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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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44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의 관구검에게 패배한 전투.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이 북옥저로 피신해야 했을 정도로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서 최악의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 비류수 전투 이전 상황
산상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천왕은 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하려 했는데,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을 잡아 가둬버렸다. 이 사신들 중 몇몇이 탈출하여 도망친 끝에 고구려까지 왔는데, 오나라가 위나라보다 강대하다고 뻥을 쳤는지[2]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무사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234년에 고구려는 위(魏)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보낸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하고 목을 위나라에 보내버렸다. 또한 238년에는 위나라가 사마의(可馬懿)[3] 를 보내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4] 이 때까지의 위나라와의 화친관계는 위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손연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였다. 고구려는 공손연 토벌을 도와주고도 위나라에서 얻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사 삼국지나 삼국사기 등 당대 역사서를 봐도 공손연 토벌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위나라에서 고구려에게 뭘 준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장수 사마의조차 고구려한테 의례적인 감사인사를 표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같이 피를 흘리고 얻은 게 없었던 고구려 국내는 정치 불안이 심화되었고, 동천왕 역시 위나라한테 불만을 가졌다.
3. 비류수 전투 발발 및 전개
242년에 고구려는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로 인해 244년[5]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과 선비족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242)
이에 동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인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싸워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 (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를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부상자도 아니고 전사자만 6천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적에게 입힌 것.이런 엄청난 대승에 고무된 동천왕은 자신감이 흘러넘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
정시[6]
중 관구검이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이렇게 신이 난 동천왕은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자 밀리던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고, 이에 고구려군이 크게 패배하여 전사자가 무려 '''1만 8천여 명'''이었다. 동천왕은 겨우 1천여 명을 이끌고 달아나야 했다.'''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나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
4. 비류수 전투의 결과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
구려왕(句驪王) 궁(宮)[7]
이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으나,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8] 하여 환도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二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賴其利
(정시)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9]
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정사 삼국지》위서 관구검전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정시) 7년(246년)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濊貊)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恆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중략)…왕기(王頎)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오환선비동이전》동옥저 조
正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시 3년(242), 위궁(位宮)이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 5년(244),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10]
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位宮)을 쳤다. 위궁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무구검)군을 역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주하니 무구검군이 추격하여 현(峴,고개)에 이르러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획하였고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 6년(245년),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고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여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다.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양서梁書》 동이열전 고구려 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구려의 상황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병력차가 두배나 컸음에도 전사자 숫자는 무려 3배나 차이났고 현대 군사학에서 일반적인 속행불가인 전멸의 피해량을 30%정도로 잡는것에 비해 고구려는 '''90%'''의 군대가 죽었다. 말그대로의 전멸이나 다름없는 셈. 10만명 가운데 3만명만 전사해도 전멸 운운했던 당시 관례상 90%의 전사자가 발생한 비류수 전투가 얼마나 심각한 패전이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이게 왕이 친정한 전투라는걸 고려하면 이때 잃은 병사 대부분이 정예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서 실제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王頎遂北. 銘勳不耐之城.
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漢書地理志曰. 不而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處. 後漢省. 魏志曰. 正始中. 毋丘儉征高句驪. 遂束馬懸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六年. 復征之. 王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왕기가 마침내 북으로 가 불내성에 공훈을 새겼다.
<고려기>가 말하기를 불내성의 현 이름은 국내성이다. 나라안 동북방 670리에 있으며 본디 한(漢)나라의 불이현이었다. <한서지리지>가 말하기를 불이현은 낙랑군에 속하며,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곳이다. 후한때 사라졌다. <위지>가 말하기를 정시 중,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구려의 도읍을 파괴했다. 참하여 머리를 얻은 것이 수천을 헤아린다. 6년, 다시 고구려를 쳤다. 왕인 궁은 마침내 매구로 도망쳤다. 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그를 추적하게 했다. 이에 옥저를 지나 천 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각석기공하여 환도의 산에 불내의 성이라 새겼다.
《한원翰苑》[11]
이 전투에 입은 피해만이 아니라 고구려 군은 이이후 제대로 군사수습도 못하고 도망다니기 바빠서 도읍인 환도성을 털었고 이 이후 관구검의 명으로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고구려 방면을 맡아 동천왕을 추격, 동천왕은 추격당하는 내내 쫓기면서도 24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겨우 패잔병을 수습하고 밀우와 유유, 유옥구의 계책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기습을 하여 추격해온 위나라군을 물리쳤으며 첫 승전 이후 각지의 병력을 최대한 모아 환도성에 주둔한 왕기의 위나라군을 격퇴, 왕기가 위나라로 물러가면서 겨우겨우 고구려를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최종적으론 이기긴 했으나 이후 고구려는 도저히 승전국으로 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술했듯 엄청난 수의 병사가 비류수 전투 한방에 태반이 전사했고 환도성과 국내성[12] 은 관구검이 제대로 박살내고가서 도저히 당장 수습할만한 상황이 아니라 평양성으로 천도해야했다. 기록상 국내성의 재천도가 중천왕 재임 이후인걸 보면 수복자체도 상당히 오래걸렸다. 애초에 관구검 본인부터가 정황상 고구려만이 아니라 북방 이민족을 전체적으로 쓸어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걸 고려하면 관구검이 주로 노린적도 아닌데도 이정도로 밀린 것.
첫 전투인 비류수 전투때부터 여러모로 이상한 싸움이었는데, 상술했듯 기록에 따르면 이 둘의 병력은 2만 대 1만 그것도 위나라가 1만이라 단순계산이면 고구려측이 2대1로 싸우는 격이었다. 심지어 아무리 그래도 일개 장수의 군대를 상대하는데 왕 본인이 나설정도면 그 2만도 대부분 상술한대로 친위대같은 정예도 있었을텐데 냉병기로만 이루어지는 고대싸움에서 이정도의 경이적인 살상율이 나온 것. 물론 양측차이의 여러가지 변수가 있기도 했고[13][14][15] 이당시 위나라가 한창 중국을 정리해가면서 내외로 힘을 떨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아예 못봐주는것도 아니지만...
제일 문제는 '''아무리봐도 유리한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 대패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수도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 칠천량 해전이나 현리 전투 등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의 파급력이 없었던 반면 이 싸움은 수도 함락은 물론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이를 보면 비류수 전투 시작시의 2만 대군은 동천왕 본인도 무리해서까지 수도를 포함한 위나라측 방면 군사를 싸그리 끌어모아 왔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이 패배로 위나라방면을 수비할 군대가 죄다 날아가면서 그대로 도망자신세에 오르게 된 셈. 그나마 기록이 비슷한 고국원왕의 전연에게 패배한 이후의 상황과 유사하다 생각하면 그보다 더 과거인 이 때 이해못할 상황은 아니다.[16]
5. 비류수 전투와 관련한 기타사항
- 이 전쟁이 오로지 고구려와 위나라 단 둘만의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부여, 선비, 낙랑, 백제 등 다른 국가들까지 영향을 끼친 국제적인 전쟁이다.
- 건국 초부터 고구려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부여는 관구검에 의해 파견된 현도태수 왕기가 부여에 도착하자, 대사(大使) 위거(位居)가 대가(大加)를 통해 위나라군에 군량을 지원하도록 했다. 다만 선비나 오환족이 고구려 원정에 동원된 것과 달리 부여군은 동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위나라의 공손연 토벌에 동원되었던 선비족은 이번에도 모용선비를 이끌던 모용목연(모용외의 조부)이 병력을 동원해 협력하였다. 모용목연은 이 공으로 좌현왕(左賢王) 대도독 등에 임명되었다. 모용선비와 중국왕조 간의 우호관계는 281년 모용섭귀가 요서 창려군(昌黎郡)을 습격하면서 깨지며, 이후 모용목연의 손자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로 자칭하여 본격적으로 세력확장을 시작한다.
- 15년 후 위나라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나 중천왕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양맥 계곡에서 위나라 군을 대파하여 이때의 패배를 되갚아 주는 데 성공한다.
- 최훈은 삼국전투기에서 낙곡대전에서 촉에게 발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위나라가 관구검을 이때 띄웠다고 평했다. 그런데 진짜 낙곡대전 때문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했을 가능성도 높다. 왜냐하면 낙곡대전을 했던 조상을 위시한 조씨척족 정권은 비류수 전투가 최종적으로 끝난 247년 직후인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한테 밀려서 완전히 축출당하기 때문이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낙곡대전에서 패해 관구검을 통해 고구려를 정벌했는데, 고구려군한테 대승을 거두긴 했으나 정작 관구검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혀 얻은게 없었다. 동북방 전쟁을 3년이나 했는데 정작 위나라가 땅을 얻었다거나 전쟁의 시발점이 된 동천왕을 잡거나 항복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비류수 전투가 고구려와 위나라 두 나라 모두 아무 이득도 없이 끝나버리자, 위나라는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결국 멸망하는 루트를 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