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영 전투

 

'''기리영 전투
崎離營戰鬪'''

'''시기'''
246년
'''장소'''
대방군 기리영[1]
'''원인'''
낙랑군의 분할 통치에 대한 반발
'''교전국'''

신분활국?
'''지휘관'''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불명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한의 일시적인 기리영 점령
'''영향'''
위나라의 공격으로 인한 신분활국 멸망?
1. 개요
2. 관련 기록
3. 기리영 전투 이전 상황
4. 전쟁 발발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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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46년, 위나라에서 보낸 부종사 오림이 진한 8국의 땅을 떼어내어 낙랑군에게 속하게 했으나, 통역하는 자가 이를 잘못 전하자 마한에서 반발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위나라에서는 대방군, 낙랑군이 연합해 마한을 공격했다.

2. 관련 기록


경초 연간(237년~239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해서 바다를 건너가 2군을 평정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한국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하였고, 그 다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 풍속에 옷 입고 책(幘)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서,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입은 자가 1천여인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치해왔다며,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다르게 전하자,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정시(正始) 6년(A.D.245; 고구려 동천왕 19) 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은 영(領: 단단대령. 지금의 철령을 이름) 동쪽의 예(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


고이왕 13년(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이왕


정시 7년(246년)에 유주자사 관구검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국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제왕기

위 기록들에서 신지#s-1.2(臣智)는 삼한의 군장을 의미한다. 정사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변한과 진한에서 거수(渠帥)들 중 세력이 큰 자를 신지(臣智)라고 한다고 나온다. 중국의 사서 정사 삼국지와 삼국사기 모두 '낙랑태수 유무'가 언급된다. 또한 '대방태수 궁준'과 '삭방태수 왕준'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삭방태수 왕준 쪽이 오기로 여겨진다. '낙랑태수 유무'의 공통된 등장으로 인하여 네 기록은 크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3. 기리영 전투 이전 상황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중국 세력의 한사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237~239년 명제 조예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낙랑군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다. 246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자기 쪽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 한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4. 전쟁 발발과 영향


마침 태수들이 고구려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틈을 노려서 어떤 한(韓)의 신지(臣智)가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고, 백제고이왕낙랑군을 습격했다.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은 다시 돌아와서는 복수하겠다며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한(韓)을 정벌하게 되었다.
전투 도중에 궁준이 전사하고 말았지만 결국 낙랑군과 대방군이 승리해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신지(臣智)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 한(韓)의 신지(臣智)의 세력은 망해버린 반면, 백제의 고이왕은 침공을 두려워해서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낙랑군과 화친을 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이왕은 치고 빠져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한(韓)의 신지(臣智)의 세력은 안타깝게도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그 한(韓)의 신지(臣智)가 한의 소국 중 어느 나라의 신지(臣智)인지 알 수 없으나, 통지(通志)에 인용된 고문 정사 삼국지에 기반해 신분활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일대로 추정된다(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 4-辰國及三韓考」(『震檀學報』 5, 1936),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