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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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형(張炯)
이명
장세담(張世淡)

범은(梵隱), 범정(梵亭)
생몰
1889년 1월 18일 ~ 1964년 12월 30일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용정리#
본관
결성 장씨
사망지
서울특별시 내수동 자택
매장지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 내 묘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만주
2.3. 애국계몽 강연
2.4. 이후의 독립운동
2.5. 해방 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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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장충식 단국대학교 이사장이 그의 아들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장형은 1889년 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용정리에서 장창익(張昌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창익은 진사시를 합격한 유학자였고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조선이 멸망한 후 한의사로 전업했다. 장형은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5년 8월 사립 동명중학교에 입학해 1908년 3월에 졸업했다. 그리고 1908년 4월에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도중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퇴했다. <단국대학교삼백년사>에 따르면, 장형은 190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2월까지 3학년에 재학하다가 학업을 중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대학교100년사>에 따르면, 장형과 같이 보성전문학교 법과 4회 동기였던 장도빈은 1911년 2월 15일에 졸업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자퇴한 시기는 그 자신이 <이력서>에 기재한 대로 1909년 9월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업을 중단한 장형은 당시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신민회의 지도자였던 양기탁, 이동녕, 이시영 등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 시기에 보성전문학교 입학 동기이자 신민회 청년활동 단체인 한성연회(漢城聯會)에서 핵심인물로 활동한 장도빈과 두터운 친분을 다졌다. 장도빈은 후에 장형이 단국대학교를 설립했을 때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다. 또한 장형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손병희안창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형은 손병희에 대해 "돈을 모아 개인의 영달을 꿈꾸지 않고 보성학교는 물론 3.1 운동을 일으키는 등 국가 민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훨훨 내던진 국사(國士)였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안창호가 행한 애국계몽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후에 단국대학을 설립한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2.2. 만주


1911년 1월 일제가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 회원들을 대거 검거하자, 장형은 일제의 검거 선풍을 피하기 위해 1911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만주에 처음 와서 입학한 학교는 신민회 인사들이 1910년에 설립한 무관학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정언행록> 연보에 따르면, 장형은 1911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에서 활동한 남선북마독립군(南船北馬獨立軍)에 참가했고 남선북마독립군 군자금 모금의 중임을 맡아 만주와 조선 북부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선북마독립군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장형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중국과 만주 일대를 안가본 데 없이 다녔다는 의미로 "내래 남선북마 독립군이었다"라고 말한 것이 '남선북마독립군에서 활약했다는 것으로 오인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평양헌병대가 조선 총독부에게 보고한 극비문서에 따르면, "장세담(장형)은 조선에서 망명한 청년들 사이에 유력한 인물로, 항상 경성, 안동현, 봉천 등지를 왕복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해에 대종교에 입교했고 이듬해인 1915년에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망명 학생들을 대종교가 설립한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나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으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형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해 이극, 안창하, 이진산, 전덕명 등에게 군자금을 전달했고, 이극을 통해 전덕원, 오동진, 오광선 등에게도 군자금을 제공하다가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이시영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을 관할하고 있던 송병조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던 1921년 11월 12일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전망하고 적극적인 회교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과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했고, 국내외 사회지도급 인사 101명이 연명으로 서명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 ‘한국인민치 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 太平洋會議書)’를 작성했다. 이때 장형도 이 문서에 서명했으나 정작 태평양회의에 참석한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 문제로 간주하고 무시해버렸고, 일제 역시 이 문서를 위작으로 폄하해버리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3. 애국계몽 강연


1921년 국내로 들어온 장형은 그해 8월 19일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해 총재에 취임했다. 그는 이 조직을 이끌고 애국계몽 순회 강연을 주도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12월 25일부터 1922년 5월 28일까지 진행된 반도고학생 친목회의 애국계몽강연회 순회 내용을 보도했다. 이에 의하면, 애국계몽강연단은 안성, 목포, 영광, 나주, 정읍, 김제, 금천, 조치원, 대구, 박천, 정주, 선천, 영변, 신의주, 평양, 순천, 창원, 마산, 진주, 통영, 부산, 김해, 밀양, 청도, 대구, 영천, 경주, 포항, 왜관, 상주, 영동, 청주, 괴산 등지를 순회했다.
장형의 강연 주제는 <우리의 급무>, <단합의 능력>, <깨어라 조선인아>, <시대의 순응>, <우리의 생로가 어덴가>, <희망과 실행>, <생존경쟁>, <우리의 현황>, <세계와 조선>, <희망은 생로> 등으로, 주로 현재의 나태한 생활 태도를 개선하여 희망찬 새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강연은 대개 한 시간 남짓 진행되었는데 어떤 때는 두 시간 동안 강연한 적도 있었다. 강연회가 끝난 뒤엔 청중들에 의해 동정금 혹은 의연금 명목의 자발적인 모금이 이뤄졌다.

2.4. 이후의 독립운동


장형은 에국계몽 강연을 마친 뒤 한의사로 활동했다. 1923년, 그는 경성에 치료소를 개설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또한 1927년에는 안창호, 양기탁이 길림을 중심으로 결성한 농민호조사에 가담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의 생활개선 운동 개선활동에 참가했으며, 1927년 8월에 조직된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鮮滿土地開墾株式會社) 사장에 선임되어 1933년 2월까지 활동했다.그러나 일제가 중국 당국과 연계해 농민호조사의 활동을 제약한데다 재정이 열악해 토지 구매가 어려워 제대로 된 활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면서 해체되었다.
1930년, 장형은 신의주에 잠입해 한의사로 활동하다가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환자들로부터 무리하게 돈을 받아내려 했다가 그만 사기죄로 고소당했다. 그는 1923년부터 경성에 치료소를 설립하고 모든 병을 고친다고 선전해 11,000여 원의 거금을 편취한 죄목으로 신의주 법원에 회부되었고 1930년 9월 2일 징역형에 처해졌다.[1] 이후 출옥한 그는 1932년에 반석현으로 이주했고, 1932년 10월부터 1945년 11월까지 길림성 반석현에서 정미소를 매입하고 친척들을 내세워 운영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직후 일본 헌병들이 그의 정미소를 방화해서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1937년 5월, 장형은 조달현(趙達顯)이란 사람의 소개로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에 사는 홍봉유(洪琫裕)를 만나 그의 치질, 불면증 및 탁뇨 증세를 치료하기로 하고 치료비 1천원을 받고 40일간 치료했다. 그러다가 7월에 자신이 길림성 반석현에서 매수한 정미공장의 대금 조달 문제로 만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치료를 계속하기를 원한다면 대금 조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2천 6백원이 필요하다면서 홍봉유로부터 이를 융통했다. 그러나 홍봉유는 1938년 장형을 사기죄로 고소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1938년 음력 7월, 1천 8백원이 변제되었고 이후 남원 8백원에 대한 변제도 이뤄졌다. 이에 홍봉유는 8월 14일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청에서 심리가 진행되던 중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장형이 명백한 사기죄를 저질렀다고 간주하고 원고의 고소 취하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강행해 1938년 8월 31일 장형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에 장형은 항소했지만, 1939년 3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는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의 형을 확정했다. 이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그는 만주로 건너가서 해방 때까지 조용히 지냈다.

2.5. 해방 후 경력


장형은 8.15 광복 후 국내로 환국했고 1946년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곧 사임했다. 이후 그는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여 이사를 맡았고, 회장 신익희와 협력해 민족대학 설립을 추진한 끝에 독립운동가 박기홍(朴基鴻)의 미망인 조희재로부터 기증받은 5만 평의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신익희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을 탈당하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자, 장형은 신익희가 김구와 임시정부를 배신했다고 여기고 국민대학교와 결별했다.
이후 장형은 1947년 김구가 원효사를 기반으로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의 이사장을 맡아 재정을 지원했으며, 조희재 여사가 다시 기부한 80만 평의 토지를 기반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해 1947년 9월 15일 단국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해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낸 뒤 단국대학교를 설립했다. '단국'이란 교명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제기된다. 하나는 단군의 뿌리를 이어가자는 의미로 지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국가 수립을 열망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는 것이다. 단국대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재학한 조동규(趙東奎)의 증언에 따르면, 장형은 그에게 학교 설립의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국호야 어찌되었든 단군성조의 한 자손으로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며, 이 땅을 지키고, 이 나라를 번영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야. 이 땅을 번영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 국민이 올바른 교육을 받아야 되며, 그 올바른 교육이란 곧 단군성조의 홍익인간 정신이라 믿으며, 그 정신은 단군으로부터 이어오는 하나의 핏줄의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 나라 후손들의 가슴 속에 심어서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의 의욕을 고취해야 됨으로 교명을 단국대학이라 명명하고, 단군의 건국이념을 곧 건학이념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일세.

한편 장형은 1948년 3월 1일 <단대학생신문>에 글을 게재해 "단국대학의 설립은 분단의 민족적 실책을 반성하면서, 청년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의 동지를 규합해 완전한 자주독립을 달성하려는 포부에서 결행되었음"을 밝혔다.이로 볼 때 '단국'의 의미는 단군을 민족의 뿌리로서 받들고 단일통일국가 설립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장형은 1958년 백남학원(白南學院)[2]을 인수했고,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4년 12월 30일에 서울 내수동 자택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한남동 서울캠퍼스 내에 매장되었다가 2007년 경기도 용인시 단국대학교내 묘소에 이장되었다.

[1] 얼마 동안 옥고를 치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2]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