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시마(순양전함)

 


[image]
기공
1912.3.17
진수
1913.12.1
취역
1915.4.19
침몰
1942.11.15
배수량
36,700톤
길이
223미터
너비
31미터
최고속도
30노트
주무장
356mm 2연장포 4기
1. 개요
2.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격침
3. 관련 문서


1. 개요


구 일본 해군의 순양전함으로 공고급 4번함. 이름의 유래는 일본 규슈 남부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의 경계를 이루는 산악 지형.
세계 최초의 현대적 전함 드레드노트의 등장 이후 벌어진 건함경쟁에서 서구열강과의 차이를 인식한 구 일본 해군이 기존의 장갑순양함 건조계획을 확대시켜 도입했다.
1930년 1차 개장후 배수량 증가에 의해 최고속도가 감소하고 이 때문에 전함으로 재분류되나, 1936년 2차 개장을 받으면서 30노트의 고속을 확보, 고속전함(이라고 하기에는 종잇장 같은 측면장갑이 문제)으로 재탄생한다.
키리시마는 14인치 45구경장 주포에 1식 철갑탄을 사용했다. 이것보다 약간 아래라고 평가받는 미국의 구식 14인치 45구경 Mark 1 주포의 위력이 5,490m에서 측면장갑 437mm를 관통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 [2]
일본의 군함, 특히 대부분의 전함이 그랬듯이 기리시마도 함내에서 벌어지는 고참들의 가혹행위가 매우 심했다는 모양이다. 기리시마에서 수병생활을 했던 사람의 수기를 보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얻어맞고 일과시간중에 얻어맞고 자기 전에 얻어맞고 하루종일 얻어맞는 통에 맞은데가 아파 밤에도 잘 수가 없어 울기만 했다고. 사카이 사부로도 파일럿 이전의 해군 병조 시절에 기리시마의 승조원과 포수를 잠시 했던 적이 있다. 역시 하루종일 두들겨맞았다는 모양(…).

2.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격침


1942년 11월, 솔로몬 제도 해역에서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국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의 포격으로 격침당한다. 당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면, 당시 기리시마는 야간에 해안 포격[3]을 위해서 접근 중, 도중에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발견하고 철갑탄인 1식탄과 해안포격에 쓰려던 3식탄을 냅다 쏴버렸다. 사우스다코타는 이 해전에서 사소한 수리를 하던 수리반의 실수로 인해[4] 전기계통이 손상을 입어 제대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의 방어력과 운이 함께 작용해 계란으로 바위치기격이 되어 피해를 거의 주지 못했고,[5][6] 사우스 다코타가 다굴당하는 동안 무사했던 워싱턴이 조용히 기리시마의 뒤로 돌아가 16인치 함포 9문의 일제사로[7] 기리시마를 역관광보내버린다.[8] 기리시마는 3, 4번 포탑이 무력화 되었으며 조타계통이 피격당해 조함도 불가능해졌고 수선하에는 파공까지 뚫려 침수가 진행되었다.[9] 함장 이와부치 대좌는 결국 퇴함 명령을 내렸다.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해전의 주역이 바뀐 태평양 전쟁에서 전함끼리의 포격전으로 격침당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그리고 이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구축함 사미다레가 구출해서 가게 된다.

3. 관련 문서


[1] 출처: http://www.navweaps.com/Weapons/WNUS_14-45_mk1.htm 미국 구식 14인치 주포 http://www.navweaps.com/Weapons/WNJAP_14-45_t41.htm 일본 14인치 주포.[2] 첨언하자면, 보통 전함급에 달린 대구경 주포의 유효사정거리는 30km정도였다. 교전이 가능한 거리 30km에서 5km라면 1/6수준으로, 전함 교전 상의 영거리 사격과 비교된다.[3] 그전에 공고와 하루나가 과달카날 섬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포격해 성과를 거둔후 다시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보낸 것인데 미해군 순양함들에 의해 자매함 히에이가 대파되어 포기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리시마가 다시 접근하다가 아예 전함 사우스다코타, 워싱턴을 주축으로 한 함대와 맞닥뜨린 것이다.[4] 고참병이 독단으로 규정을 어기고 전기 차단기를 내려버려서 이후에 걸린 전류 과부하를 막지 못하고 함선 전체의 전기가 나가버렸다.[5] 사우스다코타의 상부구조물은 많이 손상되었으나 선체 손상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어서 함이 떠있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국 자력으로 귀항하여 수리를 받았으나 상부구조물 손상으로 꽤 장기간 입거하게 되었다.[6] 명중률이 큰 문제였는데 기리시마가 쏜 철갑탄 중 단 한 발만이 사우스다코타에 명중했다. 만약 이 포탄이 현측장갑에 명중했다면 충분히 현측장갑을 뚫었겠지만 명중한 부위가 다른 곳보다 장갑두께가 훨씬 두꺼운 바벳이었던지라, 포탄이 관통을 못 하고 폭발했다.[7] 엄밀히 일제사라기보다 준비가 되는 대로 쏘기 시작했으며 초탄부터 협차를 얻었고 3번째 사격으로 명중탄을 냈다. 워싱턴의 수병들은 숙련도가 높아 교범상 30초당 1발 장전인 16인치 주포탄 장전을 '''14초'''로 끊었다고 한다. 그 결과 '''7분간 75발을 쏟아부어''' 기리시마를 걸레짝으로 만들었다.[8] 사실 워싱턴이 기리시마를 근접해서 두들긴 것은 이미 워싱턴이 레이더로 기리시마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포착한 전함이 기리시마인지 사우스 다코타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레이더 배치에는 문제가 있어서 오른쪽 후방 80도 정도는 잡아내지 못했다. 때마침 사우스 다코타가 거기에 들어간데다 사우스다코타의 전기계통이 맛이 간 바람에 교신도 먹통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근접하여 사우스 다코타를 탐조등까지 켜가며 두들기는 기리시마를 확인하고 주포를 근접 사격한 것이다.[9] 견인을 시도했으나 파공으로 물이 더 차올라 기관실마저 침수되자 포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