 모집공고에 현저동 64번지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캠퍼스가 현저동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2] 2대 학장이라는 문헌도 있다.[3]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연령대가 높은 학자 등의 약력에 대전국학대학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대전에 2년 이상 꽤 오랜동안 있었던 모양. 실제로 국학대학 1956년 경 졸업앨범을 보면 충청도 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특히 대전, 공주, 부여, 조치원 출신이 눈에 띈다. 후술할 이유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는 국학대학의 잊혀진 자료가 약간량 존재하는데, 열람가능한 자료 중 하나가 이 졸업앨범이다.[4] 5.16 이후 군사정권 시기, 난립한 대학정리라는 명목하에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등의 수난을 겪은 대학들이 많다. 국민대학교는 폐교 위기에서 간신히 야간부만 남고 주간은 폐지되기도 했으며, 홍익대는 미술대만 남기고 폐지 등. 국학대학 역시 학장-이사진의 분규, 입시비리 등 본인들의 실책과 더불어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5] 우당 이회영의 동생[6] 감사원의 전신[7] 이승만이 삼고초려할 정도로 부탁을 해서 취임했는데, 워낙 대쪽같은 위당이 이승만의 측근인 임영신(중앙대 설립자이자 초대 상공부 장관)이 관용차로 개인선거 운동을 하고, 부정을 저지른다며 독직사건을 파헤치는 바람에 도리어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어 1년여 만에 사임하게 된다[8]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국민들을 남겨놓고 도망가느니 같이 고초를 겪겠다고 했다 한다[9] 정인보의 딸이 홍명희의 아들과 결혼. 그의 외손도 북에서 문인,학자로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