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현배
崔鉉培 | Choe Hyeon-bae'''

'''출생'''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성면 동동리 #
(現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사망'''
1970년 3월 23일 (75세)
서울특별시
'''본관'''
경주 최씨 사성공파[1]
'''호'''
외솔
'''직업'''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1. 개요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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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한글학자이자 문학인.

2. 생애


1894년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에서 최병수(崔炳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학 및 문법 등을 이수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고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다시 히로시마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학사 학위를, 1925년에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26년 귀국한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검거,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후에 한글학회 상무이사와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었다.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고 이후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맡았으며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연세대학교는 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으로 명명하였다.[2]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인해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3. 기타


울산 중구에 외솔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 누리집, 운영 시간 안내 한 때 912번 지선 버스가 여기를 종점으로 삼기도 했지만, 2013년 현재는 한블럭 아래 병영초 정류장을 거쳐 더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또한 우정혁신도시에는 그의 호를 딴 외솔초등학교와 외솔중학교[3]가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엄격하고 근엄한 학자였다(생전에 찍은 다른 사진들만 봐도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나라와 나랏말을 외세에게 빼앗겼던 경험 때문인지 외솔 선생이 국어학자로서 가지는 사명감은 남달랐으며, 평생토록 극히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후배인 양주동 박사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많았으며[4] 아들 최신해 박사는 가끔씩 해학적 면모를 보여주곤 하셨는데, 외솔은 그런 게 일체 없었다.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시 연희전문에서 외솔의 지도편달을 받았던 교수들은 자다가도 옆에서 누가 "최현배"나 "외솔"이란 말을 하면 눈을 번쩍 떴다고 한다.
순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정책으로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으며[5]. 또한 이승만 정권 시절 1955년 조선일보에 서울이란 이름은 수도 이름으로 맞지 않으므로[6]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승만도 이것에 관심을 보여서 바꾸려고 논의는 했는데, 이승만 밑의 참모진들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꿔 쓰자고 하는 통에 최현배 선생이 지금 장난치냐고 분노했으며 야당의 결사반대로 그냥 '서울'이란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건 서울특별시/역사#s-3.2 참고.[7]
20세기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의 후신)에 다닌 사람이라면 외솔의 영향으로 당시 학교 곳곳에 남아있던 순우리말 사용의 흔적을 보고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의 주차장은 20세기 말까지도 “둠”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용어의 순우리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고 정인혁 교수의 “의학용어집”이 대표적인 예.
우리말의 가로쓰기는 최현배 박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위 식자들은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가로쓰기를 강하게 반대하였다.[8] 최현배 박사가 아니면 이들의 반발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세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글 풀어쓰기 및 이를 편하게 쓰기 위한 글씨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풀어쓰기' 문서 참조.
또한 남북의 언어가 분단되는 것을 막은 사람이기도 하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최현배와 김두봉 두 국어학자가 함께 막은 것으로, 오늘날 남북이 갈라진 지 70여 년이 흘렀음에도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서로 말을 나누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은 두 사람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해방 이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여 최현배는 서울로, 김두봉은 평양으로 갔다. 하지만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두 사람은 스승이 기틀을 닦고 조선어학회가 이어받은 언어정책을 그대로 남북에 심었고, 이것이 남북한 맞춤법의 토대가 되어 남한에서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북한에서는 '''조선어 신철자법'''을 정하여 쓰게 되었다. 이후 남한에서는 '''한글맞춤법'''으로, 북한은 '''조선말규범집'''으로 이름과 규정이 조금조금 바뀌었으나 뿌리는 같기에 두음법칙, 사이시옷 등 세세한 조항만 빼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후에 그를 기리는 단체인 외솔회가 출범하였고 이 단체에서는 매년 그의 호를 딴 외솔상을 시상한다. 호인 외솔은 보기 드문 순우리말 호인 동시에 최현배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멋진 호로 이름높다.
한국 정신건강의학과의 원로 의사이자 수필가로도 유명했던 최신해 박사(崔臣海, 1919-1991)가 그의 아들이며[9] 1968년 1.21사태 때 순직한 최규식종로경찰서장이 그의 손자뻘 친척이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 학생으로, 최현배의 강의를 수강하고 그의 저서를[10] 탐독하는 등, 최현배를 존경했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는 거의 전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1] 사성공파 28세손 석(錫) '''현(鉉)''' 종(鍾) 항렬. 아버지 최병수(崔炳壽)는 27세손 '''수(壽)''' 만(晩) 항렬.[2] 참고로 신관인 제2인문관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연희전문을 한국학의 메카로 이끈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으로 명명했다.[3] 본래는 울산동중학교로 약사동에서 혁신도시로 이전한 학교이며, 2016년부터 현재의 교명으로 바꿨다.[4] 일화가 참 다양하지만 특히 "어이쿠 국보가 넘어진다!"와 "내가 모르는 건 학생들도 몰라도 돼"가 유명.[5] 그녀라는 낱말 사용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 항목 참조.[6] 서울이란 말 자체가 수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수도 이름이 '수도'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게 이 주장의 근거다. 원문은 1955년 9월 22일 조선일보 논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7] 참고로 이승만 본인조차 '우남'이란 이름을 붙이는 걸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8] 놀랍게도 세로쓰기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법조문이나 공문에서 흔히 보는 낫표(「」,『』)가 바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이다.[9] 외솔 선생의 아들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말년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여러 성문화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근엄한 노교수답지않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속하다 느낄 정도로 해학적이고 맛깔나는 문체가 일품이다.[10] <우리말본>,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