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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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09호'''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


'''소재지'''
경상북도 군위군 건천읍 부계면 남산리 1477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 초기
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국보 제109호


1. 개요


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 7세기 중엽 ~ 말 경에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지역에서 만든 신라석굴사원. 제2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현재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4길 24에 소재하는데, 1962년 12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석굴 높이 4.25m, 본존상 2.18m, 우협시보살상 1.92m, 좌협시보살상 1.8m.
7세기 중엽~말엽 경에 군위 지역의 신라인들이 천연 절벽의 거대한 자연 암벽에 생성된 자연동굴을 뚫어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훗날 8세기 중엽인 774년에 경주시 토함산에서 신라인들이 조성한 석굴암의 모태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불상들은 오랫동안 존재가 전혀 드러나있지 않다가 1962년에 처음 발견되었고, 이후 학계의 연구 조사 결과 석굴암보다 100여 년 이상 일찍 조성되었다고 밝혀졌다. 이에 대중들은 이곳을 흔히 제2석굴암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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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석굴암이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셨다면, 이곳은 자연석굴을 최대한 활용해 사원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굴은 아파트 한 동 크기만 한 바위 아래쪽에 만들었는데, 지상 20 m 높이에 입구는 폭 4.2 5m, 길이 4.3 m이다. 동남향의 거대한 암벽에 조영된 석굴의 입구는 원형에 가깝고, 굴 안의 평면은 대체로 정사각형이다. 천장은 활의 등 모양이고 안쪽 벽에 붙여서 원각의 삼존(三尊)을 모셨는데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로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을 배치했다. 이 석굴과 불상을 700년 전후에 완성했다고 추정하지만, 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었다고 학자들도 있다.
이 제2석굴암을 처음 조성한 사찰은 기록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불교 공인(법흥왕)이 일어나기 전 핍박받던 시대에, 숨어서 오로지 불심으로만 수도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제2석굴암은 조각의 수법이나 석굴의 구조를 볼 때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에서 경주 석굴암보다는 떨어진다. 하지만 군위 삼존석굴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진 과도기적 작품으로 바위에다 그대로 새기는 마애불에서 인공석굴을 만들어 부처의 조각상을 앉히는 과정의 중간 형태라는 데서 의미가 있다. 특히 본존불은 손가락으로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는데, 이는 석가여래 불상의 전통적인 수인으로 우리나라 역대 불상들 중 항마촉지인을 한 최초의 것이라 의미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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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석굴 앞마당에는 신라시대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6호)이 있는데, 탑이라고 하기에는 단층의 모양이 특이하다. 원래는 돌을 쌓아 만든 삼층탑이었으나 훗날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지 않아 무너졌는데 1949년 지금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으로부터 7세기에 군위 지역 신라인들이 제작한 석굴 삼존불상으로, 군위 지역의 고대 불교사 및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00여 년 앞서 만들어진, 한국 석굴사원의 모태가 된 작품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109호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보다 연대가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 대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