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제1공화국

 


'''그리스국'''
'''Ελληνική Πολιτεία'''

''Ellinikí Polite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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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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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짙은 푸른색 부분
1822 ~ 1833
위치
그리스 일대
수도
나플리오(Ναύπλιο)
정치 체제
공화제
국가 원수
지사(Κυβερνείο)
언어
그리스어
종교
정교회
성립 이전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그리스 왕국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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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Πρώτη Ελληνική Δημοκρατία.[1] 그리스에 세워졌던 첫 근대 공화국 체제. 실질적으로 제대로 기능했던 정치체제는 아니었다.

2. 상세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이후 등장한 민족주의그리스인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유일하게 오스만의 지배를 받지 않던 이오니아 제도[2]를 시작으로 그리스에도 나타났고 그리스인들은 선전물을 통해 차츰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리스어 교육의 금지와 역사교육의 금지, 인쇄물에 대한 검열강화로 맞섰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동방정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소위 비밀학교(το κρυφο σχολειο)를 통해 그리스인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쳤다.
그리스 독립 세력은 1821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듬해 1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크게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북쪽에서 남하하는 반란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Θεόδωρος Κολοκοτρώνης)가 지휘한 반란군은 펠로폰네소스에서 오스만 제국과 일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독립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지도자마다 분열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목적은 같아도 그 뒤 정부에 대한 구상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세력의 지도자들은 1822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에피다우로스(Επίδαυρος)에 모여 제1회 국민의회(Αʹ Εθνοσυνέλευση)를 개최하고 여기서 독립세력의 통합과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합의하고 1822년에 헌법을 제정했다. 이 때 독립세력은 국호를 '그리스국'이라 하였으며, 이 때 수립된 정치체제를 제1공화국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끼리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서, 독립세력끼리도 내전을 벌이는(...) 막장상태였고, '열강을 개입시켜서는 안된다'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그래도 아직 강력했던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군의 공세로 인해 그리스 독립군은 곳곳에서 패퇴해 소멸 위기에 놓였다. 중부 그리스를 빼앗기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몰린 그리스 독립 세력은 다시 트로지나(Τροιζήνα)에서 새 헌법을 공포하고 러시아 제국의 외무장관이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Ιωάννης Καποδίστριας)를 지사(Κυβερνείο)[3]로 선출하였으며, 다시 한 번 유럽 열강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문제와 더불어, 1815년 빈 체제의 붕괴를 우려하며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주변국을 압박하였으나 당시 그리스인 학살로 국내여론이 굉장히 시끄러웠던 영국[4]과 같은 정교회 국가이자 그리스 독립전쟁을 오스만을 약화시키고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본 러시아 제국이 그리스 독립에 호의적이어서 오스만 제국에 그리스인 자치국을 제안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절하고, 이대로 가면 그리스가 영국과 러시아 영향권이 될 것이라 우려한 프랑스까지 가담하여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 러, 프 3개국 해군은 오스만과 이집트 해군을 박살냈다. 1828년 3개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는 런던 협약을 채택하였고 이에 러시아는 오스만에게 전쟁을 선포, 오스만을 박살내고 1829년 9월 14일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통해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리스 독립 세력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으나, 이 과정에서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국민의회를 무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평의회를 세우고는 독단적인 정치를 벌여 일부 그리스인 독립세력에게서 큰 반발을 받았다. 더불어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러시아 외교관 출신이라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이용해 러시아가 집고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생겨났고, 반 카포디스트리아스파는 국민의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이에 대해 관련자 체포로 맞서자 분열은 점차 심각해졌고, 결국 카포디스트리아스는 1831년에 암살되었다.
그리고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의 동생 아우구스티노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기타 독립세력 지도자와 함께 통치위원회를 설립해 통치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들도 서로 반목하여 내전을 벌였다. 내전의 최후 승자는 요안니스 코레티스(Ιωάννης Κωλέττης)였고 그는 1832년 7월에 5차 국민의회(Εʹ Εθνοσυνέλευση)를 개최해 헌법을 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바리노 해전 이후 열강은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벌여 그리스를 군주국으로 독립시키는 방안에 합의했고, 따라서 공화국으로 독립하려 했던 코레티스의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비텔스바흐 가문오톤을 군주로 하는 독립방안에 동의했고, 이에 몇몇 그리스 독립세력이 반발했지만 외국 군대에 진압되었다.
결국 1833년에 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국민의회에서 승인되어, 그리스는 그리스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국가의 승인을 받아 독립한다.

[1] "프로티 엘리니키 디모크라티아"[2] 4차 십자군 이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3] 영어로 Governor로 번역되나 역할은 대통령과 같았다.[4]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국 내 여론을 주도하거나 심지어는 사적으로 항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상가적 기질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의 기여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게릴라전을 펼치던 현지인들에게 "왜 고대 그리스 군인들처럼 밀집대형으로 정면공격하지 않는가?" 등의 소릴 한다거나... 대표적으로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