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고든 바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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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1788년 1월 22일 ~ 1824년 4월 19일)
1. 개요
2. 생애
2.1. 17세, 케임브리지 대학교
2.2. 상원의원 진출
2.3. 여성편력: 200명
2.3.1. 영국에서
2.3.1.1. 24세, 캐롤라인 램(1812)
2.3.1.2. 24~25세, 제인 엘리자베스 스콧(1812~1813)
2.3.1.4. 1815년 27세에 앤 이자벨라와의 결혼, 1년 후 이혼
2.3.2. 영국을 떠난 후
2.4. 31~36세, 서사시, '돈 후앙' 집필(1819~1824)
2.5. 1823년, 35세, 그리스 독립전쟁 참여
2.6. 1824년, 36세, 병사
3. 가족
4. 작품
5. 여담
6. 명언
7. 관련 문서
1. 개요
제6대 바이런 남작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영어권에서는 George Gordon Byron이란 이름보다는 주로 Lord Byron, 바이런 경(卿)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아버지 '존 바이런'은 잘 생긴 귀족이었지만 품행이 개망나니 수준이라서 , 방탕한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1791년, '조지 고든 바이런'이 3세였을 때 객사했다.
유모 메이 그레이가 독실한 청교도 신자라 금욕적이어서 조지는 짜증을 냈다고 한다. 한편 그 유모는 7세부터 조지를 성적으로 추행했다고 한다.
9세가 되었을 때에는 증조부가 죽어 바이런 경의 타이틀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가 조지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데려가, 13세가 되는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다. 안짱다리에 선천적으로 오른발을 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컴플렉스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아들에게 냉담했다고 한다.
2.1. 17세, 케임브리지 대학교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어려서부터 잘 했던 '문학'과 '사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일면을 닮았는지 1학기를 술로 지새다가 큰 빚을 졌고, 이 빚을 갚기 위해 시집 <게으른 나날>을 발표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문학 잡지 <에딘버러 리뷰>에서 이 작품을 대차게 깠고, 이에 대해 열받은 바이런은 익명으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라는 책을 써서 <에딘버러 리뷰>를 깠다.
2.2. 상원의원 진출
졸업 후에는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24세가 된 1812년에 방직공의 임금인상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시기 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는 조각 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으나 오히려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동정을 샀고, 얼굴이 워낙 우월하다 보니 크게 문제는 안 된 모양이다( ). 당시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고 바이런이 지나가면 온 동네 여자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2.3. 여성편력: 200명
그러한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부친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여러 여인들과 만나 사귀었다. 그런데 '''남녀도 귀천도 가라지 않았던 성편력이 현대의 관점으로 보기에도 만만치 않다.''' 유부녀, 과부, 얀데레에 '''이복누나'''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리스로 가는 도중에 어느 유부녀를 하룻밤 NTR했다가 남편에게 걸려서 결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내키는대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귀족이자 상원의원이면서도 하층민 여성과 관계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결국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1816년 추방당하듯이 영국을 떠났지만, '''이 때부터가 그의 본격적인 여성편력의 시작이었다.'''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별의별 여성들과 관계했는데, 문헌에 따르면 당시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최대 '''약 2백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스폰서였던 '메리 셸리'의 의붓여동생 '클레어 클레어몬트(Claire Clairmont)'와도 관계를 맺어 딸을 얻으면서 사이가 복잡해졌다. 참고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고, 메리의 어머니는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저서 <여성의 권리옹호>를 발표하며 평생을 여성 인권 향상에 매진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이다.
사실 명문대 엘리트+고위 정치인+유명한 시인이라는 엄청난 스펙에다 잘생기기까지 한 인간이 낭만시로 단련된(...)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면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않기가 힘들다. 현대로 비교할 만한 인물이라면 역시 같은 영국인이자 예술인이며 '''여자 4천여 명, 남자 4백여 명과 관계를 맺었다는 악마'''[3] 믹 재거. 무엇보다도 둘 다 쾌락주의자이자 양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2.3.1. 영국에서
2.3.1.1. 24세, 캐롤라인 램(1812)
바이런과 사귄 가장 유명한 여인은 레이디, '캐롤라인 램'으로, 후에 영국 총리가 되는 '윌리엄 램 경'의 부인이었다.[4] 남편이 정치에 신경쓰느라 아내에게 소홀한 틈에, 아내는 젊은 낭만파 시인에게 빠졌다.
하지만 상원의원 바이런에게는 캐롤라인과 생긴 스캔들이 상당한 타격[5] 이었던지라 슬슬 피해다녔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편지 세례는 물론 그가 가는 파티마다 모두 참석해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는 등 스캔들에 더욱 불을 붙여버렸다. 그런데도 바이런이 계속 피하자, 바이런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해 그가 아끼는 책에 '''"Remember me!"'''라고 휘갈긴 글씨를 남긴다. 이제 바이런은 공포마저 느껴 노골적으로 피하던 중 어느 파티에서 딱 마주쳤는데, 캐롤라인은 말다툼 끝에 열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이런 캐롤라인에게 질려 바이런은 이별 편지를 보냈는데, 캐롤라인은 평생 이 편지를 간직했다고... 이후 바이런을 모델로 한 소설 <글래나번>을 쓰기도 했다.
반면 바이런은 방탕했던 여태까지의 자신을 반성하고 이후 여성편력을 자제하게 되었다.
2.3.1.2. 24~25세, 제인 엘리자베스 스콧(1812~1813)
이 여인 역시 유부녀였다.
2.3.1.3. 어거스타 리
이 여인은 이복누나였다(...).
2.3.1.4. 1815년 27세에 앤 이자벨라와의 결혼, 1년 후 이혼
캐롤라인에게 크게 데여서인지 진지한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1815년 웬트워스 여남작 앤 이자벨라 밀뱅크(Anne Isabella Milbanke)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딸도 한명 낳았지만[6] 워낙 부부간의 성격 차가 커서 1년만에 이혼해버리고 만다. 아내와 별거했던 이 시기에도 여성 편력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한 뒤에 바이런은 친딸에게 어떠한 양육권이나 친권도 행사하지 않았다.
앤이 낳은 바이런의 딸은 바이런의 유일한 정식 결혼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태생의 자식이였다.[7] 이 딸은 나중에 자라서 최초의 컴퓨터인 찰스 배비지의 애널리틱 엔진을 프로그래밍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최초의 프로그래머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어거스터 에이다 킹이다. 천재적 재능은 집안의 내력인 듯.
2.3.2. 영국을 떠난 후
2.3.2.1. 스위스
2.3.2.1.1. 1816년 28세, 클레어 클레어몬트
이번에는 클레어 클레어몬트라는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 여인의 이복자매가 메리 셸리였다.
1816년, 클레어(18세)는 메리(19세)에게 함께 제니바 호수 근방에서 살고 있는 시인 바이런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클레어는 얼마 전 바이런과 짧은 사랑을 했었고, 이 일로 바이런의 자식을 잉태한 것이다! 이 아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5살까지 살고 요절. 클레어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기도 했고, 아이에 대해 알려주고자 바이런을 다시 찾아가고자 했던 모양이다.
이때 메리는 당시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불륜 관계이자 미래의 남편이 될 유부남 퍼시 비시 셸리(24세),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기에 이를 승낙하고 '바이런'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제네바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바이런은 당시에도 엄청난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모두 잠깐씩이라도 바이런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바이런 집 근처의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에게 바이런을 훔쳐볼 수 있는 망원경을 대여해주기도 했다(…)관련 위키 참조
당시 바이런은 21살의 의사이자 작가 지망생이었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1795~1821)와 함께 지냈다.
그렇게 메리 일행과 바이런, 폴리도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2.3.2.1.2. 프랑켄슈타인과 뱀파이어의 탄생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다섯 사람은 바이런의 별장 안에 모였다. 다섯 사람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따분해하고 있었는데 그 때 바이런이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한다. 각자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자는 것이었다. 메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퍼시는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바이런은 흡혈귀를 소재로 하는 단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죄로 처벌당한 해골 아가씨 이야기를 했다.
훗날 폴리도리는 바이런이 버린 흡혈귀 단편을 소재로 《뱀파이어》를 집필했는데, 이는 영어로 출간된 최초의 흡혈귀 소설이 된다. 그러나 폴리도리는 빚에 시달리며 겨우 26살 나이로 음독 자살하여 요절했다.관련 위키 참고]*
메리는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메리는 퍼시와 바이런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갈바니즘'(galvanism)에 관한 대화였다. 갈바니즘은 죽은 개구리 뒷다리가 전기 자극을 받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의사 갈바니의 실험에서 유래한 용어였다.
이 대화를 들은 메리는 꿈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괴물 옆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게 된다.[8] 후에 이것을 토대로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해 대성공을 거둔다.
2.3.2.2. 베네치아에서
2.3.2.2.1. 마리아나 세가티
베네치아에서 만난 여인1. 기혼녀.
2.3.2.2.2. 마가리타 코그니
베네치아에서 만난 여인2. 기혼녀. 문맹이었고, '조지 고든 바이런'과 만나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후에 자살한다.
2.4. 31~36세, 서사시, '돈 후앙' 집필(1819~1824)
미완성 풍자 서사시. 비평가들에게는 혹평을, 대중들에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린 작품.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출신의 돈 후앙이라는 주인공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그리스,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여인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2.5. 1823년, 35세, 그리스 독립전쟁 참여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유명한 시인이자 젊은 정치가 귀족으로 19세기판 세계적 인기 아이돌이자 연예인이었던 그의 참전은 그 당시 오스만 제국에게 지배당하던 약소국이었던 그리스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유럽 각국을 향한 그리스 독립전쟁 지원 호소문
그가 생판 타국인 그리스 독립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낭만파 시인답게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과 그리스 시 등, 그리스 고대 문학에 매료된 대표적 그리스빠였기 때문. 고대 그리스 문화를 소재로 한 시도 적지 않다. 본 문서의 바이런의 초상화가 그리스식 옷을 입은 모습인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독립전쟁 참여를 위해 그리스에 가니 거대한 오스만에 맞서 하나로 단결해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서로 파벌이 나뉘어 다투고 있던 그리스 독립군의 현실에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2.6. 1824년, 36세, 병사
이듬해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후, 현지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이 더 심해져 그리스 메솔롱기에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후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사원에서 거부했고, 할 수 없이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런이 영국 낭만시에 끼친 영향이 워낙 지대했기에, 1969년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건립되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그를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근처에 남자를 안고 있는 여성의 동상이 있는데 바로 바이런을 안고 있는 아테나 여신으로, 이런 동상이 있는 것만 봐도 바이런의 대접이 그리스에서 어떠한지 알 수 있다.
3. 가족
- 이복누이: 어거스터 리(Augusta Leigh)
- 딸: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어거스터 에이다 킹(Augusta Ada King, Countess of Lovelace)
4. 작품
-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1812 ~ 1818)
- 프로메테우스(1816)
- 마제파(1819) + 프래그먼트(fragment)
- 돈 주앙(1819 ~ 1824, 미완성)
5. 여담
-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케임브리지 3학년 때 신학 시험에서의 일화이다. 학기말 고사 때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이 상징하는 종교적,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오자 그는 아래의 한 문장만을 적어서 이 시험을 최고점으로 통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창조주를 뵙고 얼굴을 붉혔도다."
다만, 이 문구가 바이런 혼자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그가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살았던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라는 영국 시인의 Epigrammatum Sacrorum Liber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 중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이라는 구절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일화는 외국에서는 바이런이 아닌 이름 모를 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돌아다니기도 한다.
>"물이 창조주를 뵙고 얼굴을 붉혔도다."
다만, 이 문구가 바이런 혼자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그가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살았던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라는 영국 시인의 Epigrammatum Sacrorum Liber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 중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이라는 구절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일화는 외국에서는 바이런이 아닌 이름 모를 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돌아다니기도 한다.
- 또 다른 일화는 1812년, <해럴드 도령의 순례> 1, 2권을 발간했는데, 이 2권이 당시 영국 사교계에 일약 반향을 일으키면서 바이런이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술에 취해 비몽사몽한 바이런에게 편집장과 발행인이 그가 순식간에 유명해졌음을 말하자, 차근차근 듣고 있던 바이런이 던진 한 마디.
>"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이 말은 '문학에 대한 조예가 없음에도 작품을 소모하는 대중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그런 대중에 의해 형성되는 문학시장에 매인 자신에 대한 자조'가 섞인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이 말은 '문학에 대한 조예가 없음에도 작품을 소모하는 대중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그런 대중에 의해 형성되는 문학시장에 매인 자신에 대한 자조'가 섞인 말이다.
-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이름 높은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바로 바이런의 딸이다. 에이다의 어머니는 바이런 집안에 흐르는 방탕함과 무절제함이 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딸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문학공부를 철저히 방해하고 이과 분야만 배우게 했는데, 그 결과 에이다는 희대의 공순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신경 썼지만 결국 바이런의 피는 어디 가지 않았다.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켰고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37세 젊은 나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 와인과 여인과 유희를 예찬하며 아래와 같은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Let us have wine and women, mirth and laughter, Sermons and soda water later."
>"와인과 여인, 기쁨과 웃음을 즐기자, 기도와 소다수는 뒤로 미루고."
>"와인과 여인, 기쁨과 웃음을 즐기자, 기도와 소다수는 뒤로 미루고."
6. 명언
그는 시구나 저작 속에서 명언도 많이 남겼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언제나 이상하니까, 소설보다 더 이상한 것이니까. (시 '돈주앙' 中)
고난은 진리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남자의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삶 그 자체이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다.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로버트 사우디의 잔 다르크와 비교하며 평하면서) 잔 다르크는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다.(...)[9]
이러한 폭동은 가난에서 오는 것(러다이트 운동 당시 의회연설.)
7. 관련 문서
[1] 큰할아버지[2] 사촌 간으로 영국 해군 대장(Admiral)까지 역임했다.[3] 다만 믹 재거는 숫자가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윌리엄 램은 총리 임기중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 강화에 힘썼고 이후 대영제국의 토대를 닦는 상당한 명재상으로 꼽힌다. 보통 풀네임보다는 "멜번"경이라는 호칭으로 알려져있다.[5] 그 이전에도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이 있었다.[6] 바이런은 이 딸에게 자신과 근친상간 논란이(...) 있었던 이복누이 어거스터의 이름을 지어줬다. 딸의 풀네임은 어거스터 에이다 킹.[7] 나머지는 다 사생아였다고 한다.[8] Mary Shelly, "Author’s Introduction in 1831," Frankenstein (1818; New York: Penguin Books, 2000), p. xxiii.[9] 잔 다르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도 18세기 이후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을 비롯해서 잔 다르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났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 발언에 대해 바이런에게 있어서 하나는 위대한 시인으로서, 또 하나는 귀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며 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