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리노 해전
1. 배경
1.1. 그리스 독립전쟁
1822년 1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공화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대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전역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가하였으며, 이 사건을 알게 된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찬성하는 뜻을 비쳤고 조지 고든 바이런의 경우에는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튀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다.[2] 그러나 구심점이었던 바이런이 열병으로 죽은 후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기세가 꺾였고 한편 불리한 상황에 놓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드 알리에 의해 통치되던 이집트에 도움을 구했다. 알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의 할양 등을 요구조건으로 하면서 1824년 7월에 참전을 결정하여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는 1825년 2월에 칸소,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부에 남겨졌던 오스만 최후의 거점이던 메트니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바리노, 메솔롱기를 점령하고 아테네도 함락시켰다.
위기 상황에 빠진 그리스군은 유럽 열강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그리스 본토에선 게오르기우스 카라이스카키스, 해상에서는 안드레아스미아울리스가 게오르기우스 사크튜리스에게 집결하여 각 세력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크레타 섬에 상륙한 이집트군(사령관 하산 파샤)은 처음에 크레타 동부에서의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서부에선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이집트군 사령관은 후세인 베이로 교체되었는데, 후세인은 동굴로 달아난 기독교도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불을 피워 학살하고 가혹하게 다루며 이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추방시켰다. 이 때문에 그리스군은 크레타 섬 동부로 철수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1824년 4월에 붙잡혀 이집트로 연행되었다. 일부 군대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도주하여 1825년 7월에 크레타 섬 재탈환을 목적으로 900명의 부대가 크레타 섬에 상륙해 요새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집트군의 우세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2. 연합군의 참가
이 사태를 보고 있던 영국의 외무장관 조지 캐닝[3] 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1825년에는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후 장례식에 웰링턴을 보내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움직이게 했고 그 결과 1826년 4월 4일 다음과 같은 의정서를 조인했다.[4] 또한 프랑스를 참가시키기 위해서 1826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파리를 방문했다. 리버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이듬해 4월 총리가 된 캐닝은 자신의 그리스 정책을 새 내각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1827년 7월 6일 런던협약을 체결한다. 그 전문은 세 강대국이 해적행위를 근절하고 통상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력을 동원해 개입한다는 것이었다. [5]
그리고 이 협약이 체결된 지 1주 후 근해에 있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 함대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양측이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만약 그리스가 찬성하고 튀르크가 거부할 시 연합함대는 즉시 움직여 오스만의 육군이나 해군의 증원부대가 그리스 영해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었다.[6] 고더리치 자작이 새로이 수상에 취임한 후 1827년 2월 영국은 에드워드 코드링턴 제독을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임지로 떠나보냈다.
3. 전투 경과
1827년 9월 7일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코드링턴은 이슬람 함대를 그리스 해안에 단절시키는 작전을 개시했고 이에 맞서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슬람 함대는 나바리노에 닻을 내렸다. 코드링턴은 해상에 위치를 고정시키고 드 리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여기에 합세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으로부터 추가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9월 25일 휴전협정에 서명했지만 10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협정을 깨고 파트라스의 그리스 선박을 공격했고 코드링턴 제독은 프리깃함 두 척과 쌍돛대 범선 한 척으로 물리쳤다. 그 후 하이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와 합류한 후 계속해서 이브라힘이 살인과 방화를 계속하자 코드링턴은 프랑스와 러시아 제독과 협의해 나바리노 만으로 진입해 이브라힘의 함대를 봉쇄해 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연합군은 10월 20일 오후 2시에 나바리노 만에 진입을 개시해 해전을 개시했다.
4시간 정도 계속된 나바리노 해전은 화력에서 우세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7] 연합군은 178명만이 사망했지만 오스만 해군은 8천여명이 넘는 사망자와 60척의 선박이 대파되었고 나머지 29척은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8] 결국 해전은 오스만의 대패로 끝나고 만다.
4. 영향
열강의 개입에 분노한 오스만은 1826년 체결한 아케르만 협정을 번복하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폐쇄하였고 이를 빌미로 1828년 4월 러시아는 오스만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 크림 칸국을 삥뜯은 이후 오스만의 숙적으로 진화한 러시아답게 러시아군은 약체 오스만군을 가볍게 박살냈다. 러시아가 오스만을 박살내는 사이 영, 프, 러 3개국은 1828년 11월과 1829년 3월 두 차례의 런던 협약을 통해 그리스에 오스만 산하의 자치국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결국 1829년 9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여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통해 오스만은 런던 협약의 내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830년 2월 런던 협약에서 3개국은 그리스를 오스만 산하의 자치국이 아닌, 독립된 주권 국가로 세우기로 합의하였고 최종적으로 1832년 런던 회의를 통해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톤을 국왕으로 하는 그리스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마침내 그리스는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이로써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세운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와, 반자유주의와 반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빈 체제는 빈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할 열강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사실상 개별적 이익 우선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오스만뽕에 걸린 역덕들의 말로는 지중해를 휘어잡던 오스만 해군의 프레베자 해전 문서를 보다가 이 문서로 오면 격세지감과 맥수지탄을 느낀다고... 사실 역덕들 사이에 근세 (15~17세기)를 집중적으로 파는 사람들에게는 오스만 제국이 '''최종보스'''급의 거대한 포스를 풍기는 반면 19세기 이후 근대사를 파는 사람들 사이에는 야라레메카취급 당하며, 이 둘이 만나면 굉장히 미묘한 시각을 주고 받는 건 역덕후들 사이에는 유서 깊은 현상이다(...)
[1] 오스만 제국의 재상과는 동명이인이다. 이쪽은 이집트 총독인 무하마드 알리의 아들[2] 심지어 그냥 온 것도 아니고 런던에서 군자금을 가져왔다. 1824년 1월 6일 바이런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미솔롱기로 건너가 영국 외상 캐닝이 참여한 가운데 영국은행으로부터 47만 2000 파운드의 돈을 빌렸고 그 가운데 31만 파운드가 그리스로 송금되었고 이 대가로 그리스는 매년 4만 파운드를 영국으로부터 갚아야 했다. 단 투자자들이 이자나 원금을 빠짐없이 되돌려 받는다는 보증은 전혀 없었다.[3] 캐닝은 신성동맹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신성동맹은 특정한 정부를 강요하거나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 캐닝에게 있어서는 시대적 착오와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캐닝은 강대국인 세 나라가 협력해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 보호를 목적으로 멋대로 그리스에 군사 개입을 해 그리스에 러시아가 군사적 기반을 만들어 지중해로 진출해 남하를 하려는 것을 최대한 저지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4] 그 내용은 1.그리스는 자치권이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남는다. 2.모든 튀르크인은 그리스에서 떠난다. 3.술탄은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그리스와 협의하여 통치자를 선임한다.[5]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그리스 근해에서는 해적 행위가 대폭 증가하고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 양측이 민간선박들을 약탈하거나 침몰시켰던 게 빈번한지라..[6] 하지만 정작 조약을 이끌어낸 당사자인 캐닝 수상은 수상이 된 지 120일인 1827년 8월 8일에 죽음으로써 동지중해 지역으로 러시아의 진출이 저지되었으며 각국의 세력균형을 지속시키는 자신의 외교적 성과를 보지 못했다.[7] 오스만-이집트 함대의 수가 더 많았지만 연합군이 배마다 50대 이상의 포를 조준하고 10척씩 정렬하고 있는 반면 오스만군은 3척씩 정렬하고 있었으며 또 동맹군 배들은 훨씬 더 크고 높아서 적의 갑판을 향해 아래로 포를 쏠 수도 있었고 특히 영국군은 대구경 포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8] 그 후의 얘기를 좀 더 쓰자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코드링턴은 조지 4세에게 바스 대십자 훈장을, 샤를 10세로부터 생 루이 훈장을 받고 니콜라이 1세에게는 셍트 게오르기 훈장(2등급)을 그리고 마브로코르다토스로부터 구세주 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하지만 이러한 해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영국 정부는 함대사열관인 코드링턴 경을 해임했다. 원래 고드리치 내각은 전쟁을 원한 게 아니라 중재를 원했던 것인데 10월에 내린 이 명령이 전투가 끝난 뒤에야 전해진 것. 어쨌든 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 박한 대접을 한 것은 사실이므로 1년에 800파운드씩 연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코드링턴 제독은 그전에 우선 부하장병들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받게 하고 싶었고 이것은 7년 뒤인 1834년에야 휘그당이 정권을 잡고 코드링턴이 데번포트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끓임없이 하원에 문제제기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