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비 이씨

 

'''고려의 역대 왕후'''
공민왕
노국대장공주
혜비
익비
정비
신비
순정왕후

'''우왕비'''
'''근비'''
영비
현비

공양왕
순비
'''폐위된 왕비
근비
'''
<color=#373a3c> '''시호'''
없음[1]
<color=#373a3c> '''존호'''
근비(勤妃)
<color=#373a3c> '''본관'''
고성 이씨(固城 李氏)
<color=#373a3c> '''왕자'''
왕창(王昌)
<color=#373a3c> '''생몰연도'''
? ~ ?
1. 생애
2. 미디어


1. 생애


고려 제32대 군주였던 우왕의 제1비이다. 판개성부사 이림(李琳)과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다. 그녀가 우왕의 왕비가 된 것은 이인임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였다. 당시 고려의 세도가였던 이인임은 자신의 족질녀가 되는 근비를 우왕의 왕비로 입궁시켜 자신의 지위를 더욱 단단히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인임의 의도대로 궁궐에 입궐한 그녀는 우왕의 아들인 왕창을 1380년 출산했고 이인임의 세도는 더더욱 더 강화되었다.
이인임이 몰락한 후 그녀의 입지에 대해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 남편 우왕이 이성계 일파에게 폐위된 후 창왕이 옹립되었다. 그리고 그 모후인 근비는 왕대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창왕마저 폐위되면서 근비의 아버지 이림은 충주(忠州)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병사(病死)했고, 우왕과 창왕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후 그녀의 삶에 대해선 정사(正史)에 적혀진 것이 없다. 다만 조선 전기의 문신 이륙(李陸)이 쓴 야사 청파극담에 의하면, 근비는 우왕과 창왕이 사사된 뒤에도 개경에서 살았다고 한다. 집에는 살 한 폭이 부러진 병풍이 하나 있었는데, 시비가 그걸 고치러 하면 선왕(우왕)이 친히 부러드린 것이니 고쳐서는 안된다고 반대해서 부러진 병풍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우왕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고, 영비 최씨와 함께 정절을 기려 수신전을 받았다고 한다.

2. 미디어


[image]
사극 정도전에서 배우 서이안이 근비 역을 맡았다. 대체로 이인임의 인척이었기 때문에 이인임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아들인 창왕을 살리기 위해 우왕이 폐위되자 창왕의 곁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꾸미며 영광을 되찾으려 하지만 결정적일 때 주저하는 바람에 정몽주가 눈물을 삼키고 폐가입진의 논리를 내세워 창왕을 폐위하도록 만든다. 여담으로 배우의 발성으로 호불호가 좀 갈렸는데, 짜랑짜랑한 목소리 때문에 몰입이 안되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되려 귀엽다(!)고 평가한 사람도 있었다.


[1] 남편 우왕이 신돈의 핏줄로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그녀 역시 시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