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해전

 

'''과달카날 해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image]
기리시마에 함포 사격을 가하는 USS 워싱턴
'''날짜'''
1942년 11월 12일(1차) ~ 1942년 11월 14일(2차)
'''장소'''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앞바다, 헨더슨 비행장
'''교전국'''
<^|1> [image] 미국
<^|1>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1>[image] 윌리엄 홀시
[image] 데니얼 켈러헌†
[image] 노먼 스콧†
[image] 윌리스 리
<^|1>[image] 야마모토 이소로쿠
[image] 아베 히로아키
[image] 곤도 노부타케
[image] 다나카 라이조
'''결과'''
일본 해군의 물자 수송 실패. 미 해군의 승리
'''영향'''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확정시킨 해전.
'''전력'''
전함 2척[1]
중순양함 2척[2]
경순양함 3척[3]
구축함 12척
(기타)
'''항공모함 1척'''
순양전함 2척[4]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16척
(기타)
항공모함 1척[5]
수송선 11척
'''참전 전력'''
(1차)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2차)
전함 2척
구축함 4척
(1차)
순양전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2차)
순양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2척
구축함 9척
'''피해 규모'''[6]
(1차)
경순양함 2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2차)
구축함 3척 침몰
(기타)
항공기 36기 손실
(1차)
순양전함 1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2차)
순양전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침몰
(기타)
중순양함 1척 침몰
수송선 11척 침몰
항공기 64기 손실
'''총 인명피해'''
1732명 전사
1900명 전사
(수송병력 인명피해 제외)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차 과달카날 해전
3.1.1. 해전 이전
3.1.2. 난전
3.1.3. 해전 이후
3.2. 막간극 - 일본 해군 중순양함들의 습격과 미 해군의 반격
3.3. 2차 과달카날 해전
3.3.1. 해전 직전의 상황
3.3.2. 전투의 시작
3.3.3. 미 구축함 전대의 전멸
3.3.4. 사우스다코타의 고난
3.3.5. 사우스다코타, 워싱턴 VS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
3.3.6. 미 함대의 이탈과 전투 종료
3.3.7. 2차전의 이야깃거리
3.4. 피날레 - 수송작전 대실패
4. 결과
4.1. 전략적 의의
4.2. 전술사적인 면에서의 의의
4.3. 논공행상
4.4. 기타
5. 전력
5.1. 1차
5.2. 2차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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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 Naval Battle of Guadalcanal, Third and Fourth Battles of Savo Island, Battle of the Solomons, Battle of Friday the 13th
일본어 : 第三次ソロモン海戦
과달카날 전투 당시 1942년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해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야간 해상전.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하고 과달카날의 일본 육해군을 지원하기 위해 진격한 일본 해군 함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투입된 미 해군 함대간의 전투로서 최종적으로 일본이 패배했다. 이 전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순양전함 2척을 손실하고, 지상군용으로 딸려 보낸 수송물자마저 죄다 잃어버린 일본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일본측에서는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고 부른다.

2. 배경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후로 핸더슨 비행장은 일본군에겐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산타크루즈 해전의 결과로 미군 항공 전력의 또 다른 축이었던 항모기동부대가 전열에서 이탈한 상황이었으나 그 점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고, 미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틀어쥐고 있는 바람에 과달카날 상공의 제공권은 미군에게 유리하였으며, 제해권 역시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무력화 내지 탈환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라바울과의 거리와 비행장 자체의 대공방어로 인해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상함대에 의한 포격은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은 전함급은 되어야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비행장을 파괴하는 것과 그를 위해 헨더슨 코 앞까지 순항하는 일정을 항공기의 이착륙과 공습이 제한되는 야간에 전부 소화해야 했고, 당시 현지 지휘관의 재량으로 동원할 수 있는 수상함 중에서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배는 오로지 공고급 순양전함들뿐이었다.
그나마도 미군이 비행장을 복구하기 마련이므로, 포격 이후에는 비행장을 제압하고자 지상전투가 벌어져야 했으나, 일본 육군은 미군에 비해 숫적, 질적으로 열세였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화기를 포함하여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한 번에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보급을 성공시키기 위해, 공고급 순양전함 2척이 포함된 별도의 대함대가 보급함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해 투입된다.
수송선 11척에 38사단의 병력 1만 명과 중포 50문, 포탄 8만 발과 보급품 1만 톤을 실었고, 근접호위용으로 구축함 11척, 외곽호위용으로 중순양함 2척을 포함한 5척을 붙였다. 비행장 타격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포함한 14척으로 구성된 11전대가 아베 히로아키 제독의 지휘하에 출격했다. 이 전함 부대의 예비대로 곤도 노부다케 제독의 중순양함 부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미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소극적으로 초기 작전 목표인 상륙부대를 지키는 것에만 집착하느라 적절히 공세로 전환할 타이밍을 놓친 해군중장 로버트 곰리 제독이, 패배주의에 젖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해임된 이후로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달카날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지만, 그 전폭적인 지원이 제대로 결실을 이뤄서 미군이 공세로 나설 역량을 갖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편, 과달카날 현지의 미군들은 이미 10월에 일본 전함의 포격에 의해 비행장이 무력화 되었을 때 일본군의 증원과 역습에 한동안 고생한 바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핸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어서 일본군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면 다음 번의 공세 타이밍도 놓칠 것이었고, 이 일대에서의 전투가 장기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의 비행장 공격을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미 해군은 일본군의 수상함대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미 해군에 항공모함이 없으리라는 일본군의 예상을 '''또 다시''' 깨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뒤 수리 중이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를 계속 수리해가면서 전장으로 투입시켰다.[7] 하지만 엔터프라이즈와 사우스다코타, 그리고 고속전함 워싱턴이 포함된 16임무부대는 11일에 누메아를 출항하였고, 과달카날 북부 해역까지는 도저히 시간에 맞춰올 수가 없었다.
결국 터너 제독은 전함 중심의 일본함대를 1차로 막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증원 부대를 호위하던 순양함 부대에게 맡기게 된다.

3. 전개



3.1. 1차 과달카날 해전



3.1.1. 해전 이전


11월 13일 새벽 첫번째 야간 해전이 일어났다. 일본의 11전대가 전함 키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인근에 배치된 미 해군 호위함대는 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기 때문에, 아베 제독은 미군이 정면으로 덤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이 일본전함부대를 막아야 하는 미군 순양함 부대의 경우, 원래 2개 부대였던 것을 일본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급히 하나의 부대로 묶어서 편성한 것이었다.[8] 이 통합부대의 지휘를 맡게 된 캘러헌 제독은 함대지휘 경험이 없었지만 실전 경험이 있는 스코트 제독보다 2주 먼저 진급된 짬밥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은 상황이었다.[9]
적과의 충돌을 고려하지 않은 공격부대와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이 이끄는 수비부대가 맞붙게 된 1차 과달카날 해전은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의 경과는 문자 그대로 ''''불 나간 술집의 난투극''''으로 진행되었다.

3.1.2. 난전


전투는 칠흑같은 밤에 시작되었다. 상대방을 먼저 발견한 건 미국함대였으나, 캘러헌의 실책과 아베의 안이한 지시 덕에[10] 미군 함대는 먼저 보고서도 8분이 지나도록 포 한발 쏘지 않았는데 일본 함대는 그 동안 아예 미군 함대를 찾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한 동안 양측의 구축함들끼리 갑자기 마주쳤고 갑작스러운 접적에 놀란[11] 미 구축함들이 변침하는 바람에 미 함대의 진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일본 해군도 미 해군의 존재를 눈치챘고 결국 일본 함대에 첫번째로 포착된 미 해군 경순양함 애틀란타가 포문을 엶으로서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애틀란타가 일본측 구축함 아카츠키유다치에 의해 곧바로 무력화 되는 동안 캘러헌 제독이 사격과 기동 명령을 내렸으나 그 기동 명령이라고 내린게 심히 괴랄했고 그마저도 혼선이 거듭되는 바람에 미군 함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미 해군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일본 함대 기함히에이를 조기에 발견하여 최우선 목표로 지정했다는 것이다.[12]
이리하여 전투는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일단 마주친 코앞의 적을 두들겨 패는 혼전, 난타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 와중에 스코트 제독은 캘러헌 제독이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팀킬'''로 전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에이가 샌프란시스코의 함교에 명중탄을 내어 캘러헌 제독과 함장인 캐신 영 대령, 마크 크로우터 대령까지 전사해버렸다. 히에이는 샌프란시스코를 끝장내기 위해 일제 사격을 반복적으로 퍼부었지만[13],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장교인 부르스 맥칸트리스 소령은 철수하는 대신 CPO와 함께 함의 복구를 지휘하면서 전선에서 버티기로 하고, 어그로를 끌었다. 캘러헌 제독이 전사하기 전에 남긴 '대형함을 먼저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군 함선들은 히에이를 우선 목표로 삼아 난타전을 벌였다.
이러한 난장판이 사방에서 벌어지며 자기 함이 미군에게 찍혀 온갖 화력이 집중되자 아베 제독은 슬슬 기가 꺾이던 참이었다. 그래도 히에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잘 싸우고 있었는데 상술했듯 미 함대 기함 샌프란시스코의 함교를 날려버려 캘러헌 제독을 사살했으며 쏟아지는 포화를 버티며 서치라이트로 함대의 목표를 지정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벤슨급 구축함 USS 래피가 야음을 틈타 일본 함대 사이로 잠입했는데, 래피를 조기발견하지 못한 것이 모든 것을 뒤집고 말았다. 그냥 기습한 것도 아니고 '''아예 10 m 거리까지 접근하여''' 대공기관포를 히에이의 함교에 긁어버려서 관측창을 깨고 함교에 탄을 때려넣은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포화 때문에 아베 제독 본인과 참모진 일부가 부상을 입었고 참모장 스즈키 마사가네 대좌 등 참모진 여럿이 전사하여 함교가 피바다로 변했다. 이렇게 히에이의 함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아베 제독은 나머지 함대가 멀쩡히 살아서 미 함대를 두들기고 있었음에도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고''' 전투 20분 만에 비행장 포격을 포기하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정작 실제상황은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지휘부가 날아간 데다 전함 한 척 없으며 진작에 함 몇척을 잃거나 무력화당한 미 해군이 압도적으로 불리했었지만, 난전의 한복판에 휩쓸렸고 자기 함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아베 제독은 실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당연히 제대로 된 지시를 내릴 수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 함대는 대부분 함정이 피해를 본 상태로, 기함인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는 함교가 날아갔으며 히에이에게 난타당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포틀랜드는 함미에 어뢰를 맞고 조타 기능을 상실하여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경순양함 애틀랜타, 주노, 헬레나의 경우 애틀랜타와 주노가 대파되어 무력화되었으며 그나마 헬레나만 피해가 가벼웠다.
구축함 쿠싱, 래피, 바튼, 몬센, 스테렛, 애런워드, 오베넌, 플레처 8척 중에서는 쿠싱[14], 래피[15], 바튼[16], 몬센까지 4척이 침몰했으며 스테렛은 피해로 인해 전투에서 이탈하고[17] 애런워드는 피해를 보았지만 침몰은 면했으며 오베넌은 가벼운 피해만 입었다. 플레처[18]만이 유일하게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은 함선으로, 사실상 구축함 한 대 빼고는 전부 크든 작든 얻어터진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전함 히에이, 구축함 유다치[19], 아카츠키[20][21]를 뺀 나머지 함선들('''순양전함 키리시마 포함''')이 거의 건재했기 때문에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면 일본 함대가 압승하고 비행장까지 날려버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어찌됐든 미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일본 함대가 꼬리를 말고 물러남으로서 결과적으로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3.1.3. 해전 이후


날이 밝아지면서 피해가 심해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군함들끼리 마저 포격을 교환한 끝에 일부는 끝내 격침되고, 일부는 겨우 탈출했다. 어뢰와 함포에 심하게 얻어맞은 미국 측 경순양함 애틀랜타는 승무원들의 초인적인 노력 끝에 침몰은 모면하고 예인선에 이끌려 룽가 정박지에 닻을 내렸지만 피해가 심했고 과달카날에는 수리 시설이 없었으며 도저히 에스피리투산토까지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결국 자침 처분되었다.
경순양함 주노는 선수에 어뢰를 맞고 복귀하던 도중, 일본 잠수함 이26의 어뢰를 맞고 탄약고가 유폭해 굉침한다. 승무원 100여명이 탈출했지만 철수하는 함대는 득실거리는 일본 잠수함 때문에 구조를 포기하고 그냥 가 버렸고, 2차 과달카날 해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해전 속에서 그대로 잊혀지는 바람에 단 1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설리번 5형제의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당시 설리번 5형제의 몰살은 상당한 스캔들이었고 홀시 제독은 자신의 사령부가 작전하던 해역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제독 본인의 성품상 대단히 수치스러워했으며, 철수하는 함대를 지휘했던 후버 대령을 포함한 책임자들의 목을 줄줄이 날리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일본 측 기함 히에이는 근거리에서 여러 함에게 받은 집중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전투력과 항행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였는데, 전투력도 거의 상실했고 기동성까지 저하된 전함을 뇌격기들이 내버려둘리가 없었다. 게다가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가 근거리에서 발사한 포격에 타기실이 관통되어 침수가 진행되어 제대로 조타가 작동하지 않던 상황에 뇌격기들이 발사한 어뢰가 조타장치를 파손시키며 조타불능 상태가 되어 직진을 못하고 빙빙 돌 수밖에 없게 된다. 야마모토 제독은 히에이를 과달카날까지 살려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베 제독은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함의 상황을 확인한 후 무리라는 답을 보냈고, 야마모토 제독은 명령을 취소했다. 그리고 아군이 공습에 노출되므로 함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베와 죽어도 못 버린다는 함장 니시다 마사오 소장의 분쟁 탓에[22]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베 함대는 논쟁 와중에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SBD 돈틀리스의 급강하 폭격 세례도 받았다. 결국 기관실까지 침수되어 기관실 내부인원 중 사망자가 나왔다. 결국 히에이는 회생불능 상태가 되었다. 더는 어쩔 도리가 없어진 니시다 함장도 결국 퇴함하고 13일 오후 6시에 배수 밸브를 열어 함을 자침했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뒤이어 진입하는 아군 함대의 안전을 위해 히에이를 그대로 둬서 미군의 포격 목표로 삼으려고 했었으나 그의 명령이 도착한 건 자침을 시작한 뒤었다. 굳이 야마모토의 명령이 아니었어도 히에이는 13일 낮 내내 미군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던터라 뒤에 오던 중순양함 중심의 호위함대는 미군의 방해 없이 과달카날로 접근할 수 있었다.
13일 낮이 되자 엔터프라이즈와 16임무부대는 과달카날 동남쪽에 전개해 섬 전역을 항공모함의 세력권으로 집어넣었고, 히에이에게 퍼부은 공습을 시작으로 과달카날 해역에서 미,일 통틀어 유일한 항공모함으로써 작전을 시작한다. 이 날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비행갑판에 써갈긴 글귀가 그 유명한 '''Enterprise vs Japan'''이다.
사족이지만, 과달카날 전역부터 엔터프라이즈는 함재기의 이함, 발함이 없던 동안에는 경순양함 샌디에이고의 호위를 받으며 베스탈 승조원들의 수리를 받았기 때문에, 이 두 배도 엔터프라이즈를 따라 배틀스타를 쓸어담으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3.2. 막간극 - 일본 해군 중순양함들의 습격과 미 해군의 반격


비행장 공격부대의 작전 실패로 상륙부대는 작전을 일단 취소했지만, 11월 14일 새벽 수송함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제독의 함대가 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이들은 '''미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은 채''' 과달카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 함대가 미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은 데엔 상술한 히에이 외에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의 홀시 제독이 USS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임무부대의 위치를 착각한 것도 한 몫했다. 일본 호위함대의 남하를 감지한 미 해군 사령부는 13일 저녁에 해군소장 윌리스 A 리 제독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기동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홀시 제독은 16임무부대의 위치가 예상보다 과달카날에서 상당히 멀리 있다는 것을 몰랐다. 16임무부대는 지속적으로 북상중이었지만, 엔터프라이즈가 함재기를 발진시키거나 착함시킬 때는 맞바람을 받기 위해 전 함대가 동남쪽으로 전속 전진했기 때문이다. 미해군 수뇌부는 이 점을 간과한채로 16임무부대가 계속 북상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64임무부대의 최신예 고속전함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14일 새벽에는 과달카날에 도착할 수 없음을 몰랐다. 결국 64임무부대는 13일 밤에 섬 북쪽 해상으로 진입하는 것을 포기하고, 안전한 과달카날 섬 남쪽 해상에서 대기하다가 14일 오후에야 북상했다.
일본 해군 중순양함이 아무런 제지없이 과달카날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 및 군부에서는 과달카날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긴장했다.
미군으로서는 다행히도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대 해역에 소수 남아 있던 미군 어뢰정의 반격에 일본 함대가 일찍 물러나면서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14일 아침이 밝으면서 미카와 함대와 수송함대들은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철야 작업으로 복구를 마친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에게 '''각각 예상하지 못했던''' 공습을 받았다. 미카와 함대는 중순양함 키누가사가 격침되고, 중순양함 마야는 심한 손상을 입어서 일본 본토로 회항하게 되었다. 수송함대는 6척이 격침되었고, 대파된 한 척은 회항하다가 추가로 가라앉고 말았다. 사보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카와 제독도, 항공 열세 아래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함대의 구축함들은 생존자들을 건져내서 육지로 향했고, 수송함 4척과 구축함 4척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미 항공 세력의 영향권 밖으로 탈출한 뒤, 곤도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대기했다.
16임무부대는 전함 2척과 구축함 4척을 64임무부대로 떠나보내고 나서는 전함이 한 척도 없었다. 호위함은 중순양함 노샘프턴과 경순양함 샌디에이고, 그리고 구축함 6척이 있을 뿐이었다. 미군 수뇌부는 헨더슨 비행장이 포격을 받아 복구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항공세력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보험으로 삼기 위해, 엔터프라이즈가 소속된 16임무부대의 지휘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에게 일본 수상함대와 조우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밤 동안 과달카날 섬으로 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기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보조함대'''가 1차전에서 살아남은 11전대의 잔존 세력 및 14일 미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송함대를 규합하여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남하했고, 월리스 리 제독의 64임무부대 역시 이를 저지하기 위해 16임무부대와 정 반대의 침로를 잡으며 홀로 북상했다.

3.3. 2차 과달카날 해전



3.3.1. 해전 직전의 상황


곤도 제독의 2함대는 사전 항공정찰에서 64기동부대 소속 미 해군의 전함을 못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았다.[23] 게다가 1차전에서 함대의 주력함이 혼전에 휘말리는 바람에 전함 한 척을 잃어야 했던 경험이 생생했다.
따라서, 곤도 제독은 자신의 부대를 나누면서 '중순양함 중심의 약체 미 함대'는 경순양함과 구축함들로만 상대하게 하고, 전함과 중순양함들은 과달카날 포격을 위해 후위로 배치했다. 경순양함과 중순양함을 맞붙히는 선택은 당연히 휘하 함장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경순양함 전대를 둘로 나눴는데, 경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아야나미, 시키나미, 우라나미를 사보섬 동쪽을 통해 남하하도록 했고, 경순양함 나가라와 수축함 시라유키, 하츠유키, 사미다레, 이나즈마는 사보섬 서쪽으로부터 진입하도록 했다. 그리고 본인은 중순양함 아타고를 기함으로 삼고, 전함 키리시마와 중순양함 타카오, 그리고 남은 미카와 함대의 생존한 구축함 4척과 원래 데리고 있던 구축함 아사구모와 테루즈키로 함대를 이뤄 '포격함대'라고 명명하고, 경순양함 전대 뒤에서 항해하기로 했다. 덧붙여서 경순양함 전대에게는 본대가 오기 전에 미 함대를 일소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멘탈이 좋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곤도 제독만이 아니었다., 월리스 리 제독의 64임무부대 역시 전투에 임하기 전부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구축함 4척은 남은 연료 순으로 뽑혔던 탓에, 사실상 16 임무 부대의 각 구축함 전대에서 무작위로 차출된 셈이라 함장 간에 서열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총괄하던[24] 리 '''제독'''을 앞에 두고 그 건에 대해 언급을 할 만큼 간이 큰 구축함 함장도 없었다.
두 번째로는 전함 함장들 사이의 미묘한 알력다툼이 있었다. 워싱턴의 함장 글렌 데이비스 대령과 리 소장은 '''내 해군 인생은 전함 주포를 향한 로망 일직선이었다'''(...)[25]라고 자칭해도 될 정도로 자타공인 수상함 커리어와 경험을 쌓아올리던 실전파 장교들이었다. 그리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은 워싱턴, 즉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보다 최신예함이었는데, 전함 전문가들이었던 함장 및 제독들의 극성맞은 피드백을 받아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척을 추가로 건조하는 대신 새로이 설계해서 건조한 개량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사우스다코타의 초대 함장 토마스 개치(Thomas Leigh Gatch) 대령은 적지 않은 장교 이력을 해군 법원과 사관학교, 즉 '''행정과 참모부 경력으로 쌓은 장교'''였다. 당연히 데이비스 함장이 개치 함장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제독은 레이더 지향 사격 연구를 데이비스 함장 및 워싱턴의 포술 주특기 부사관들과 함께 연구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의 레이더 및 포술에 대한 전문성 만큼이나 그 사이도 돈독했다. 그리고 리 소장은 토마스 개치 대령의 난처한 처지[26]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물론 사우스 다코다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 대신 대공 관제를 맡았는데, 침착하게 임무를 수행했고, 결과가 평타는 쳤던 점도 제독이 고려했을 것이다.그리고 리 소장에게는 다행히도 개치 함장은 상당한 인격자였던 데다가 사관학교에서 포술을 강의한 경력도 있고, 사우스다코타의 초대 함장이라는 유리한 여건도 작용해서, 함장 자리를 포커쳐서 따낸 건 아님을 보여주며 사우스다코타의 승조원들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엄청난 카리스마가 깃듯 리 제독이 있기 때문에, 2차 과달카날 해전은 1차 해전과 지휘부 구성에서 나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이런 '책상물림' 출신 인사는 유능하더라도 융통성 없고 원리원칙대로 수행하는 성격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런데 토마스 개치 함장은 오히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부하들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사우스다코다는 승조원들의 실력과 전과는 좋은 대신, 청소나 세탁, 샤워에는 소홀해서 함선이나 승조원들의 청결 상태는 개판이었다고.
세 번째는 미 해군 어뢰정과 교전할 뻔한 일이었다. 전술했듯이, 14일 새벽에 미카와 함대의 일본 중순양함에게 무모한 도전을 했던 기억 때문에 미 해군의 어뢰정들은 굉장히 민감했다. 어뢰정들은 대형함을 발견하고 호출부호를 물었지만, 리 제독은 아직 못 받았는데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64임무부대는 북상하면서 별도의 호출 부호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뢰정들은 즉시 불신하는 태도를 드러내며 워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를 향해 뇌격 침로를 잡았다. 성질이 폭발한 리 제독은 리 제독의 별명을 알고 있던 지인이기도 한 어뢰정장들의 상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라고 말한다.
Ching[27] Lee가 지나간다고 전하라고!
다행히도 어뢰정들은 우군임을 알게 되었고, 64임무부대는 호출부호를 받았다. 이 해프닝으로 함대는 행정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가뜩이나 부족했는데 더 모자라졌다. 그 대신이라기에는 뭣하지만 함대의 모든 사람이 리 제독의 성질머리를 알게 되어서, 제독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던 구축함의 함장들도 제독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된다.
어쨌든 일련의 해프닝이 끝나자 리 제독은 함대를 단종진으로 구성하기로 했고, 구축함 4척을 앞세운 뒤 그 뒤를 기함인 전함 워싱턴과 전함 사우스다코타가 뒤따르도록 하고, 과달카날 섬 북쪽 해역에서 북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하여 사보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3.3.2. 전투의 시작


[image]
A : 64 임무부대
B : 구축함 아야나미
C : 센다이 그룹
D : 나가라 그룹
E :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
11월 14일 오전 곤도 함대는 급유를 마친 뒤 남하했고, 미군 항공 세력권으로 진입하며 잔존함대와 합류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미국 잠수함에게 추격을 당했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자 곤도 제독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함대를 먼저 전개한다.
반대로 64 임무부대는 오전에 급유 중이던 키리시마를 뇌격하려했으나 결국 어뢰를 쏘지 못한 잠수함 트라우트(Trout)으로 부터 보고를 받아서 일본 함대가 있음을 알았으나, 저녁에 곤도 함대를 어뢰 5발로 공격한 잠수함 플라잉 피쉬로부터는 아직 무선보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곤도 함대의 위치를 정확히는 몰랐다.
그러나 워싱턴이 SG 레이더로 사보섬 동쪽, 즉 미 함대의 북쪽에서 접근하던 센다이 함대를 포착하고, 미국 전함들은 센다이가 중순양함일 거라고 추측한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센다이의 함영을 사우스다코타의 견시가 발견하자, 밤 11시 17분에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가 일본 함대에서 앞장서 항해하던 경순양함 센다이에게 레이더를 이용한 선제 주포 사격을 퍼부으며 과달카날 섬쪽을 향해 남남서쪽으로 변침한다. 하지만 일본 함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고, 아야나미를 제외한 모든 배가 반전하여 북쪽으로 도망친다. 그 결과, 센다이 함대는 사보섬을 등지며 레이더로부터 숨은[28] 아야나미를 포함하여 미 전함의 탐색에서 벗어난다.

3.3.3. 미 구축함 전대의 전멸


센다이 함대와 조우하기 전에, 리 제독은 구축함 전대를 서쪽으로, 즉 사보섬 서쪽 방향으로 항해하도록 지시했다. 제독의 의도는 미 전함의 예상진로에 구축함을 선행시켜서 적 함대의 세력을 노출시키고, 가급적이라면 적의 공세를 뒤집어 써서 예봉을 꺾으려는 비정한 것이었다. 미 해군은 아직 몰랐지만, 그 방향에는 나가라 함대가 있었고, 더 가까이에는 아야나미가 있었다.
제독으로부터 작전 의도를 직설적으로 전달받은 4척의 미 구축함은 아야나미에게 금새 발견되었고, 밤 11시 22분부터 아야나미의 유도를 받은 경순양함 나가라와 아야나미, 그리고 나가라 함대의 구축함 4척 전부로부터 30여발의 93식 어뢰를 동반한 선제 공격을 받았다. USS 프레스턴, 워키가 포격으로 격침되어 불타올랐고[29] 벤험은 산소 어뢰에 맞아 함교 바로 앞까지 선수부가 날아가버렸다. 남은 한 척인 그윈도 엔진실에 피격되었다. 격침된 배에서는 반수 이상이 즉사했고, 생존자들은 구명 보트를 내려서 미 해병대가 있는 과달카날로 노를 저었다. 벤험의 승조원들은 안간힘을 쓰면서 리 제독이 지시한 항로로 항해했고, 그윈은 그 곁에서 느릿느릿 전진했다.
4척의 구축함들은 가혹한 댓가를 치렀지만[30], 리 제독이 원하던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아야나미와 나가라 함대 역시 미 구축함대의 괴멸을 보고했다. 곤도 제독은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고, 즉 과달카날을 초계 중이던 미국의 수상함이 전부 격침되었다고 믿고 비행장 포격 준비를 시작하며 남하했다.
그와 동시에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는 미 구축함들이 초토화된 해역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아야나미를 포함한 곤도 함대는 미 전함들이 중순양함이라고 여겼다. 과달카날 전역까지는 미 해군의 중순양함은 전부 조약형 중순양함이어서 방어력이 형편 없었던 데다가 미 전함들이 앞서 교전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순양함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야나미는 어뢰를 모두 소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 섬의 그림자 속에서 항해하던 전함 워싱턴에게 함포사격으로 정면 도전했다. 하지만 아야나미의 몇 안 되는 포격은 전부 어둠 속에 숨어었던 워싱턴을 빗나갔고, 워싱턴은 몇 차례 부포 사격으로 아야나미를 항해와 전투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대파시켰다.
이제 양측의 본대는 서로 마주오고 있었다.

3.3.4. 사우스다코타의 고난


[image]
1 : 미국 구축함 격침
2 : 아야나미 격침
3 : 키리시마 격침
A : 미 전함 세력의 진로
실선: 워싱턴
쇄선: 사우스다코타
파선: 그윈, 벤험의 퇴각로
B : 아야나미
C : 센다이 그룹
D : 나가라 그룹
E :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
야야나미가 격침될 즈음에, 사우스다코타에서 정전이 발생한다. 사우스다코타의 엔진실, 즉 집중방어구획 안에 있던 배전반에서 갑작스례 차단기가 내려갔고, 전력이 차단되자 전력을 많이 차지하는 장비들이 하나 하나 다운되었다. 레이더, 사격통제 시스템, 탄약고에서 포반까지 탄을 올려주는 양탄기, 포탑을 회전시켜주는 모터, 통신장비, 그리고 함내는 물론 함 밖을 비추는 서치라이트나 발광신호용 조명까지. 미군의 전함은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부터 상당히 많은 설비가 전자기기로 대체되거나 자동화되었는데, 발전기가 꺼진 상황에서는 독이 되었다. 하지만 유압식으로 움직이는 키와 오로지 기계만으로 움직이는 엔진은 살아있었고, 미군 함선에 함내 연락수단으로 무전지식 전화기(sound powered telephone)가 진주만 공습 직전부터 도입되었기 때문에 지휘가 불가능한 사태까지 다다르진 않았다. 그 덕분에 사우스다코타는 완전히 장님이 된 상황에서도 위험하게나마 야간항해를 할 수 있었다.
개치 함장이 인격적으로 행동해왔기에 함내의 수병이 정전의 원인이었던, 안전수칙 미준수로 인한 합선을 즉시 보고해왔다. 하지만 엔진실의 배전반을 제대로 복구하려면 고압의 전기를 생산하던 엔진실의 발전기를 멈춰야 했고, 그러려면 사우스다코타가 멈춰서야 했다. 개치 함장은 본인의 커리어에 자신감이 부족했고, 어뢰가 오가는 교전 수역에서 전함을 멈춰세우는 위험 부담도 너무 컸다. 그래서 배를 멈추지 않으면서 배전반을 수리하라고 지시하고는, 어둠 속에서 워싱턴을 따라 항해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수병들과 CPO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전반의 차단기는 다음날 새벽까지 복구되지 않았다.
밤 11시 35분이 되자 미 전함들은 미 구축함들이 불타오르는 수역에 도착했다. 리 제독과 데이비스 함장은 능숙한 조함으로 전함 워싱턴을 움직여 불타오르는 구축함을 오른편에 두도록 좌선회했고, 불길과 섬 사이를 항해하며 워싱턴을 그림자 속으로 숨긴다. 반면 뒤쫒아오던 사우스다코타는 정전으로 레이더를 쓸 수 없고 견시의 음성경고에 의존하며 항해하던 상황에서, 불타오르는 구축함들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오던 벤험과 충돌할 뻔했다. 사우스다코타는 충돌시의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우현으로 선회해서 충돌을 회피하였으나, 그 방향은 워싱턴이 갔던 방향과 정 반대였다. 결국 사우스다코타는 불길을 등지고 항해하게 된다. 그 결과, 곤도 함대의 키리시마의 견시는 아야나미를 격침시켰다는 미국의 잔존 중순양함(?)의 실루엣을 쉽게 발견한다.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는 '손상을 입은 것인지 순양함 치고는 느리게 움직이던 적함'의 침로를 쫒아 북서쪽으로 변침하고는, 좌현으로 전 포문을 전개한 뒤, 키리시마와 아타고의 서치라이트를 신호로 밤 11시 40분에 뇌격 및 포격을 개시했다. 주변의 일본의 구축함들도 그 뒤를 따랐다.

3.3.5. 사우스다코타, 워싱턴 VS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


키리시마, 아타고, 타카오는 사우스다코타에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일본 측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사우스다코타도 주포로 두세 번 일제사격을 실시했으나 명중탄은 내지 못했다. 키리시마는 3식탄으로 포문을 연뒤 1식 철갑탄으로 전환하였으며, 5200미터 거리에서 14인치 주포를 총 1발 명중시켰고, 아타고와 타카오는 20 cm 주포를 18발 명중시켰다. 그 외의 여러 배가 부포나 대공포를 명중시켰다. 아타고와 타카오는 93식 어뢰도 8발을 발사했으나 빗나갔고, 사우스다코타는 어뢰가 발사되었다는 사실 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3척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은 결과 사우스다코타는 상부구조물에 달린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 통신 안테나들이 부서지고 망가졌으며 전방 마스트에는 화재가 발생했다. 키리시마의 14인치 주포는 3번 포탑의 바벳에 명중하였으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폭발했다.[31] 그리고 함상 구조물이 심각하게 손상된 결과, 39명이 사망하고 59명이 부상했다. 다만 집중 방어 구역을 관통하지 못한 탓에, 배의 부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시야에 의존하여 항해하던 사우스다코타가 워싱턴이 어디로 갔는지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은 전장에 자신을 제외한 대형함이 최소 4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레이더 덕분에 알았고, 그 중 2척이 더 크다는 것도 알았으며, 그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소리만 듣고도 알았다. 하지만 곤도 함대는 사보섬 뒤편에서 나타났고, 사우스다코타는 워싱턴의 결함이었던 우측 후방의 80도 가량 되는 레이더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레이더로 실시간 추적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4척은 교전 도중에 4.6 km 거리까지 접근했는데, 이는 사실상 영거리 사격으로 간주되는 거리여서 우리 편이 우리 쪽에 있는 배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할 수 없던 탓에 피아를 식별할 수 없었는데다가, 오사의 가능성도 높았다. 워싱턴은 전파 침묵을 무시하고 피아 식별을 위해 사우스다코타와 통신을 시도했으나, 모든 통신이 마비된 사우스다코타는 응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사격하자니, 이 상황에서는 2척 중에서 오사하게 되면 아군을 공격할지도 몰랐다. 다른 중순양함 2척을 쏘면 나머지 하나의 대형함의 위치를 식별하지 못해 반격할 수 없는 상태로 교전할 수도 있는 데다가, 적의 가장 강한 배를 자유롭게 두는 위험도 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밤 11시 48분에 리 제독은 일단 벤험과 그윈에게 전장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리 제독은 그날 밤의 가시거리 7 km 안으로 들어가서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교전장소에 접근하라고 지시했다. 워싱턴은 함장이 능숙하게 조함하며 접근하여 대형함 2척을 구분해서 사격할 수 있는 각도를 확보했다. 그 동안 기함 아타고 및 타카오에서는 곤도 제독에게 자신들이 공격하는 배가 미국의 전함인 것 같다고 반복해서 의견을 제출했으나, 곤도 제독은 그렇다면 아군의 포격에 쉽게 무력화될 리가 없다며 부정했다.
결국 인내심이 떨어진 일본 함대는 미국의 중순양함을 확실히 끝장내기 위해 키리시마가 재차 서치라이트를 켜도록 했다. 그 순간, 아까 전하고는 상황이 반대로 뒤바뀌었다. 리 제독과 데이비스 함장은 8 km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키리시마의 서치라이트에 비춰진 사우스다코다를 알아보고, 넷 중에서 어떤 배가 사우스다코타인지 실루엣으로 구별했다. 사격지시가 떨어지자 사격지휘소는 우현으로 전개한 모든 주포와 부포에게 이미 레이더로 추적하며 조준했지만, 리 제독이 오사 위험을 이유로 사격을 금지했던 또다른 대형함을 향해 전포문 일제사격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 이후 키리시마가 워싱턴에게서 두들겨 맞은 명중탄 수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워싱턴의 사격 지휘소는 사격된 8발의 16인치 주포가 명중한 것만을 확인했다. 전후에 미 해군에서 당시 해전에 참여한 일본의 초급 장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9발의 주포와 40발의 5인치 부포가 명중했다. 키리시마의 데미지 컨트롤 담당 장교는 주포 20발과 부포 17발이 명중했는데, 그중 여러 발이 워싱턴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수면 아래에서의 명중탄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1992년에 잔해를 발견하여 촬영한 결과 수중탄 최소 3발이 키리시마를 관통했다고 확인했다. 일반적으로는 위의 조사 내용을 가장 빡빡하게 합산해서 주포 9발에 부포 17발이 명중했다고 본다.
워싱턴의 16인치 주포는 SHS탄종으로 발사되었고, 모든 사거리에서 키리시마를 관통할 수 있었다. 그것을 영거리에서 7분 동안 일제 사격으로 주포 75발, 부포 107발을 퍼부은 결과, 키리시마의 전방 포탑이 전부 완파되고, 후방 포탑이 각각 회전 불가, 장전 불가 상태가 되었으며, 상부 구조물에 화재가 발생하고 흘수선 아래의 파공으로 침수가 발생해 배가 우현으로 18도나 기울었다. 명중탄 중 하나는 타기실과 키를 연결하는 선체 하부 구조물에 직격해서 키리시마의 키를 고장내버렸다.
그리고 워싱턴이 포격하며 특별히 조준하진 않았으나, 키리시마 근처에 있던 아타고와 타카오에게도 포탄이 날아들었다. 아타고는 실제로도 피격당해 손상을 입었다. 이 해전에서 워싱턴은 주포 117발, 부포 522발을 발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곤도 함대의 모든 이들이 미 해군의 전함이 출현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곤도 제독에게는 '정말로' 등장했고, 휘하의 중순양함 함장들은 '또'라고 생각한 차이점 정도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곤도 함대는 엉뚱하게도 사우스다코타가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3.3.6. 미 함대의 이탈과 전투 종료


키리시마의 전 포문이 침묵하자, 사우스다코타는 그제서야 상대적으로 취약한 후면을 적 전함들에게 노출할 수 있게 되었고, 최대한 빨리 좌현으로 변침해서 남쪽으로 도망갔다. 통신설비가 모조리 파괴되어서 리 제독의 승인도 얻지 못해 적전도주를 한 셈이 되었으나, 리 제독은 전투 이후 보고에서 사우스다코타가 무사히 도망가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고 두둔했다. 하지만 사우스다코타의 전기 문제를 몰랐던 데이비스 함장은 전함 사우스다코타가 리 제독에게 '어디로 가는지는 물론, 간다는 사실조차 보고도 안한 채로 내뺐다.'고 개치 함장을 비난했다. 이런 비난이 본의 아니게 리 제독이 개치 함장을 감싸기 위해 했던 거짓말을 폭로한 셈이 되었다.
리 제독은 사우스다코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좌현으로 변침해 과달카날섬 서쪽을 돌아 남쪽으로 도망가리라 예상하고는 워싱턴의 침로를 정 반대인 북서쪽의 러셀 섬 방향으로 잡으라고 지시했다. 곤도 함대는 그때까지도 워싱턴을 찾지 못했으나, 북서쪽에서 발견하고는 구축함들의 남은 어뢰를 전부 발사했다. 워싱턴을 계속 추격해주길 바랬던 리 제독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 구축함들은 워싱턴이 어뢰를 피하다 좌초하길 기대하며 어뢰 발사 후 연막을 치면서 일제히 반전해버렸다. 데이비스 함장은 직접 워싱턴을 조함하면서 러셀섬의 뻘밭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면서 일본 해군이 발사한 어뢰를 전부 따돌리거나 좌초시켰다.
곤도 제독은 함대의 어뢰가 전부 소진되자, 새벽 1시 4분에 워싱턴 추격을 포기하고 모든 함대에게 교전지역 이탈 및 재집결을 지시했고, 함대는 1시 30분에 재집결을 완료했다. 새벽 2시에 우라나미는 아야나미의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고, 새벽 3시 25분에 아야나미를 뇌격으로 처분했다. 경순양함 나가라는 키리시마를 견인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기관실이 침수되자 포기했다. 구축함 아사나미, 테루즈키, 사미다레는 키리시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고, 키리시마는 사망자 212명과 함께 새벽 3시 25분에 전복되어 53분에 침몰했다.
워싱턴은 다음날 해가 밝고 나서야 사우스다코타를 발견했다. 사우스다코타는 리 제독과 사전에 약속했던 랑데뷰 포인트에서 기다렸는데, 워싱턴에게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발전기를 멈춘 뒤 배전반 재기동에 성공했다. 사우스다코타는 이후 뉴욕으로 가서 2달간 수리를 받았다.
구축함 벤험은 그윈의 호위 아래 뉴칼레도니아로 향했으나 침수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승조원들이 그윈에 옮겨탄 뒤 벤험은 포격으로 처분되었다. 그윈은 벤험의 생존자들과 함께 누메아로 복귀했다. 이후 그윈은 하와이로 복귀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수리를 받았다. 이후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최후를 맞았다.
곤도 제독은 미 전함들도 철수하였으므로 자신이 받은 임무 중 수송함대가 과달카날에 도착하도록 하는 것은 완수했다고 여기고, 비행장 포격 임무는 포기한 채 철수했다.
'''일본군의 헨더슨 비행장 포격 시도는 또 다시 좌절되었다.'''

3.3.7. 2차전의 이야깃거리


2차전에서 미 함대를 이끈 리 제독은 미 해군에서 레이더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었고[32], 포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포술 숙련도는 최고였다.[33] 이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리 제독은 레이더를 활용한 야간포격전의 달인이 되었고, 이 전투에서 그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34][35]
과달카날에서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미 해병대원들은 검은 배경 속에서 둔중하고 거대한 함선들이 무지막지한 포격을 주고받는 모습이 마치 '''거인들의 싸움 같았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2차 해전은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물량의 영미, 정신력의 일본이라던가 소수 정예의 주축군(독일, 일본), 물량의 연합군(미군, 소련)이라는 구도는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정보가 오가면서 사마르 해전이나 과달카날 해전 같은 예외들이 예전보다 인지도가 크게 높아지자 기존의 뻔하던 도식이 흔들렸다. 그러자 기존의 도식에 끼워맞추기 위해 21세기 초에 일본 웹상에서 근거 없는 정보들이 마구 퍼졌다. 전사자들에게 명예를 몰아주던 일본 해군의 관습 때문에 교차 검증에서 애너폴리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런 정보들이 영어보다 일본어가 편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많은 커뮤니티에서 마치 정설처럼 유통되었다.
어쨌든, 과달카날 해전 2차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키리시마가 삼식탄을 장전한 것이 사우스다코타에게 의미있는 타격을 주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 키리시마는 미국 최신예 전함과 맞서 싸우며 분전했다는 이미지가 생기고 있어서 이런 변명을 늘어놓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주포에서 발사한 탄중에서 철갑탄 1발만 사우스다코타에 명중했고, 관통되지도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91식 철갑탄 항목에서 다루었다.
  •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의 승조원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열폭한 사우스다코타의 함장은 이브닝 포스트의 인터뷰로 워싱턴을 비하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 헛소리다. 실제로 했다면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어니스트 킹 제독들이 개치 함장에게 별을 달아주기는커녕 어딘가 한직으로 쫒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전함 워싱턴은 아이오와급 전함이 나오기 전까지 월리스 리 제독의 기함이었고, 리 제독이 직접 사격을 관제하는 행동을[36] 하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즉 태평양 함대 전함의 최고 권력자에게 전함에 탑승하는 수병들과 장교들이 시비를 털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영미권 레퍼런스에서 근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반대로 전함 부심이 쩔던 워싱턴의 함장이 사우스다코타의 고장을 모른 채 겁쟁이라고 험담했다는 이야기라면, 아주 틀리진 않았다.
  • 아야나미의 포격이 사우스다코타에게 전기 장애를 일으켰다.
→ 아야나미의 항적은 이 해전에서 최대의 의문거리다. 보통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므로 영미권에서는 넘어가곤 하지만, 센다이 함대가 반전할 때 아야나미는 신호를 받지 못해 워싱턴과 만나고 말았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단순히 무모하게 교전하다가 격침되었는데 다른 경순양함 함대는 반전해서 도망간 것을 면피하기 위해 띄운 것이라고 보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함이 격침되는 포격전 속에서 전 함대는 이렇다 할 손상이 없고, 그 와중에 유일하게 전함에게 격침된 구축함이 존재하므로, 체면 때문에 실제로는 불가능한 구축함 3척 침몰+사우스다코타의 전기 장애의 공을 몰아줘서 패전 속 영웅을 만들어냈다는 의혹이 있다. 게다가 미국 중순양함 함대의 존재를 알면서도 가시 거리가 7킬로미터였던 최전선에 구축함을 단독으로 정찰 보내기란 결코 평범한 결정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미 함대의 보고에 따르면 아야나미가 공격한 배는 워싱턴이었다.
  • 사우스다코타는 무적이었다.
→ 아니다. 리 제독 본인도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는 취지로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render one of our new battleships deaf, dumb, blind, and impotent.
우리의 신형 전함중 한척을 귀머거리[37], 바보[38], 장님[39], 불구[40]로 만들었다.||
또한 보고서에서도 포탑에서 피로 균열이 발생한 점을 언급했다. 대응방어는 보통 한 장소에 피격 한 발을 가정하지 세워놓고 두드려 맞는 것을 가정하지는 않으므로[41], 저 정도로 두들겨 맞으면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벳과 스크류가 손상되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사우스다코타는 독일 전함 들의 최후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자세한 피해 상황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의 세부항목에서 다룬다.
  • 레이더 조준 사격의 가치를 증명했다.
→ 센다이를 향한 사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키리시마에게 사격한 내용은 point blank. 즉 영거리 사격으로 간주하며, 눈으로 확인하며 쏜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전함은 협차를 하면 되므로 레이더 지향 사격 연구는 계속되고, 미 전함들의 적 탐색 및 사격 지휘 체계는 미 해군 수뇌부와 리 제독의 후원 속에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반면 협차 개념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던 미 경순양함들은 그런 혜택이 덜 와 닿았던 탓에 일본 구축함들의 어뢰 앞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고, 알레이 버크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 워싱턴의 함수에서 나오는 파도에, 민감하게 세팅된 산소어뢰의 신관이 반응해서 오발되었지만, 워싱턴의 보고서에서는 완벽한 조함으로 다 피했다고 보고했다.
→ 실제로 워싱턴의 보고서는 휼륭한 조함으로 어뢰를 피했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는 낮은 수심을 이용해서 어뢰를 따돌릴 계획이 있었고, 그것이 성공했을 뿐이며, 함수에서 일으킨 파도에 맞았다고 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파도 오발설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일본 해군의 산소어뢰 결함 문제일 뿐이고, 워싱턴은 동료함을 위한 헌신의 댓가로 신의 가호까지 따라온 행운함의 타이틀을 땄는데, 온갖 미신에 기대던 2차 대전의 해군 장병들이 눈 앞에서 목도한 기적을 외면할 리가 있나.

3.4. 피날레 - 수송작전 대실패


2차례에 걸친 수상함 간의 야간 포격전 끝에 헨더슨 비행장 포격은 무산되었다. 이제 일본 함대에게 남은 선택지는 수송작전마저 포기하느냐 마느냐였다. 곤도 제독으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남아있는 4척의 수송함들을 모두 과달카날의 일본군 장악 지역 해안에 좌초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수송함들이 일제히 해안가로 돌진해 좌초했고, 일본군은 이 수송함에 실린 물자들을 양륙하기 위해 기를 썼지만...
허나 곤도 제독이 생각한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1차전, 막간극에서 반복되었듯이 2차전에서도 15일 날이 밝자마자 헨더슨 비행장으로부터 미군 항공기들이 들이닥쳐서 수송함들과 물자들을 죄다 불태워버렸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엔터프라이즈의 공습이 없었고, 처음으로 미 해군의 수상함, 구체적으로는 구축함 USS 미드가 나타나서 포격까지 한데다가, 미 해병대의 포병들도 끼어들어서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다는 점이었다. 간단히 말해, 수송함대는 과달카날에 상륙한 이후에는 육해공으로부터 위험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도 알았다.
결국 일본군은 전사자 6천 명과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만 톤 중에서 단 5톤만 건졌다. 수송물자 '''99.95%'''의 수송물자들이 수장되거나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써 과달카날 일대의 주도권을 건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4. 결과



4.1. 전략적 의의


진주만 공습 이후 3:7의 열세, 미드웨이 해전 이후 5:5 백중세, 그리고 이 과달카날 해전으로 미군은 6:4 의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과달카날 해전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이 해전은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 근해에서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군의 힘으로 버티던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 육군 역시 보급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극도의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본군이 취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구축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한 소규모 수송밖에 없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과달카날 일대에서 해전이 이어지긴 했지만, 일본군이 과달카날을 탈환하려고 벌인 해전은 없었다. 반면, 미군은 과달카날 일대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드디어 보급과 증원에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를 시점으로 미군은 일본군에 대해서 소극적, 방어적 대응에서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헨더슨 비행장은 미군의 불침 항모로서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투입되긴 했지만 이전 전투의 피해를 계속 복구하느라 함재기 운용효율이 뚝 떨어진 채였기 때문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헨더슨 비행장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해야 했다. 만일,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절름발이 신세인 엔터프라이즈만 투입되었다면 주간에 일본 함대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군의 물자 수송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 해전의 경과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 수송함대를 박살낸 건 미군 항공기들이었고, 일본 함대는 좋든 싫든 야간전을 강요받으면서 날이 밝으면 반드시 퇴각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And then there was one patched-up carrier." - Rear Admiral Thomas C. Kinkaid

"...그렇지만 응급수리된 한 척의 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 - 해군소장 토마스 C. 킨케이드

반대로 산타크루즈 해전 이후 일본군은 동원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없어 대규모 항공작전이 불가능해진 반면, 엔터프라이즈는 적 수상함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항공모함의 이점을 살려 헨더슨 비행장의 플랜 B로 활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일본 해군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아직도 작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고,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도 단념하게 된다.

4.2. 전술사적인 면에서의 의의


이 전투로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수상함 대 수상함 간의 교전, 특히 '''야간전에 있어서는 일본 해군보다 미 해군이 여전히 한 수 아래'''임을 확인했다. 2차전을 승리로 이끈 윌리스 리 제독은 미군이 유리했던 건 레이더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로도 미 해군의 전술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리 제독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것이 훗날 리 제독이 참가한 필리핀 해 해전의 양상을 결정짓는 데 작게나마 일조했다. 당시 마크 미처 제독은 고속전함들로 야간전을 벌이고 날이 밝으면 함재기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를 만류한 사람이 고속전함부대를 지휘하던 리 제독이었다.[42]
상술했듯이 이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함은 미 해군의 개별 전투력이 일본 해군보다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미 해군보다 전력이 우세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을 거치면서 양측의 항모 세력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남태평양 일대에 야마토를 포함한 전함 7척을 비롯하여 수상함들을 더 많이 배치한 일본군이 유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전함의 투입을 주저하고 그나마도 축차투입한 탓에 패배를 자초했다. 반면, 미 해군은 수리중이던 엔터프라이즈도 투입할 정도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과감하게 밀어 넣음으로써 승리를 거머쥐었다. (세력 집중의 원칙과 각개격파)
한편, 이 전투는 당시 '''일본 해군의 야간 포격전 전술에 취약점'''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군 야간 포격전 전술은 고도로 훈련한 견시로 상대를 발견하고 조명탄, 또는 '''상위 함정의 서치라이트 조사'''로 목표를 포착하여 휘하 함정들의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레이더의 성능이 형편없었고 전함등이 서치라이트를 조사해서 탱킹을 하는 동안 다른 함정들이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이더를 켜면 적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어, 적이 대비할 시간을 준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도 있었다. 반면 서치라이트는 켜는 즉시 화력을 퍼붓게 되므로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야간에 서치라이트를 조사하면 상대방에게 레이더 이상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미군의 경우 서치라이트 사용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서치라이트를 조사하는 함정은 하위 함급인 구축함이었다. 하지만, 본 해전 당시 일본해군은 함대 내 최상위 함급의 함정이던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휘하 함정의 목표 포착을 위해 서치라이트를 사용했다가 미군에게 자신의 위치를 발각당하고, 미 함대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해 전투력을 잃고 격침되었다. 더 나아가 '''함대 전체의 전투력 격감'''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히에이의 경우 1차전 당시 함대 전체의 지휘권을 가진 기함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력은 더욱 컸다. 물론 이것이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은 일본군 제독들도 사람인 이상 뻔히 알고는 있었으나, 일본군 특유의 감투 정신은 지휘관과 주력함이 앞장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을 경멸하는 장교들이 굉장히 많았다. 구축함보고 서치라이트를 키라고 하는 지휘관은, 일본 해군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과도하게 수중탄의 개념에 집착하고, 또 거기에 걸맞는 포탄을 제작하여 사용한 일본 해군의 포격전 교리도 본 해전에서 일본군의 패인으로 꼽힌다.

4.3. 논공행상


본 해전에서 전사한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후일 나란히 키드급 구축함의 함명으로 이름이 붙었다.
캘러핸 제독의 기함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는 일본군의 집중 포격으로 함교 인원이 거의 몰살당하고 선체도 대파되었으나 남은 장교들과 승조원들의 필사적인 보수작업으로 침몰을 면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과달카날 해전 한 번으로 캘러핸 제독을 포함, 총 4명이 명예 훈장을 수훈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미군의 경우 고위 지휘관 2명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1차전의 함대지휘관 아베 제독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본토로 소환하고는 강제퇴역시켰다. 2차전의 지휘관 곤도 제독은 전함 파벌에 속했던 탓에 구축함 수뢰전대의 전문가였던 아베 제독처럼 목이 날아가진 않았으나, 야마모토는 트럭섬에서 출항하지 않는(...) 함대의 제독 즉 한직이라 할 수 있는 보직으로 곤도 제독을 보내버렸다.
이 해전에서 대파당한 뒤 잔존 아군 함선과 함께 전선에서 이탈 중이던 경순양함 주노가 일본 잠수함 I-26의 뇌격에 침몰했는데 이때 주노에 같이 탔던 설리번 5형제가 모두 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후부터 미 해군은 형제들이 동일 함정 및 동일 부대에서 근무하지 못하도록 엄금했다.[43] 이 사실에 분노한 홀시 제독은 헬레나의 함장이자 켈러헌 소장이 전사한 후 지휘권을 양도받았던 길버트 후버 대령이 '''물에 빠진 아군을 구출하는 의무를 완전히 외면했고''' 일본 잠수함에게 반격을 하지도 않았으며 주노의 격침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다만 니미츠 제독은 보고 지연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당시 잠수함의 위협이 남은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후버 대령이 철수한 것 자체는 타당한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여하튼 후버 대령은 이후 다시는 일선 지휘관을 맡지 못했고 1947년에 퇴역했다.
사우스다코타의 토머스 개치 함장은 전투 자체는 잘 수행했으나 이 전투가 그의 마지막 함선 근무가 되었다. 산타크루즈 해전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더 이상 함선 근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우스다코타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대공 전투를 치르며 함교에 피해를 입었다. 개치 함장은 이때 부상을 입고 한 달간 부재중이었다가 복귀하였다. 이때 승조원들에게 산타크루즈 해전의 공로로 받은 훈장은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받은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이 부상이 결국 악화되어서 과달카날 해전을 치른 이듬해 1943년 2월부터는 더 이상 배에 타지 못하게 되고, 법무 쪽에서 커리어를 계속 쌓아 중장까지 진급했다.[44]

4.4. 기타


사실 태평양 전쟁의 전환 기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드웨이 해전으로 생각한다. 이유는 4척[45]항공모함을 격침시켰으며 그를 기점으로 점점 일본의 방어선을 줄여갔기 때문이다. 하나 과달카날 해전이야 말로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일본 해군의 전략 방침은 항공모함의 시대가 찾아왔음에도 거함거포주의를 주장하여 이를 기반으로한 함대결전사상이 주된 전략 방침이였다. 따라서 항공모함의 경우 일본 해군입장에서는 보조전력에 불과한 취급이였으며 과달카날 해전의 경우 함대 결전의 주 전력인 전함 2척[46][47][48]을 격침시킴으로써 이는 주요전력을 제거한 해전이 된다. 또한 1941년 말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부는 태평양전선에 무제한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과달카날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이는 불가능 했기에 미 해군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들을 막아야 했으며 야전에서의 승리를 끌어내면서 정부와 약속한 무제한적인 지원을 받으며 후에 에식스급을 전쟁 말까지 양산하고 보그급, 카사블랑카급등 소형호위항모를 대량 건조하면서 전쟁 중에 항모 총 151척을 건조했다.

5. 전력



5.1. 1차


미 해군
일본 해군

5.2. 2차


미 해군
일본 해군

6. 관련 문서


The Battle of Guadalcanal

[1] 워싱턴, 사우스다코타[2]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3] 애틀란타, 주노, 헬레나[4] 히에이, 기리시마[5] 준요. 그러나 함재기 부족으로 활약은 없었다.[6] 해전에서 양측의 함선 손상이 자료마다 다르거나 누락이 있어서 손실된 것만 표기함.[7] 엔터프라이즈와 사우스다코타는 공병들은 물론 군수지원함 중 수리함에 속하는 베스탈 수리요원들까지 달라붙었다. 베스탈 승무원들은 과달카날 해전을 위해 출항하는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서 계속 수리에 집중했다.[8] TARE 기동부대의 제1 에스피리투 산토 그룹과 제2 에스피리투 산토 그룹을 합쳤다. 다니엘 캘러헌 제독은 전자, 노먼 스코트 제독은 후자의 지휘관이었다.[9] 짬밥도 있었지만 캘러헌 제독의 경우 불과 얼마 전만해도 곰리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터라 터너 제독으로선 함부로 지휘권을 내놓으라는 소리를 하기가 힘들었을 거란 추측도 있다.[10] 레이더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캘러헌은 구형 레이더를 장비한 함선들을 선두에 세우고 신형 레이더를 장비한 함선들을 후방에 배치해서 후방의 함선들이 적을 발견한 상황에서도 정작 자신의 함선에선 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격지시가 내려지지 않았으며, 순양전함을 보유하고 있던 자신의 함대에 미군 함대가 정면으로 달려들리라곤 생각하지 않던 아베는 함대에 지상포격을 위한 삼식탄을 장전하라 명령하였으며 초계까지 매우 게을리했다.[11] 아예 적을 찾았다는 정보 교환조차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다.[12] 경순양함 헬레나를 제외하면 이 명령 자체를 들은 미 함선들은 없었다. 다만 미 함선 함장들은 이 전장에서 '가장 덩치가 큰 놈은 무조건 적'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싸워야 했다.[13] 멀리서 지켜보던 구축함 플레쳐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명중했으나 입사각이 나빴던 히에이의 주포탄이 금속 스파크를 튀기며 하늘로 튀어올라가는게 반복적으로 보일 정도였다.[14] 유다치와 하루사메를 공격하다 히에이의 포격에 대파하였고 함장인 에드워드 파커 소령이 퇴함 지시를 내린다.[15] 히에이의 함교를 긁어버린 래피도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다가 키리시마의 포격과 적 구축함의 어뢰를 맞아 결국 침몰했다. 가라앉는 와중에 폭발도 있었지만, 폭발하기 전에 퇴함하였기에 247명 승무원 중 188명이 생존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생존자가 많았으나 함장인 윌리엄 행크 소령은 전사하였다.[16] 아마츠카제에게 뇌격을 당해 침몰했으며 함장인 더글러스 폭스 소령을 비롯한 승무원 60%가 전사했다. 참고로 바튼의 실전투입기록은 이 해전에서의 '''7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17] 하루사메에 포격을 가하고 나가라를 공격하다가 조타키가 고장나 함장인 제시 카워드 중령이 전선 이탈을 지시했다.[18] 당시 플레처는 신형 SG 레이더를 탑재했고 미국 함대 후미에 있었는데 레이더 정보를 받아 당시 해전에 참여했던 여느 함선들보다도 훨씬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미 야전을 겪어보았던 함장 콜 중령은 레이더가 제공하는 신속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경험을 더하여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함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몇 번인가 일본군이 발사한 어뢰가 가까이 접근했고 1발은 함체 중앙으로 뛰어들었으나 함저 아래로 지나쳤고 일제사격 탄막이 플레처를 완전히 감싸면서 떨어진 적도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1발도 맞지 않는 등 행운도 따라 주었다.[19] 애틀란타를 무력화시킨 이후 미 함대 진형에 돌입하여 항행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싸우다 퇴함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승무원은 같은 구축대 소속 사미다레에게 구출되었고 이튿날 미 중순양함 포틀랜드의 포격으로 격침되었다.[20] 유다치와 함께 애틀란타에게 어뢰와 주포를 쏟아부었으나 죄다 빗나갔으며 발사광 때문에 미 함대에게 맨 먼저 찍혀 집중포화를 얻어맞고 화재가 발생, 오른쪽으로 기울다 침몰했다.[21] 그런데 유다치의 오사로 인해 침몰했다는 설도 있다. 이 때 애틀란타는 좌우 1500m 거리에 아카츠키와 유다치를 각각 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유다치의 전투기록에는 애틀란타에 어뢰를 명중시킨 뒤 '''3000m 거리에 있는 애틀란타 너머의 함'''을 향해 해당 함이 가라앉을때까지 집중사격을 가했다고 나와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아카츠키 문서 참조.[22] 마사오 함장이 고집을 부린 이유는 히에이가 덴노가 일본 해군을 순시할때 승함했던 배였기 때문이다.[23] (프린츠 오이겐이 비스마르크급으로 오인받았듯이) 물론 정찰에서 함종을 오인하기는 종종 있는 일이다. 미 해군의 전함, 특히 사우스다코타는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제한을 받은 상태에서 최대의 성능을 뽑으려다보니 덩치가 작은 편이라 오인히기가 쉬웠다. 문제는 해전 도중 자신이 직접 육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순양함으로 믿어 버렸다는 것이다.[24] 그리고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공식적으로도 전함들을 총괄하게 되었다.[25] 실제로 리 소장은 2차 대전 종전이 열흘 지난 1945년 8월 25일, 아이오와급 전함 아이오와의 함상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26] 행정 위주로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제독이 되려면 함장 커리어가 필요하긴 했을 것이다.[27] 중국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짱개' 정도의 욕. 참고로 리 제독은 백인이고, 아시아계의 피는 흐르지 않았다. 다만 리 제독은 해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마침 성인 Lee도 우연히 중국계 성과 유사해서 동료들이 이런 별명을 붙여 주었다.[28] 의도적인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9] 두 구축함이 단시간 내에 입은 피해는 아야나미 만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의 포화였기 때문에, 미군 측에서는 나가라 함대와의 공동 전과로 본다. 3식 12.7cm 50 구경장 함포 항목을 참고하면 좋다.[30] 리 제독이 구축함 전대 내에서 서열 정리를 했다면, 미 구축함들이 좀 더 체계적으로 반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가 일부 존재한다.[31] 구체적인 피격 내역은 이 곳을 참고하는게 좋다.[32] 어지간한 전탐병이나 레이더 제조사의 엔지니어는 명함도 못 내미는 기술자 수준이었다고 한다.[33] 리 제독이 승좌한 워싱턴에선 주포탑 배치 인원들 이외에도 다른 특기의 승조원들도 주포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16인치 주포탄의 장전 속도는 교범상 30초당 1발이었지만 워싱턴의 승조원들은 무려 14초로 끊었다고 한다.[34] 그러나 그런 리 제독조차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등에서는 야간전을 극렬히 반대했다. 이유는 일본 해군의 야간전 능력이 만만치 않고, 야간전에 동원될 항모를 제외한 전력이 대공전투 이외에는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35] 하지만 일본도 타사파롱가 해전 이후로는 구축함과 순양함들의 소모가 워낙 커서 두 번 다시 야간전에서 위용을 발휘 못했고. 충분한 휴식과 레이더 사격 등으로 절치부심했던 미군에게 의해 벨라 만 해전엠프레스 오거스타 만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장기인 야간전에서마저도 미군이 박살냈다.[36] 원래 함대 제독은 기함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37] 통신설비 파괴.[38] 사격통제장치 파괴.[39] 레이더 파괴.[40] 앞에 나열한 모든 것들이 합쳐져 전투 능력을 상실.[41] 2차 세계 대전 동안 주력함이 깐데 또까(...)를 당한 것은 걸레짝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비스마르크와 어뢰로 생긴 구멍에 어뢰가 또(!) 들어가서 만신창이가 된 웨스트 버지니아의 3척 정도에 불과하다. 교전 횟수에 비하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는 많았던 것 같은 미묘한 횟수이긴 하다.[42] 미군이 확실하게 야간전의 우위까지 점하는 것은 알레이 버크 제독(당시 중령)의 새로운 야간전술이 빛을 발하는 1943년이나 되어야 했다. 그나마도 전함 등 주력함들의 야간전술이 아니라 구축함들의 야간전술이었고, 전함이 야간전의 주력이 되는 경우는 이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43] 엄밀히 말하자면 이전에도 금지사항이기는 했으나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설리번 5형제가 사망하면서 확실히 지키게 되었다.[44] 16대 해군 법무감(Judge Advocate General of the Navy)을 역임했다.[45]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46] 히에이, 키리시마[47] 콩고급은 원래 순양전함이였으나 2차 개장 당시 고속전함으로 개장되었다.[48] 우리나라에선 흔히 키리시마를 '기리시마'로 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일본어 청음 중 '카' 행이나 '타' 행이 어두에 오는 단어를 예사소리로 받아들이곤 했다. '타타미'를 '다다미'라고 하듯이. 우리나라의 일본어 표기법은 이런 관습을 받아들여 카 행이나 타 행이 어두에 오는 일본어 단어를 예사소리로 음역하도록 했다. 그래서 東京을 '도쿄'라고 음역하는 것이다.[49] 제27구축대는 다른 곳에서 경계중이었기에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