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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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8대 국왕이자 건길지. 고이왕의 후손들,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고이왕계라고 부른다.
2. 고이왕에 대한 미스터리
2.1. 지나치게 긴 수명
백제 초기 왕들이 그렇듯 삼국사기 상에 기록된 생몰년은 정확성을 의심받는데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해인 166년에 태어났다고 쳐도 고이왕의 즉위는 234년, 68세에 무려 52년이나 재위하다가 사망한 286년에는 120세가 넘게 된다.
2.2. 정체에 대한 논란
심지어 백제 시조 중 하나인 구태 = 부여 위구태왕이며 위구태왕의 후손인 의려왕과 사돈을 맺은 것이 바로 고이왕이라는 학설도 있다. 목지국에 밀리던 백제가 실질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고이왕 시기로 고이왕이 시조화되었다는 이야기. 고구려의 연노부 왕실을 계루부의 태조대왕이 찬탈하면서 계루부 고씨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가설처럼[4] 마한의 목지국 권력을 백제의 고이왕이 잡으면서 백제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식이 된다. 한편, 구태의 台 자는 ‘별 태’뿐만 아니라 ‘나 이’라는 훈과 음도 있기에 ‘구태’가 아니라 ‘구이’로 읽힐 여지가 존재한다. 위구태왕 건국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건국과 엮인 중국 측 인물이 바로 요동 공손씨 정권의 태조인 공손도이다. 요동의 공손 일족은 한반도와 많이 접해 있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옛 대방 땅에 백제를 건국했다'라는 구절을 '옛 대방 땅에 건국한 나라가 백제로 발전했다'처럼 절충적으로 해석하면 얼추 맞는다.
한편, 이름인 고이를 중고한어로는 ko nië로 읽었는데, 이것이 건길지(鞬吉支)의 '''건'''에 대응된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을 뜻하는 말로 '''긔ㅈ'''가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건"과 "길지"는 독립된 단어임이 확실시된다. 이를 양서에 나오는 경주 월성의 명칭 '''건모라(健牟羅, 큰마을)'''에 대응시켜 '''큰 왕'''으로 읽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 업적
3.1. 내정
율령 반포와 내정을 크게 정비하였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멸망 때까지 정확히 400년[5] 간 이어지게 된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으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옷을 정하는 등 공복 제도를 정했는데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백제가 부족 연맹체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6]
백제는 정확한 율령 반포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서기 262년)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보아 국사 교과서에서는 고이왕 때 율령 반포를 했다고 가르친다.
3.2. 군사
238년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군악대의 시초로 보인다.
서기 260년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7]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3.3. 대외 팽창
246년 위나라[8] 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고구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대패하는 비류수 전투이다. 그 틈을 타서 고이왕은 위나라의 세력권인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과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9]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더불어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의 영역에 자리잡았었다고 추정되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10] 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한 전체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11] 하였다. 또한 현재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12]
4. 기타
-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에 이르는 고이왕계의 시조격 인물이다. 계왕 이후 고이왕계는 초고왕계에게 밀려 왕위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역사학자 노중국은 고이만년, 고이해와 같은 이름에 고이(古爾)가 들어간 인물들과 고이왕을 연관짓는 의견을 냈지만 확실하지 않다.[13] 이들의 이름이 모두 고유어 "큰"을 음차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
-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비류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내신좌평 우복(優福),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있을 때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왕의 동생이 2명이나 있기 때문에[14] 이에 근거해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비류 시조설과 관련있는 왕가였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15]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설명에 앞서 한반도 정세를 소개할 때 잠시 등장. 고구려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군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고로 백제군 군복 색은 적색+흰색 조합. 이후 의외로 타이틀 컷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1]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서기 260년)에 三月 以'''王弟優壽'''爲內臣佐平라며 왕의 동생을 우수라고 기록하였다. 기타문단 참조[2] 《신찬성씨록》.[3] 초고왕은 확실하게 개루왕의 아들이지만, 고이왕은 분명하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내용에서 후술.[4] 태조대왕 때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지만 계루부의 연노부 대체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크다. 해씨 고구려설, 태조대왕 항목 참조.[5] 260~660년[6]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 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 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6좌평의 명칭은 후대에 가서 나오며 6좌평에 들어가지도 않는 좌평 명칭인 상좌평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기록이 부실해서일 수도 있지만 고이왕 대에 확인되는 좌평이 2명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교과서에서도 6좌평 제도를 마련한 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그냥 백제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한다.[7] 사열식에서는 날아가는 기러기 한 쌍을 활로 쏘아 맞혔다고 한다.[8]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이다. 당시 황제는 조방이었다.[9]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 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 백제의 고이왕, 신분활국이다.[10] 고이왕의 백제가 마한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게 된 계기가 삼국사기 등 주요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타 문헌 및 정황상 기리영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11] 고이왕 대에 마한 관련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의 온조왕 24~27년 기록의 원래 연대를 고이왕 대로 추정한 것.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상 고이왕~책계왕 재위기에 천안 청당동의 마한 목지국 세력이 갑자기 큰 쇠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분석된다.[12]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인 지증왕 ~ 법흥왕 시대다. 삼국사기에 신라로 기록된 이 시기 충돌의 대상은 충돌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진한 계통의 소국들로 추측된다. 백제는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내치의 정비 및 확장에 힘입어 한강 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 속에 마한 세력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이런 진한의 소국들과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노중국,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14] 우두 또한 왕족으로 보인다.[15]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