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 안씨
1. 소개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의 제4비.[2] 그리고 고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왕비다.
보통 정비 아니면 왕대비 안씨(王大妃 安氏)로 불린다. 존호는 공양왕 때 받은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3] 약칭으로 왕대비 안씨.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라면 잠깐으로라도 꼭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 조선 건국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기에 그녀가 이방원보다 6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2.1. 공민왕 시기
1352년(공민왕 1년)에 문정공 죽성군 안극인(竹城君 安克人)의 딸로 태어나서 1366년에 공민왕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동지밀직(同知密直)이었던 아버지 안극인이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의 중지를 공민왕에게 건의한 일로 인해 아버지 안극인은 파직되고 정비 안씨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나 얼마 뒤 다시 입궁하게 된다.
재입궁 뒤에 공민왕은 정비 안씨에게 강제로 자제위의 청년들과 성관계를 맺기를 강요하는 등의 비행을 일삼았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머리를 풀고 자결까지 시도하자 공민왕이 물러났다고 한다.
2.2. 우왕 ~ 고려 멸망 시기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 살아있는 공민왕의 비 중에서 정비에 관한 것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다. 2비인 혜비와 5비인 신비는 비구니가 되었기에 기록이 적고, 3비인 익비는 어째서인지 혜비보다도 기록이 없다. 익비와 신비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단, 익비의 경우 공민왕의 강요로 홍륜과 동침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우왕 때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므로 역적의 아이라며 이유로 그 딸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과, 공양왕 때 익비가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딸인 경화궁주를 익비의 친정에서 양육했기 때문에 토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비 안씨에 대한 기록 중 좋은 일은 별로 없다. 우왕이 즉위하자, '''우왕은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우왕은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조카, 정확히는 남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의지할 사람이 없는 천애고아였던 우왕이 의붓어머니인 정비 안씨에게 모성애를 갈구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자 정비는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우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조민수와 이색의 주청을 받아들여 창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했다.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것을 강요하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내용의 교서를 다시금 선포한다.
이후 정식으로 왕대비가 되어 존호도 받았지만, 1392년 배극렴 등 이성계의 일파가 공양왕의 폐위와 새 왕조의 창업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며 정비 안씨를 협박하자 모든 실권을 상실한 그녀는 할 수 없이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선포하고 어보를 이성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됐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에는 익비 한씨가 창왕과 공양왕의 옹립교서를 내렸고 정비는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만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고려사 세가에서 정비가 창왕, 공양왕,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를 모두 내렸다는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인데, 고려사 같은 기전체 역사서에서는 세가가 중심이고 열전은 일종의 부록 같은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세가의 기록을 인정하는 편.
2.3. 조선 건국 이후
그녀는 조선 개국 이후,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강등 이후 술을 가까이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태종실록에도 그녀의 음주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4] 고려 멸망 이후에 슬픔과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여생을 술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후 36년 뒤인 1428년 6월 26일(세종 10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5] 이성계가 죽은지 20년이 지난 뒤였고, 이방원이 죽은지 6년이 지난 뒤다. 죽기 직전에는 박포의 집을 내려주었으며,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각각 100석을 보냈다.
6일 후에 예조는 “옛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위나라의 명제(明帝) 때에 한나라 헌제의 황후 조씨가 훙(薨)하니 장사에 사용한 수레와 옷과 예의 의식을 다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였으며, 당나라의 태종(太宗) 때에 수나라 양제의 후 소씨(蕭氏)가 돌아가니 조서를 내려 황후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의화궁주의 장사는 청컨대 옛 제도에 따라 왕비의 예를 쓰고, 그의 거복(車服)과 예의는 전조의 제도에 좇게 하소서”라고 보고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고려 왕비로서 장사된 것이다. 다만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기록에 없다.
3. 평가
왕비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출되는가 하면 다시 궁궐에 돌아와서는 강간 미수에 아들뻘인 우왕에게 희롱을 당하고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으며 왕의 폐위 교서를 3번이나 내리고 결국 자신이 속했던 고려 왕실의 문을 닫는 역할까지 하면서 술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대왕 대에서 죽은 여인. 하지만 이성계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필두로 워낙에 포스 있는 인물들이 많은지라 좀처럼 주목받지는 못한다.
4. 대중 매체에서
-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에서는 여인천하의 엄 상궁으로 유명한 한영숙(1951 ~ 2006)이 연기했다. 한영숙은 나중에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첫 정실부인인 신의왕후를 연기한다.
- 용의 눈물에서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는지 실제 역사에서의 연령대와는 다르게 당시 78세였던 원로 배우인 한은진[6] 이 이 역을 맡았다. 실제 정비 안씨는 1366년에 왕비가 되었으므로 당시 관습대로 15세 전후, 조금 더 높게 잡아서 20대 초반에 공민왕에게 시집왔다고 해도[7] , 용의 눈물 도입부인 우왕~공양왕 시점의 나이는 40대였을 것이다. 유약한 것으로 묘사되는 우왕이나 창왕을 대신하여 왕실을 지키려고 애쓰나 결국 역사는 역사인지라 이성계에게 옥새를 사실상 빼앗기고 말았으며, 9화에서 고려가 망하고 궁을 떠나기 직전 신덕왕후와 마주치는 모습으로 퇴장한다. 이 때 '새로 오신 중전이시구랴. 도둑질해서 들어앉은 지존의 자리는 어떠하신가?' 라고 비꼬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했으니 자기 눈에도 가시가 박힐 거라는 저주를 퍼붓는데, '저~주가 있을지어다! 저~주가!' 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인상적.
- 드라마 신돈에서는 전 프로게이머 서지수의 동생인 서지승이 맡았으나, 비중은 그저 '왕실 여성 1' 수준. 드라마 자체가 공민왕이 시해당하는 시점에서 막을 내리기 때문에, 폐위 교서를 내리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 정도전(드라마)에서는 김민주가 맡았으며, 자세한 사항은 정비 안씨(정도전) 참고. 여기선 앞서 말한 나이 고증을 비교적 잘 맞춘 편이다.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김지현이 연기했다.
[1] 추측이다. 그녀가 1366년에 간택되었기때문.[2] 고려 때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국왕이 여러 왕비를 두었다. 고려 중기부터 후궁에게 현비, 숙비 등의 칭호가 붙었다. 공민왕의 경우 노국대장공주 이외의 비들은 후궁으로 들인 것에 가까웠지만 당시 정실 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아서 정비는 계속 왕실의 어른으로 남았다.[3] 간혹 정숙왕대비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워낙 이런 경우가 적어서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인 명칭인지 불명.[4] 이명덕(李明德)에게 하교하기를, “의화궁주(義和宮主)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藥酒)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하였다. 궁주(宮主)는 전조(前朝) 현릉(玄陵)의 정비(定妃) 안씨(安氏)였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36권 18년 8월 6일 7번째 기사. 날마다 술 1병씩을 의화궁주(義和宮主) 안씨(安氏)에게 내려 주었으니, 곧 전조(前朝)의 공민왕의 정비(定妃)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29권 15년 5월 25일 4번째 기사.[5] 공민왕의 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연령을 15~20세 정도로 추정하면 사망 당시의 나이는 77~82세이다.[6] 1918년생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7년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한 원로 중의 원로이다. 2003년 작고.[7] 다만 당대 관습상 20대였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에 20세를 넘긴 사람은 혼례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노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